빈티지 열차_12.08

by 소산공원

이사를 살 때마다 들고다니는 커다란 캐리어가 있다. 700*550정도 되려나.

허송세월을 할 때 뺀질나게 들렀던 골목에서 단돈 2만원에 파는 걸 발견하곤, 조금의 고민도 없이 사버린 가방이었다. 여행용으로 쓰기엔 부적절하지만 소재도 두툼하고 패턴도 예뻐서 나중에 비싸게 팔아야지하고 애끼던 것. 조르바가 덕덕 발톱을 긁는 바람에 실밥이 터져버려 결국 쓸모를 찾게 되었는데 오래된 사진과 편지를 담아 놓으니 꽤 어울렸다. 그렇지만 이사를 다닐 때마다, 이 무거운 가방이 버겁게 느껴져서 도대체 왜 추억을 이고지고 사는지. 언젠간 미련없이 단정히 정리해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던 무거운 숙제같은 캐리어다.


밤에 화엄사 생각을 하다가, 법명을 받은 수료증을 찾아보고 싶어 밤늦게 캐리어를 열었다. 중,고등학교의 졸업앨범과 오래된 편지들, 스티커 사진, 중학교 때 나눈 교환일기들이 있다. 제일 오래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만들어준 편지 묶음. 자기도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이면서 '너는 참 귀엽구나'라고 써준 편지들. 졸업할 때마다 나누었던 롤링페이퍼, 차마 1분 이상 들여다볼 수 없는 교환 일기. (칑고들아_☆ㄴr눈 우정없이 살 수 없어_ii ) 중, 고등학교 때 뺀질나게 찍었던 스티커 사진들이 모아져있는 박스. 시기마다 나누었던 편지들. 전부를 살펴볼 수 없을만큼 내가 모르는 나의 오랜 이야기들이 있다. 가장 많은 편지를 나눈 것은 다운이일테고, 가장 가까이 손 편지를 주고 받은 사람은 시내. 가장 긴 편지를 보내 준 사람은 엽집. 가장 아픈 편지를 보낸 옛 애인.


추억열차 칙칙폭폭하던 중에, 아버지의 노트를 보았다. 10대의 기억 속엔 책 읽는 아버지와 술에 절은 아버지가 있다. 책 읽는 아버지와 술에 절은 아버지 사이엔 늘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메모를 하는 과도기의 아버지가 있다. 메모는 역시나 술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완전히 절은 상태가 아닌. 그래서 늘 괴로웠던 시절의 기록이 있다.


노트엔 알아보지 못하는 글자들이 대부분이다. '나의 딸 산아, 나의 아들 민아'라며 쓴 편지. '윤숙에게 미안하다'. 이런 말들이 적혀있다. 한번도 입 밖으로 꺼내어진 적 없던 말이다. 도시의 삶, 어울리지 않던 회사와 불화, 돈을 벌던 괴로움. 낭만과 감정을 나눌 수 없던 가족들.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미련하게 불쌍한 삶의 기록. 지금의 나와 별 다를 바 없는 젊음이었구나. 그렇지만 나는 당신보단 조금 더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이런 말들을 해주고 싶어졌다.


그 때의 나는 낮이면 친구들과 다정한 편지를 주고받았고, 밤이면 꾸벅꾸벅 졸며 술 취한 그의 등과 다리를 두드리며 지냈다. 어느 날 몰래, 뒹굴어다니던 그의 메모장을 보곤 슬쩍 내 편지함에 숨겼다. 아버지를 애틋해할지, 미워할지 더 정하지 못했다. 이 기록은 우리의 범벅된 과도기의 기억.


오래된 빈티지 가방을 다시 여물어 닫고. 이 무거운 짐을 조금 더 이고지고 살아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노트를 몰래 훔치길 잘 했어. 이런 생각을 하며 추억 열차에서 내렸다.






오늘 모처럼 노을을 봤다

식어가는 노을은

아무런 느낌도 없다

때묻은 마음 때문인가

느낌의 때가 아닌가

중소도시 그늘의

노을은 이내 식고

난 밤사냥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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