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폭폭 눈이 내렸다. 이런 날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핑계이니 집에서 일을 하기로.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니 천안은 아직 눈이 덜 온다고 하고.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데 다른 날씨인 것이 이상했다.
이상한 상태로 잤다. 내가 왜 자고 있지? 새벽에 계속 이런 느낌으로 깨었다.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는데 직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잔잔한 파도. 파도 위를 들여다보니 더 잔잔한 전자파가 출렁거린다. 멀미하는 느낌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11시에 잤는데 자고 일어나니 1시 30분. 1시 30분에 자고 일어났더니 3시. 5시 30분. 그다음 푹 자고 일어나니 8시 30분. 이런 식.
냉장고에서 며칠을 보내고 있는 콩나물이 신경쓰였다. 김치랑 황태를 넣고 국을 끓이고, 엄마가 준 오래묶은 김과 함께 오랜만에 아침을 챙겨먹었다. 오전 중에 추모 문화제 웹자보를 만들기로해서 포스터하나를 만들고, 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왔다. 오락가락 비가 내려 축축하게 뭉쳐지는 눈덩이. 차에 쌓인 눈을 치우기 좋았다.
오랜만에 0334에. 양다솔의 책과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윤진서의 책을 들고 2층 내 방으로.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고 창이 넓어 추울거라 생각했지만 공기가 따뜻했다. 커피 2잔을 시키고 4시간 넘게 죽치고 있었다. 몇 번이고 비가 왔다가 눈이 왔다가 맑았다가 눈이 왔다가. 날씨의 요정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풍경 같았다.
부산스러운 창문을 찍어대며 일을 하고. 가을에 작업한 책자를 가지러 다즐링북스에 갔다. 지영님은 만나지 못했지만 정성스런 책을 받았다. 책방을 새로 정돈해두셨길래, 아쉬움없이 꼼꼼하게 책장을 들여다보았다. 사고싶은 책이 수두룩했지만.... <나는 하나의 노래 이곳을 지나간다>라는 낯선 책을 사고 말았다. 손으로 페이지를 스르륵 넘겨보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책의 모든 페이지가 반접지로 제본되어있는 책이었다. 처음에 몇 장을 볼 때 파본인가 싶어 살펴보다가 모든 장이 그렇게 되있다는 걸 알았다. 의도를 설명한 부분을 찾다가 실패하고.. 찬찬히 살펴봐야하는군...옛날에 나온 책이라 저렴해서 좋다... 하면서 사고말았다. 그런데 책을 살펴볼수록 이 책이 좋은 말을 걸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든다. 수상허다.
여하튼. 가을에 만든 책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결과물엔 항상, 늘 아쉬움이 남는다. 빛을 담은 인쇄를 만드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거야! 종이와 빛! 그게 뭔데! 내지도 사무실에서 출력해보았을 때는 맘에 들었는데 말야, 막상 제본을 해보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조판 균형! mm! 그게 뭔데! 어떻게 해야 그 균형을 찾을 수 있는건데!
결과물을 받아들고 만족스러웠던 적은 별로 없지만.. 다행인 것은, 책을 만드는 일은 무수한 실패 안에서도 기대하게 된다는 것. 언젠간 조화로운(!) 균형을 가진 책을 만들고 싶다. 앞뒤양옆을 살펴봐도 사랑스러운 책! 언젠간 와닿고 싶지만 늦게 와도 괜찮아.
눈이 와서 좋다. 술꾼도시처녀들 시즌1을 새마음으로 보고 있다. 오랜만에 뜨개질을 하며. 작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모자는 3/4쯤 진행 되었다.모자를 만 들면서도 이 모자에 대해 잘 모르겠다. 어떤 모양으로 누구에게 가게 될까나. 주인도, 계획도 없이 태어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게 이 모자의 삶인가. 꼭 맞는 누군가가 있었음 좋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바늘을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