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14일차.
오키나와에 왔다. 오늘은 오키나와라니. 괜히 근사하고 근지러운 말.
오키나와에서도 국내선을 한번 더 타고 이시가키로 왔다. 이시가키 예찬하던 인디말처럼 공항에 내리기도 전에 이곳이 천국이란걸 알 수 있었다. 숙소로 가는 짧은 길에서도 끈적하고 나른한 여름의 기운이 느껴졌다. 바다다! 바다에 왔도다!
그나저나 일년에 눈에 모기를 물리는 날이 한번 있을까말까하는데, 공룡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눈에 모기를 물려왔다. 설마설마 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어김없이 한 방. 어처구니가 없는 여름방학 14일차.
여름방학 15일차.
아침부터 사고를 쳤다. 숙소에 있는 개에게 물린 것이다. 전날 주인(?)이 있을 때 만져도 된다기에 인사를 하고 배를 까뒤집기도 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주인이 없는 상황이 되자 스트레스를 받았나보다. 다행히 크게 물리진 않았지만 다들 걱정해주어 응급실에 다녀왔다. 생애 첫 응급실을 이시가키에서 가다니. 응급실은 섬처럼 느긋했다. 상처가 얕아서 소독을 하고 약을 타왔다. 큰일날 수 있는 상황이라 이만하길 참 다행. 아- 겸손해야지. 모두에게 폐를 끼쳐 미안하고 고마웠다. 어제는 모기, 오늘은 개. 물리기 좋은 재질이란 별명을 얻었다.
숙소로 돌아와 섬 중간쯤에 있는 가비라만에 갔다. 바다 넘어 멀지 않은 곳에 산이 보이는 풍경이 좋았다. 바다색은 말해 뭐해... 커다란 물고기 떼와 뒤를 쫓는 상어(?)를 보았는데 숙소에 돌아와 영상을 보니 삼치일거란 결론. 물에 들어가 상어에게 물리면 육해공 완성이라는 농담...
오후엔 평화활동가 사츠코 선생님 댁에 갔다. 85세 할머니다.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하셨는데 2시간을 넘게 얘기를 전해주시고 환대해주셨다. 전쟁을 겪은 여성이 자신의 경험이 되풀이되지 않아야한다며 반전활동가로 산다. 그야말로 혁명할머니. 이시가키엔 자위대 기지가 들어섰다. 이 나른한 섬에 군사기지라니. 모두가 나른해져서 전쟁이고 뭐고 다 지겨워졌으면.
햇볕이 뜨거워서 조금만 걸어도 몽롱한 기운이 도는 여름방학 15일차.
여름방학 16일차.
비가 왔다. 6월은 오키나와의 우기라 들어 걱정을 좀 했는데 우리나라 장마처럼 종일 비가 내리진 않고 소나기들이 종정 내린다. 오전엔 마케토미 섬에 배를 타고 들어갔다. 섬의 섬의 섬.
도착한 항구 근처에 지역향토박물관(?)같은 곳이 있었다. 근사한 목조 건물과 정성스럽게 꾸린 전시들. 잠시 앉아 비를 피하기에 호사스러운 곳이었다. 이 작은 섬의 문화와 경관을 지키고자 섬의 주민들이 만든 헌장이 인상깊었다. 팔지 않는다, 더럽히지 않는다, 미관을 해치는 간판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섬은 약속처럼 차분하게 잘 가꾸어진 곳이었다. 자전거를 빌려 우비를 입고 우중 자전거를 탔다. 종종 해변이 보일 때마다 멈춰 세우고 바다를 봤다. 두시간 정도면 섬의 반 정도를 다 돌아볼 수 있다. 비에 젖은 기분 좋은 바다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섬의 섬으로.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숙소로 돌아와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며 먹고 꿀같은 낮잠을 잤다. 이런 순간을 보내고 싶어서 여행을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평범한 주말같은 여름방학 16일차.
여름방학 18일.
요샌 7시에 일어나는 일이 자연스럽다. 눈 뜨자마자 도시락을 사서 해변으로. 나는 바다를 무지 좋아하지만 사실 물에 사는 애들이 무섭다. 언젠가 호핑투어를 갔다가 가이드가 장난을 친다고 내 몸 근처로 먹이를 뿌려서 바다 한가운데서 물고기떼에 휩싸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몸를 휘감던 다른 생명의 감촉이 생생해서 물고기를 쳐다볼 때마다 계속 몸으로 공격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그렇지만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무서운 마음이 드는게 싫어서 심호흡을 하고 무서워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 물에 들어간다. 물에 사는 것들을 오래 쳐다보다보면 어느순간 괜찮아진다. 바다에 갈 때마다 계속 그런 마음을 먹는다.
형형색색의 그것은 아니지만 빛에 반응히는 산호는 정말 아름답다. 살아있을 때, 오래 전 산호는 어떤 색이었을까나. 언제까지 이 빛을 볼 수 있을까.
근처 숲을 산책하고, 맛난 점심을 먹고 바다를 보는 도라이브. 숙소근처 동네를 산책하면서 바다에 풍덩 빠지고 노는 동네 청소년들을 구경했다. 두려움에 뛰어드는 놀이. 내일도 바다에 가고싶다. 제법 여행자 같은 하루를 보낸 여름방학 18일차.
여름방학 19일.
바다에서 문어를 봤다.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고 난 이후라 더욱 흥미진진. 산호 틈으로 다리를 구겨넣고 몸 색을 주변 산호색으로 바꾸는 장면을 봤다. 언젠간 산호랑 문어랑 거북이를 만나러 큰 바다에 가고싶다.
전부터 궁금했던 얀바루국립공원 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한적하다. 해안선을 따라 넓은 바다를 보며 오다가 구불구불한 산 속으로 15분쯤 올라오니 산 중턱에 숙소가 있다. 빽빽하게 우거진 숲이 가까이 보이고 멀리 서쪽 바다가 보인다.
잠시 쉬다 나무만한 고사리들이 자란 숲을 산책했다. 얼마나 이곳에 오래 살았을까. 짧은 길이었지만 주인있는 공간에 몰래 들어간 느낌이었다. 하늘이 넓게 트여있어 구름 사이로 넉을 놓고 노을을 구경했다.
다다미방에는 처음 묵어보는데 밖에서 데려온 끈적한 습기를 다 가져가 버린다. 가만히 눕고 싶어지게 만드는 방이다.
여기저기 멀리 이동하긴 하지만 끼니를 고르는 일, 잠깐 멈춰세워 바다를 보는 일 말고는 별로 중요한 일이 없다. 잠깐씩 긴장하고 충분히 늘어지기. 여름방학이 주는 선물이겠지. 여름방학 19일차.
여름방학 21일.
사키마 미술관에 다녀왔다. 지난 2월에 본 케테 콜비츠의 그림이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이란 이름이었는데, 처음으로 그림 밖으로 슬픔이 넘쳐 전해졌던 기억이 있다. 그 그림을 보고서야 학살의 흔적이 비로소 나의 것으로 다가왔다. 좋아하는 나무를 또 보러가는 것처럼, 이래서 다들 좋아하는 그림을 보러 가는건가보다.
그치만 결국 케테콜비츠의 그림은 보지 못했다. 위령의 날을 맞아 오키나와 전쟁 전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 커다란 그림이 압도적이었던 마루키 이리, 마루키 토시의 전시를 하고 있다. 끔찍할만큼의 사실 묘사가 되어서 쳐다보기조차 고통스러웠다. 어떤 고통은 고통으로만 전해진다.
이번에 좋았던건 <카라마 제도학살>이란 그림이다. 세상의 모든 초록과 파랑을 엎어놓은 것 같은 오키나와 카라마 제도가 온통 흑빛의 수묵화로 그려져있던. 끝도 없이 어두운 섬의 그림이었다. 얼마나 많은 어둠, 얼마나 많은 신들이 필요했을까.
그렇지만 노을을 보면 슬픔을 담는 색이 꼭 검정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틀동안 저녁 노을을 봤다. 끼니를 챙기는 것처럼 노을을 챙겨야겠다. 하루분의 기분을 정리하면서.
곧 집에 간다. 그것도 조금 기다려지는 여름방학 21일차.
여름방학 22일.
집에 돌아왔다. 어찌하다보니 8일여행에 나하공항에 4번이나 왔다. 국내선 부근엔 괜찮은 식당과 맥주가게들이 많다. 오키나와에서 좋았던 건 가볍게 생맥주와 스낵을 파는 집이 많다는 거다. 맛있는 맥주도 발견해서 내내 마셨다. 공항에서 샌드위치와 생맥주를 마지막으로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운전을 하는 잠깐 사이에 좌회전과 우회전의 도로 방향이 헷갈린다. 운전하는 걸 꽤 좋아하는편인데도 도무지 잘 이해가 안되는 신호체계과 회전차로, 깜빡이와 와이퍼의 방향까지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렸다. 운전하는데 이렇게 많은 것들을 신경써왔구나. 네비게이션을 보고 차선을 살피고 회전방향을 고민하고.. 몸으로 쑥숙 해오던 것들이 낯설어지는 경험. 다시 배우는 느낌도 되게 좋구나. 운전을 실컷할 수 있어 좋았다.
집에 오자마자 맵고 얼큰한 것을 먹고 집에와서 씻고 얼린 잔에 맥주를 마셨다. 고양이들은 잘 지내주었다. 매일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밥을 주고, 물을 갈아주고 화장실을 치워줬다. 고마운 일이다. 비가 오지만 오키나와보다는 덜 덥고 덜 습한 느낌. 커다란 어항 속에 들어온 것 같다. 밤 사이 비가 많이 와 산사태와 하천 범람 지역을 주의하라는 알림문자가 왔다. 산사태와 하천범람 가운데 사는데 어쩌나. 무사 장마를 보내길.
여름방학 일기를 최대한 매일 써보려고 했다. 노는 걸 잘 관찰해보고 싶어서였다. 지금껏 무리없이 괜찮게 놀고 있다. 여름방학 일기를 보고 몇몇 친구들이 방학이나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좀 잘 놀고 싶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잘 일하는 것만큼, 노는 감각도 중요하니까.
이제 방학은 5일이 남았다.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내내 남은 5일동안 뭐할지 고민했다. 일상에서 늘어지게-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야지. 동네 도서관에 가고, 만화 책방에도 가보고, 날씨와 어울리는 음식을 먹고, 수영장에 가고. 시장에서 복숭아랑 수박도 사먹어야지, 다짐한 여름방학 22일차.
여름방학 마지막 날.
'여성동지들'이라고 저장된 카톡방이 있다. 호두와트가 성행(?)할 시절에 만난 친구들의 모임이다. 꽤 오래 어울려 놀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낮에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던 경험이 없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술과 안주와 연애와 사랑. 아침에 여는 밥집에서도 술을 마시고 간식을 먹으면서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시간이 되면 술을 마신다. 입맛좋고 술맛나는 친구들. 나는 이들 중에서 늘 가장 먼저 나가떨어져 졸던 그런 나약해빠진 멤버에 가깝다.
방학을 끝내기 전에 마침 타이밍이 맞아 여성동지들과 함께 서천, 군산을 여행했다. 도착하자마자 장항에 있는 해장국집에서 소주를 두 병 마시고, 선유도에 들어가 회와 함께 소주를 네 병 마시고, 천안으로 돌아와 불당동에서 소주와 맥주 9병을 나눠 마셨다. 한잔을 마시면서도 아유 맛있다, 행복하다, 이 집을 선택하다니 너무 잘했다, 이 안주를 고르다니 너무 잘했다, 하며 칭찬과 감탄을 마르고 닳도록 했다. 리액션이 아니라 이 친구들하고 있으면 정말로 잘하고 있는 것, 정말로 좋은 선택을 하고 있단 확신이 든다. 어떤 고백과 대화에도 응 괜찮아, 응 잘하고 있어로 돌아오는 합법의 영토.
워낙 잘 먹고 마셔서 숙취도 없이 깬 마침내 휴가의 마지막 날. 집에서 좀 차분히 뒹굴거려볼까 하다가, 쉬는 건 일 끝나고 하자 싶어 또 급히 서울행. 날씨의 요정이 있는 것처럼 걸으려면 비가 그치고 가게에 들어가면 비가 쏟아졌다. 가고자했던 카페는 딱 한자리가 비어있고, 우연히 찾았던 가게는 어제 가고싶었던 가게의 다른 지점이었고. 그리고 진짜 오래 전부터 사고팠던 CD플레이어를 정말 싸게 구했다. 어른이 되면 꼭 사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것이었는데 어른이 되고 돈을 버니 이걸 사는 날이 오는구나. 감격에 겨워 얼른 돈 벌러가고 싶다는 생각의 회로가 합리적으로 느껴졌던 완벽한 마무리의 날.
내일부터 출근. 5주만에 사과나무 복귀. 방학의 사기를 오래 지녀야지. 얼마나 가는지도 한번보까나. 그럼, 여름방학 이야기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