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 3일 호철과 나는 비빔밥에 빠져있다. 날이 더워 요리를 하지 않다가 밥만 안쳐 이것저것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덮어먹는다. 엄마가 태안에서 잡아다준 성게알로 덮어서, 호철이 파기름내어 만든 강된장으로 덮어서, 윤숙씨가 따다준 토마토와 고추를 덮어서. 곁들이는 김과 쌀. 감자, 양파. 모두 엄마들로부터 얻었다. 덕분에 여름을 보낸다.
2. 한달에 딱 한 장의 CD를 사보기로 했다. 이번달에 고심하다 전진희 앨범을 들였다. 여름과 어울리는 커버 때문이기도 했고 꼭 첫번째로 사고 싶었다. '우리의 사랑은 여름이었지'. 나의 호수가 담긴 앨범이다. 작년 가을쯤에 이 앨범을 들으며 CD를 사고 싶다고 남긴 글이 있었는데, 그 기록의 물성을 만져보게 된다. 여름이 아니었던 사랑도 있나. 여름보다는 호수에 가까운 무엇. 고요함 안에도 생기는 물결. 가만하게 쥐고 흔드는 것들을 잘 들여다보는게 사랑에 가깝나. 이 앨범은 여름보다 호수를 더 닮은 것 같고. 파르르.
3. 미안하지만, 비가 와서 살 것 같다. 비로소 찬 바람이 부는데 오늘 밤은 잘 자겠다 싶다. 이틀을 아이스팩을 얼려 얇은 수건으로 감아 베고 안고 잤다. 더워서 아침에 수영을 간다. 그럼 조금 기운이 난 채로 적당히 바쁘고 졸린 낮을 보낸다. 오늘은 비가 오기 전에 하늘이 좀 깊숙하게 열렸다. 분홍, 보라, 노랑의 기운이 동네 곳곳에 머물렀다. 커다랗고 선명한 무지개가 딱 동네 뒷산만큼 걸려있어서 오래 보았다. 오랜만에 언덕을 내려가 걸었다. 걸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4. 입추가 지났던데. 경칩은 더딤을 탓하면서도 입추엔 가을이 빨리 올까 무섭다.여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더디게 갔으면. 고요한 여름을 계속해보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