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쑤기_1주차] 나를 설명하는 단어
글이되든 밥이되든 일단 매주 써보는 모임입니다.
요술버선, 쏠, 스누피, 산, 제호사, 모험가지나, 오소리, 영은, 임카, 나무가 6편의 글을 함께 쓰기로 했어요.
첫 주제는 처음 답게 '나를 설명하는 세가지 단어'에 대해 썼습니다.
빡이친다.
집에 돌아와서 머리카락을 치우고 싱크대 안에 널부러진 컵을 닦고 건조대안에 들어있는 프라이팬과 그릇들은 매일같이 짜증나게 한다. 왜일까. 일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일까? 저것도 또 일이라서? 집에 오면 내일을 위해서 바로 씻고 집안 정리를 한다. 그리고 나름 안락하게 해둔 거실의 의자로는 갈 수가 없다. 지금 잠들지 않으면 추웠다 더웠다 하는 사무실에서 집중도 하지 못한 채 자고 싶단 생각뿐일거니까.
루틴을 만들고 싶었다. 갓생은 아니더라도 칸트처럼 네시에 차마시는 그런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일상. 그렇지만 일하는 시간에 잡아먹혀 일하는 쳇바퀴로만 시간이 굴러간다. 이건 고등학교 야자하던 때와 다를게 없다. 어찌보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불안하기 때문에, 지금 안 해두면 내일의 내가 힘들어서 그러는 건데 너무 열심히 살지 말라고 한다. 그럴수록 일만 더 늘어난다고 신입이지만 언니는 얘기해준다. 정말? 그렇지만 이미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걸? 수첩을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나름 룰루랄라하던 지난 늦여름에 다른 팀은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편하면 누군가는 고생을 하고 있단 사실도 떠올랐다.
어찌되었든 그 반복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을 찾으려 애는 써본다. 힘들지만 그래도 웃으며 기운 내라고 해주는 사람들, 작은 일에도 고맙다고 하는 사람들, 미안하지만 바쁘시겠지만 하면서 조심스럽게 묻는 사람들 그리고 집에 와서 간식 먹으면서 보는 유튜브 채널들이 짜릿하다. 모두의 남매 마지막화에서 이찬혁은 가스라이팅이 일상이라면서 뭔가 주문을 외우면서 살고 그렇게 또 살아지는 것 같다고 남매인 수현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특히 좋았다. 수현은 한동안 집밖에 나올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돌들의 무대와 연습무대를 한참 본다. 요즘 특히 자주 보는 무대는 세븐틴이 한여름 땡볕에서 땀을 뻘뻘흘리며 춤추고 노래를 한다. 안쓰럽지만 저런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없던 희망도 생긴 달까. 최근에는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파이팅해야지를 재구성했는데 그 무대도 정말 좋다. 최고다... 이야기하자면 옆에 붙어서 조잘조잘 몇시간이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또 악뮤의 오날오밤 클립들도 정말 좋다. 진행센스도 탁월하고 특히 자이언티편을 좋아한다. 밴드 사운드가 가슴을 쿵쿵 울린다. 수신료의 가치.. 최고. 그리고 또 다른 세계인 트위터에서 본 말인데 머릿속에 맴돌면 꼭 다시 찾을 수가 없다. 이해한대로 풀어보면 한국은 이미 피로사회라 ‘생산’이라는 말이 더 피곤하게 들리는데 정신을 맑아지게 하고 진짜 살아있는 느낌은 ‘생산활동’에서 온다는 말이었다. 텃밭을 가꾸고 밥을 지어먹고 동물을 돌보는 일, 책 읽기. ‘소비활동’에서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게 기억난다. 힘은 들겠지만 닳는 줄도 모르고 재밌어서 하는 몰입감도 필요한 거겠지.
사실 다시 일로 돌아오면 지독한 납기가 있는 물류체계 안에서 오전엔 오늘 나가야 할 제품, 오후엔 내일 나가는 제품 그거 챙기느라 하루가 다 간다. 근데 그게 착착 맞아 떨어지면 엄청 좋겠지만 잃어버린 물건, 집중되는 물량, 갖은 종류의 부품, 일하는 사람들의 고충듣기 등 계획대로 되지 않는 계획안에서 철크덕 푸슈욱 간신히 굴러간다. 그래도 엑셀 화면 안에서 뜨개질 하듯 행과 열 사이를 누비고 전화기 너머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조율하고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진행하시죠! 대화가 물 흐르듯 진행되면 오늘도 해냈구나 싶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년차가 되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계속해서 살 수 있을까. 이게 맞나. 의문을 가지며 그래서 내가 뭐 하려고 여기에 온 거지를 다시 톺아보면 내 건물에서 책도 팔고 인형도 팔고 모자도 팔고 싶단 생각이었는데 아직 먼 얘기겠지 하며 오늘도... 철크덕 푸슈욱 네모일지도 모르는 바퀴가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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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버선 240120
용이 쌍으로 있는 곳과 앞두정동을 거쳐 이제 청주아니고 산업단지주민..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30여개의 이력서를 넣고는 두 곳 연락 온 곳에서 화학냄새가 덜 나는 곳을 선택했는데... 일하고 집에서 유튜브보며 느슨하게 살다가 요새 들어 새로운 파트를 맡아 긴장감있게 살고 있다. 주말과 평일엔 다른 사람이 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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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두의 남매-마지막화 14:57초
https://youtu.be/o5BtIoHwB7k?si=3vqUjwRX3rKHnBn2&t=897
2) 세븐틴-파이팅해야지, 콜콜콜 무대
https://youtu.be/0npT8GmirsQ?si=ityPQX36zfRGd_Zx
https://youtu.be/ifeNKqWIX64?si=ZqPvBZ1Y8LYuLwd7
3) 오날오밤-자이언티-모르는사람무대
https://youtu.be/i7W-QcDdV04?si=FwM-FU7wJdWxEhOo
[몫]
공지를 찾지 못해서 유심히 소산의 구절을 반복해서 읽다가 ‘몫’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시기는 지났고, 주어진 내 몫을 해내야 하는 시기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종교가 없지만, 개인이 결정하기 힘든 것들이 몰려올 때가 있다.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오로지 내 책임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연히 찾아오는 안정감이 있다. 나는 어쨌든 지금의 몫을 잘 살고 있다. ‘몫’이라는 단어는 진로고민이라는 네 글자의 함축이기도 하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 해보았는데 잘 안되었고, 잘 하고 싶어했는데 그것도 영 재능이 없는 것 같고, 내가 빛나는 것보단 남들을 빛나게 하는 일에 재능이 있는 것 같고. 나의 열매는 무엇으로 이름 지을 수 있을까, 나에게 주어진 몫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요즘이다.
[공과 사]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공공적인 일을 사람이기에 겪는 이해의 충돌이 있다. 나의 개인적인 욕망은 정치적이며 동시에 사회에 이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길 희망한다. 공공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일수록 공과 사를 넘나드는 일이 중요하다. 개인의 이해와 욕망이 투영되지 않은 얼굴 없는 대중을 위한 것은 껍데기에 불과할 수 있다.
[ADHD의 쓸모]
활활발발에 보면 유난히 ADHD들이 많은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나도 오늘 여기 이 자리에 글을 쓰는 자리에 앉기까지 몸 속에서 기어오르는 수많은 게으름들과 싸워야 했다.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시간도둑들의 쓸모들을 글쓰기 모임을 통해 발견하고 싶다.
자른다
작은 술집에서 일할 때, 서빙을 포함해서 간단한 요리와 재료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중에서 애호박전에 들어가는 애호박을 자르는 일을 매일 했었다. 일정한 크기로 애호박을 자르고 용량에 맞게 소분하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 그 행위 자체를 상당히 즐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특별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마음이 놓이고, 일정하게 썰린 애호박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목공을 배울 때는 나무가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잘려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1200mm x 2400mm의 넓은 판재는 테이블쏘라는 기계로 자른다. 나무를 자를 때는 계획된 치수로 톱날과 테이블쏘 기준대 사이 길이의 공간을 만든다. 그뒤에 톱날과 기준대 사이로 나무를 밀어 넣듯이 자르는데, 잘려나가는 기분이 시원시원하고 좋다. 나무가 정확하게 잘리면 조립되어 붙은 면이 빈틈없이 맞아 떨어진다. 마음이 놓이고, 기분이 좋다. 그러고보니 지금 하는 일인 타일도 특정한 공간에 딱 맞게 자르고 붙이는 일이다. 타일을 붙일 자리의 치수를 재고, 그 치수를 타일에 표시한다. 타일은 타일커터기를 사용해 자른다. 커터기에는 바퀴형태의 날이 있다. 그 날이 타일에 표시된 치수를 지나게 된다. 타일의 미세한 표면을 상처를 내듯이 지나간다. 그리고 타일을 쪼개듯이 힘을 주면 그 상처낸 표면을 기준으로 타일이 잘려나간다. 스윽- 또각. 매끄럽게 잘려나간 타일을 보면 기분이 좋다.
잰다
요리를 할 때, 좀 집요하게 재는 편이다. 압력 밥솥에 밥을 할 때는 쌀 240g을 저울로 잰 다음 넣는다. 그리고 240g의 물을 넣은 뒤 가장 쎈 불에 가열한다. 압력 추가 올라가면 7mm 정도의 불꽃이 보이는 약불로 맞추고, 8분 타이머를 설정한다. 8분이 지나면 압력 추가 자연스럽게 누그러들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누룽지가 없는 멀끔하고 맛있는 밥이 된다. 예외없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
닭허벅살 소금구이를 할 때는 닭허벅살을 저울로 잰 뒤에 100g 무게라면 소금 1g으로 전체 간을 한다. 닭허벅살이 15mm 이상의 두께라면 칼로 저며서 15mm 정도가 되도록 펴준다. 닭허벅살에 소금이 녹아 들었다면, 팬을 준비해서 10g의 기름을 두르고 쎈불로 가열한다. 닭 껍질 부분을 먼저 굽는다. 껍질을 튀긴다는 느낌으로, 노릇노릇한 것 이상으로 타지 않게 껍질 부분을 보면서 굽는다. 닭껍질의 좋은 향이 나고 노릇붉으스름한 껍질 색이 나왔다면 뒤집는다. 뒤집어서 5mm 정도 되는 불꽃 그러니깐 아주 희미한 약불로 3분 타이머를 설정한다. 0.5g의 소금을 뿌려서 조금 더 짭조름한 간을 해준다. 3분이 지나면 접시에 두고 20초 정도 기다린다. 그러면 닭이 가지고 있던 열기로 닭이 익는다. 껍질은 바삭하고 닭살은 야들야들 수분이 있는 닭기름의 풍미가 가득한 닭허벅살 소금구이가 된다. 예외없이 맛있다.
좋은 맛은 계속 반복하고 싶다. 그래서 요리가 맛있어 질 수 있는 조건들을 찾으려고 한다. 조금씩 다른 재료의 무게와 각각의 비율. 가열된 시간이나 온도들을 기록하고, 그 시행착오를 거쳐서 가장 좋은 조건을 찾으려고 한다. 최근 관심을 뒀던 것은 파스타할 때 기름과 면수는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다. 기름이 너무 많으면 느끼해지고, 면수가 너무 많으면 국물이 있는 국수가 되버린다. 그래서 파스타에 들어가는 재료의 총량에 기름의 비율을 어느정도로 할지 정한 뒤 요리해본다. 토마토 파스타에 들어가는 면과 토마토가 400g 일 때, 기름을 80g 을 넣으면 상당히 느끼해지고, 40g 넣으면 기름지지도 아주 묽은 국물이 되지도 않는 맛이 난다. 기름은 총량에 1/10이면 아주 맛깔스럽다는 발견을 했다. 면수는 아직 계속 시행착오 중인데 기름을 40g 넣으면 면수도 40g 넣어주는 게 지금까지는 가장 맛있다.
좋은 맛. 좋은 느낌. 좋은 순간은 계속 반복하고 싶다. 그래서 거기에 닿는 여러가지 조건들을 재고 기록한다. 말하자면 시행착오를 정확히 재고 기록한다.
카페라떼
새로운 카페에 가면 메뉴를 쭉 보면서 오늘은 다른 것을 마셔 볼까? 하다가도 결국 라떼를 시키게 된다. 단골 카페에 가도 오늘은 좀 다른 것을 마셔볼까? 하면서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카페라떼 주세요.” 따뜻한 라떼는 거품이 생명이다. 매끄러운 거품층. 거품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질감을 좋아한다. 집에서 라떼를 만들어 마실때는 거품을 내진 못하지만 맛있는 라떼의 커피, 우유 비율과 온도는 찾아냈다. 우유는 180g, 커피 에스프레소 30g, 온도는 55도.
귀파개
살면서 가장 오랜 기간 잡아본 도구. 칼과 가위보다, 펜과 마우스와 키보드보다 더. 아마도 10대가 되기도 전부터 다루기 시작한 것. 검지 손가락을 접어 첫마디에 도구를 대고 엄지로 누른다. 방향과 회전각도에 따라 누르는 힘을 조절한다. 손목을 부드럽게 회전한다. 귀는 두 개이기 때문에 양 손의 균일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양손잡이이기 때문에 유리하다. 어쩌면 귀파개 때문에 양손잡이가 됐는지도 모른다.
귀파개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게 된 이후부터 가족들의 귀에 매달려 살았다. 파다 파다 살갗이 벗겨져 피가 날 때까지 마른 귀를 파냈다. 엄마 아부지의 귀에 질릴 무렵 외갓집에 갔다. 명절이 되면 어른들은 내 무릎 앞에 주르륵 줄을 섰다. 이모와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피가 섞인다는 건 귀모양도, 귓밥의 형태도 다 닮았다는 것. 막내삼촌과 할머니와 이모는 귓속까지 닮았다. 텅 비어 재미없는 귀. 그들의 귀는 별로 흥미롭지 않은데, 계속 더, 더 해달라고 조르는 것까지도 닮았다. 내가 파는 귀가 유독 시원하다나.
귀파개는 가장 자신 있게 다룰 수 있는 도구다. 펜과 마우스보다 더. 귀를 판다는 건 오래 만져 준다는 거다. 귀를 파는 기분은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쓸어내는 기분과 닮았다. 귀파개를 쥐면 만질 수 있다. 그렇게 무릎에 눕히는 기술을 가졌다. 모든 것은 귀파개로부터 시작하는 거다. 나는 사람들을 잘 만지는 사람이 되었다.
가장 가깝고 연약하고 어두운 구멍을. 별로 흥미롭지도 않으면서 능숙하게.
뜨개실
“이곳에서 무언가가 태어날 거야”
허송세월을 운영할 때 책방 벽면에 붙여놓았던 글이다.
지금 우리 집에서 무언가가 태어날 만한 곳은 주방과 바구니 서랍장 맨 아랫 칸, 침대 정도일거다. 작업방 구석탱이, 얇은 원목으로 된 바구니형 서랍장 맨 아랫 칸은 뜨개실로 가득 차 있다. 이 서랍장은 뜨개실을 담기 위해 주워온 것이다.
겨울이 되면 뜨개질 서랍장 앞을 기웃거린다. 연래 행사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실, 반쯤 쓴 실, 거의 다 쓴 실들이 지저분하게 엉켜있다. 한 타래를 골라 드라마를 보면서 바느질을 시작한다.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어 그냥 둥글게 5코를 잡아놓고 마구자비로 뜬다. 엉성한 면 하나를 완성한다. 컵받침이 되기도 하고 냄비받침으로 쓰기도 한다. 대체로는 아무 데에도 쓰지 않는다. 그래도 그냥 뭉쳐져있던 실의 일부를 풀어내면 무언가가 태어난다. 그 느낌이 좋아 경루엔 아주 잠깐이라도 실을 만진다.
만들어내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사실은 실을 사는 일이 더 즐겁다. 실 가게는 설레고 기분 좋은 선물가게. 내가 매혹되는 것들은 대체로 부드럽고 얌전히 알록달록하다. 한데 모여있으면 따뜻한 것. 부드럽고 보슬한 타래들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맘에 드는 새 뭉치를 데려온다. 여러 개 있는 바늘도 혹시 몰라 또 산다. 그리곤 또 목적 없는 바느질. 선을 손으로 만진다. 쓸모없는 면을 만든다. 작게 만족한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처음부터 이렇게 어려운 주제를 낸 것일까? 단어를 고르며 일주일, 단어 앞에 한참을 머무르길 삼일. 포기하기로 한다. 주제 앞에서 나는 전능하다. 맘대로 써야지!
2024년 1월의 나는 카페에 있다. 2023년에도 그랬고 2022년에도 그랬다. 아침을 챙겨먹고 호와 카페에 나왔다. 나는 한사코 동네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집에서 차를 타고 5분정도 건너온 동네에 단골 카페가 있다. 진한 나무 톤의 가구와 주황빛깔이 잘 어울리는 카페다. 이 곳 사장님은 이 험한 자영업의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낭만파다. 어쩌자고 커피 한잔을 시키면 빵이며 디저트며 서비스를 주는 걸까. 걱정을 하면서도 건내 주시는 서비스를 낼롬낼롬 받는다. 호와 나는 제일 커다란 책상에 자리 잡는다. 엉덩이를 붙이고 글을 쓴다. 거리는 한산하고 손님은 없다. 어쩌자고 일요일 아침부터 문을 열어서, 이렇게 좋은 시간을.
지금은 일요일 11시 35분. 미뤄준 10시가 지났는데도 들어온 글은 한 편 뿐이다. 첫 시간부터 이렇게 되다니. 정말 이렇게 글러먹을 줄 알았지! 어쩌자고 일주일에 한번 씩 글을 쓰자고 했을까? 마감하지 못한 지금도, 마감 글이 몇 편 들어오지 않은 지금도 대책 없이 기분이 좋다. 초조한 마음에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을 동무들을 상상한다. 뭘 어떻게 해보자는 건 아니었겠지. 대책 없이 다들 글 앞에 달려들었겠지. 쓸 수밖에 없는 이 시간이 올 걸 알면서. 그 시간을 믿으면서. 우리는 당분간 비슷한 시간을 보내겠지. 글이 될지 메주가 될지 모르는 생각들에 한 주 내내 골몰하겠지. 어찌할 수 없는 일요일 오전에 당분간 초조하겠지. 그러다가 다 함께 봄을 맞이하겠지.
나의 온갖 잡동사니들이 위태위태하게 널려있는 벽장 속, 그 사이와 사이를 지탱하듯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공들을 골라내는 친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이 공이 좋겠다. 아, 그리고 여기 어디 내가 찾던 게 있는 것 같은데” 하며 몇 개는 빼내어 벽장 밖으로 던지고 더러는 이리저리 들쑤시는 통에 책이며 그릇, 종이쪼가리 같은 것들이 한순간에 와르르 쏟아지는 걸 지켜보며 잠에서 깼다.
그 친구가 다른 사람과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정말이지 엿듣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선뜻 문을 열기가 민망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좀 솔직하게 자기 얘기를 안 하는 것 같아서 어렵지...”
얘도 참.. 그래서 아까 그렇게 내 벽장을 뒤집었나 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소스라치게 놀라며 또다시 잠에서 깼다.
이렇게 또렷한 꿈을 꾼 날이면, 대체 요즘 나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수시로 꿈을 되새김질한다. 겨우겨우 출근을 해 밀린 메일을 읽었다. 이번주까지 글을 한 편 써야 한다고. 위태위태하게 쌓인 나의 잡동사니 중 무엇을 골라내야 나의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을까
이 꿈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꿈만 같은, 그러나 마음은 힘들던 백수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시간과 호기심이 많았던 백수는 우연히 동네 공부하는 언니들의 아지트에서 열리는 ‘집단 꿈 투사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꿈 작업은 이렇게 진행된다. 한 사람이 자기가 꾼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가며 질문을 한다.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쌓여있는 잡동사니 속 물건 중에 기억 나는게 있어요?”, “공을 골라내던 친구는 평소 어떤 친구였어요?”, “잡동사니들이 무너질 때 무슨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에도 자기 얘기를 안 한다는 말을 많이 듣나요?”
질문들에 답을 하다보면 어느새 오래된 나의 역사를 되짚고, 여러 사람들과 사건들이 떠오르고, 남모를 사연과 두려움도 고백하게 되고, 차마 대답을 못하는 질문에 속으로 대답을 하며 나의 심연에 가까워지다가, 급기야는 질질 울고 있는 것이다. 꿈은 자기와의 대화라는 길잡이 선생님의 말에 감읍하여, 그 후로도 종종 혼자 꿈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된 것....
꿈작업을 반복하며 파악한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자주 나오는 장소는 학교(교실), 복잡한 환승정류장이나 역 승강장, 자주 등장하는 사람들은 가족, 특히 나의 자매. 자주 겪는 상황은 열차를 놓칠까, 노선을 잘못 탈까 전전긍긍하는 일,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위로 치솟거나 바닥으로 꺼지거나, 급기야 궤도를 이탈에 수평으로 폭주하는 일, (가족들에게) 무언가 요구받거나 오해 받아 잘하려고, 잘 풀어보려고 무진 애를 쓰는 일.
어렴풋이 알고 있는 어떤 강박과 욕구가 반복되는 꿈속에서는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과 규칙, 노선이 정해져있는 공간, 가족, 애쓰고 불안한 나.
사실 내가 얼마나 전전긍긍 애를 쓰며 사는지는 굳이 꿈과 대화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작년 어떤 송년회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올해의 순간을 꼽아보았는데, 최고의 순간도 그 다음도, 모두 일과 관련된 것이어서 친구들의 야유와 타박을 들어야 했다.
이것은 아마도, 삶의 지향과 밥벌이로 하는 일의 싱크로율이 높은 탓일테다. 누군가에게는 부러울도 수 있는 이 상황은, 그러나 때때로 일과 생활을 뭉뚱그려 모든 시간을 전전긍긍 애쓰는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 나의 기쁨과 슬픔, 일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내가 하고 싶은 말, 아무리 떼어내려 애써도 일과 생활, 양심과 사상, 인간관계까지 자꾸만 한 데 쑤셔 넣어지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의 벽장.
그렇게 걱정할 정도로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일하지 않는다고, 정말이지 부지런히 쉬고 놀면서 적당히 일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실은 일 년, 한 달, 일주일, 하루, 지난 시간을 어떻게 쪼개어 돌이켜 보아도 일을 빼고 회상할 수 있는 시간들이 몇 없다. 그렇다면, 일을 빼고도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친구가 으르렁거리는 말티즈짤을 보내왔다. 나랑 비슷하다는데, 세상에... 나는 개를 좋아하지만 말티즈 같은 개는 영 별로다. 작고 별것도 아닌게 괜히 성질만 더러워서는 온갖 데 짖어대고 불리하면 귀여운 척을 하는게 맘에 안든다. 성질대로 하고 싶으면서 또 예쁨도 받고 싶은 욕심쟁이
몇 해 전 이슈파이팅 전문(?) 단체로 이직하며, 좋지 않은 시절에 자꾸 싸움에 나서다 보니 더욱 더 화가 늘었다. 더불어, 젊은 여자애라고 무시당할까 싶은 자격지심가지 더해지니 으르렁거림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앗 이것이 바로 동족 혐오일까
잘 해내고 싶은 욕심, 얕보이기 싫은 마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 사실은 몸에 배어있는 순종과 친절(?). 이런 것들이 한 데 뒤엉킨, 눈물자국 짙은 말티즈의 꿈.
- 나는 자주 포기한다.
- 그리고 자주 도전한다.
- 내가 찾는 것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
나는 작년 가을 서울살이를 실패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포기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출근길 엉켜있는 지하철이 싫었다. 늘 날카로운 사람들이 미웠다. 귀가 떨어질 것 같은 추위가 무서웠다.
꽉 막힌 시야, 굉음으로 가득한 공간 속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이 꼭 내 것이 된 것만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껏 치장을 하고, 눈이 즐거운 것을 먹고, 빛나는 공간들을 뒤로한 채 돌아오면
차갑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그리고 가끔 벌레가 튀어나오는 초라한 한 켠의 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공간은 이것이 진짜 "나"이고, 진짜 "나의 삶"이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야 할 것 같은 공간에 울며불며 왜 그렇게까지 머물렀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때는 내가 살아야 하는 최종 목적지가 서울이 전부인 줄 알았고, 지방으로 내 거처를 옮기는 것은 아주 크고 부끄러운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실패하기로 결정했다. 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울살이를 포기한 것이다.
무작정 방을 빼고 친구 집인 전북 장수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남쪽을 흠모하던 나는 후에 통영에 있는 회사에 입사했고,
지금은 바다가 보이는 건물에 디자이너 겸, 공간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가끔 창밖에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달콤한 악몽 같던 날들을 꿈처럼 회상한다.
더듬더듬.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내 다른 미래들을 그린다.
그토록 원하던 것은 서울에 있지 않았다.
쥐었던 주먹을 펴보니 내 작은 손, 그 안에 있었다.
아니 사실은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이 기나긴 깨달음의 여정이 기대된다.
모든 것이 되고 싶다.
언젠가 ADHD 검사를 제대로 받아볼까 싶어 이미 검사를 받았다는 친구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그 검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다. 뇌파 같은 것을 검사하는 기계를 사용하는지, 아니면 상담 내용에 의존해 진단을 내리는지. 이미 검사를 받아봤다는 친구는 어떤 장치를 사용해 검사받았다고 했다. 주의력 결핍 장애에도 시각, 청각, 주의 지속력 등 다양한 분야의 검사가 있는데, 자신은 특히 청각 주의력이 약하단다. 청각 주의력 검사는 특정한 소리가 나면 어떤 버튼을 누르면 되는 간단한 것이었는데, 자기는 1단계에서 바로 실패했다나. 아무튼 검사는 과학적이라고 하니, 언젠가 한 번쯤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유는 머릿속에 자꾸 딴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친구와 어떤 이야기를 한창 하다가도 갑자기 다른 게 생각나고, 진지한 회의에서도 아침에 들었던 노래가 생각나 손가락으로 리듬을 탄다. 이 정도만 하면 다행이지만 이 버릇은 이른바 사회생활을 해내는데 불리할 때가 많다. 과제 제출이 임박했는데도 다른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과제를 미루고 미루다가 기한을 넘긴 일이 얼마나 많은지. 덕분에 학점은 엉망이다.
그래도 이 고약한 버릇에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그만큼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어느 속담에서는 한 우물만 파라고 하던데 나는 여러 우물을 파면서 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한 우물만 파는 건 너무 따분하다. 하고 싶은 일도, 취미도 너무 많은데 대체 언제쯤 이 많은 것을 다 해볼 수 있을까? 아직 평균수명의 절반도 안 살아봤는데 인간의 삶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누구는 이렇게 얘기하더라. 삶은 고통스러우며 자기는 짧고 굵게 살다가 빨리 세상을 뜨고 싶다고. 음. 그 원치 않는 생을 이어받아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생명을 연장할 텐데.
Rock and Roll is a risk.
기타를 처음 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배우기를 그만두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인데, 첫째는 줄을 누르는 왼쪽 손가락 끝이 너무 아파서, 둘째는 F, B 코드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포기한다. 나는 기타를 고등학생 때 처음 치기 시작했다. 그 시절의 나 또한 분명히 이 고통스러움을 지나왔을 텐데, 너무 오래된 일이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실 이제는 손가락의 고통보다 다른 커다란 고통이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나만의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실망에서 오는 고통이다. 프로 뮤지션은 아니지만, 여러 곡을 카피해 연주해보고, 친구들과 밴드를 꾸려 합주도 해보고, 나름대로 편곡도 해봤지만 늘 내가 만든 것은 아니라는 허탈함이 찾아온다. 그렇다고 뭔가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이따금 곡을 써보려고 끄적여보지만, 문제는 그것이 너무 구리다는 것. 열심히 쓰고 나면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멜로디와 너무 뻔하거나 재미없는 진행 같다는 생각이 덥석 찾아온다. 삶을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과 마주치는 이야기들을 간단히 음악에 줄줄줄 녹여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베이시스트 앤서니 웰링턴이라는 사람은 ‘의식의 4단계’라고 불리는 개념을 이야기했다(유튜브에 있음).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악기를 마스터해가는 과정은 4단계로 표현될 수 있다. 악기를 처음 잡아본 것만으로도 마냥 기뻐하는 1단계의 사람과, 악기를 마스터해서 열반의 상태에 이른 4단계의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완벽과 미숙 사이에서 고통받는 2, 3단계의 사람들이 있다. 즉, 행복한 상태는 아예 무지하던지, 통달해버리던지 둘 중 하나라는 것. 하지만 4단계의 경지에 오르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냐고요.
이래저래 생각해봤자 뾰족한 묘수는 없다. 그냥 무작정 해보는 것뿐. 영화 ‘싱 스트리트’에는 줄곧 커버밴드만 하는 동생에게 형이 핀잔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커버밴드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고, 그들은 누군가를 위해 노래를 쓸 용기가 없는 겁쟁이일 뿐이라고. 락앤롤은 조롱받을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라고. 아무래도 내가 아직 락스타가 되지 못한 이유는 거기 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