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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산공원 Feb 21. 2024

처음은 특별하지만 반복된다

[메주쑤기클럽] 네번째 주제 - 처음

글이되든 밥이되든 일단 매주 써보는 모임입니다.

요술버선, 쏠, 스누피, 산, 제호사, 모험가지나, 오소리, 영은, 임카, 나무가 6편의 글을 함께 쓰기로 했어요.


네번째 주제는 '처음'입니다.




어떤 처음을 칭구칭긔랑

by. 요술버선


 

피치, 릴리, 데이지 중에 난 항상 데이지였던 거 같다.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꽃동산 유치원에서 만난 친구들하고 셋이서 맨날 피치 놀이를 했던 기억이 친구와의 첫 기억이다. 항상 그러고 놀지는 않았겠지만 태권도장을 같이 했던 유치원이라 천장이 아주 높아서 아무 막대기나 들고 요술봉처럼 휘둘렀었다.


그러면서 또 보고 싶어지는 친구는 공부를 정말 잘했었다. 난 맨날 엄마 보고 싶다고 우는 아이였다. 수업을 마쳤는데 교문 앞에 부모님이 와있지 않으면 집엔 어떻게 가냐고 교실창문에서부터 글썽이다가 병설유치원 다니던 동생을 만나면 더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는 '엄마가 안와...' 엉엉 울면서 동생의 쓰다듬을 받았다. 다른 친구들은 학교 앞 아파트에 살아서 부러웠었다. 그렇게 분리불안을 이겨내고 친구와 잘 놀면서 학교 앞 친구네 집에 가서 책도 읽고 그때는 만화로 된 역사이야기, 과학이야기가 유행이었다. 엄청 똑똑해지는 줄 알았는데... 그 만화책 친구랑 돌려보고 서로 집에 놀러가서 밥 얻어먹으며 책 얘기하고 때론 정글짐에 매달려 낄낄거리고 그러다 무릎 깨져서 또 울고 그런 장면이 떠오른다.


또 자주 갔던 친구 집엔 게임보이가 있었는데 빙하를 달려가는 펭귄게임을 많이 했다. 소닉은 너무 어려웠다. 아직도 카트라이더나 젤다를 해도 캐릭터가 점프하면 같이 들썩거리고 왼쪽으로 가면 몸도 왼쪽으로 가는데 그때도 그랬다. 펭귄이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는 걸 같이 따라하면 옆에서 친구가 놀리고 아줌마가 주는 간식 먹으면서 따듯한 방바닥에 앉아 겨울을 보냈던 기억도 있다.


 그러다가 밍크, 윙크, 소년점프 같은 만화잡지를 보는 친구들하고 어울렸었다. 그 친구네가서 공포영화 링 보고 한동안 혼자 화장실도 못 갔었다. 그 스산하고 무서운 분위기는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여럿이서 봤는데도 나만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리고 보드게임도 많이 했다. 부르마블하면서 황금열쇠 차례가 나오면 다 같이 외치던 황금↗열쇠↗ 이 멜로디가 아직도 기억난다. 어느 날은 에픽하이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콘서트 이야기를 하다가 진짜로 콘서트에 가게 되었다. 친구의 사촌언니가 데려가 주는 조건으로 부모님의 허락을 맡았다. 스탠딩으로 평화의 날을 부르던 무대는 잊을 수가 없다. 같이 소리를 꺅꺅 질렀었다. 엄마들끼리는 아직도 동네에서 마주친다는데 나는 연락처를 한번 날리고 아예 번호가 사라져서 추억만 할 뿐이다. 


보고 싶긴 해도 이미 지난 시간의 사람들이겠지 하며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보게 되면 그들끼리는 연락하고 지내던데 잘 지내지 친구들아? 하고 슥 넘긴다. 얼굴들은 잘 올리지 않아서 볼 수는 없지만 추억 속에는 얼굴이 그대로 떠오른다. 다시 만난다고 해도 할 말이 넘쳐날까 궁금하다. 추억이 많이 보정된 거겠지 싶다. 그때 분명 무슨 사연이 있었을 텐데 멀어진 이유는 왜인지 기억이 안 난다. 자연스러웠던 거 맞는 걸까. 내가 빌런이었던 걸까. 후후. 그렇다고 동창회를 연다던가 간다던가 그러고 싶진 않다. 우연히 마주쳐서 차 한 잔 할 여유가 된다면 어떻게 지냈는지 목소리를 듣고 싶다. 충분히 연락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있지만 그냥 두는 이 어정쩡함을 아시는지. 나의 어떤 처음들을 같이한 친구들이 보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 있다.


짜릿한 처음들을 가장 많이 한 친구들도 있다. 정동진영화제에 가서 기찻길 옆에 텐트를 치고 뜨거운 여름의 태양을 피하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들고 기차에 탄 사람들에게 손을 마음껏 흔들어주고 기차먼지로 거뭇거뭇해진 얼굴로 깔깔거렸던 일, 남해의 유자빵집 근처의 푸르른 초원을 봤던 일, 태백에 가서 비눗방울 원정대를 결성했던 일, 순천에 가서 처음 맛본 짱뚱어탕과 얼굴에 그림 그리고 놀던 밤, 서해바다에서 캠핑도 하고 태풍이 오고 있던 바다에서 파도를 타고 그러고 보니 동해에서 서핑도 했었다. 굿모닝에 타서 노래 고르고 깔깔거리고 새롭고 멋진 곳으로 쏘다녔던 우리들 같이해서 정말 즐거웠고 용감했다. 처음 운전을 시도할 때도 함께한 친구들이었다. 이제는 내가 태워서 쏘다니고 싶은데 말이다. 또 다른 처음을 같이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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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버선 240217

같은 동네에 살아서 걸어서 만날 수 있고 놀이터로 나와 하면 같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그랬던 친구가 있다. 좁다란 자취방에 놀러와 무슨 얘긴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자주 깔깔깔 웃었던 그녀가 잠깐 한국에 왔다. 곧 보게 된다! 아싸뵹




첫 몸으로 살기 

by. 산


친구들과 겨울 산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의 아침이었다. 전날 밤 산행 장비를 두둑하게 배낭에 챙겨두고 소풍가는 마음으로 설레 일어났는데 담이 걸린 것처럼 오른쪽 목과 어깨 부근이 묵직했다. 몇 달 전부터 담에 자주 걸렸던 곳. 한번 아프기 시작하더니 깨끗하게 낫지 못하고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가며 통증이 찾아왔다. 여느 때처럼 가벼운 불편함이라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목 운동을 했다. 그러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번쩍. 불꽃같은 통증이 왔다. 오른쪽 목 죽지가 빳빳하게 굳었다. 처음 겪는 낯설고 강렬한 통증이었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지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의 움직임에도 목을 세우고 있는 근육이 쥐어짜지면서 고통이 밀려왔다. 간신히 지탱하며 앉아있는 잠깐 사이에도 번쩍번쩍 통증이 왔다. 겨울 산행을 약속한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해달라고 부탁한 사이, 잠깐 머리가 하얗게 되더니 온 몸의 긴장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식은 땀이 마구 난 채로 그대로 누워버렸다. 나의 첫 디스크 통증이었다.


다음 날 눈 뜨자마자 정형외과를 찾았다. 의사는 널리고 널린 디스크 환자를 대하듯 말했다. “일시적으로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설명하는 건 하등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말하기를 포기하고 사진을 찍기로 했다. 처음으로 찍어본 목 엑스레이 사진이었다. 하얗게 드러난 내 목 뼈는 일자목을 넘어 앞으로 조금 더 휘어있는, 이른바 역C자 목이었다. 엑스레이 촬영에서 나오진 않지만 모양을 봐선 디스크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의사는 널리고 널린 디스크 환자에게 보여주었을 법한 운동영상을 보여주곤 일단 운동을 시작해보자고 했다. 나의 첫 운동 치료가 시작됐다.


등 근육이 필수라는 말에 생에 처음으로 피트니스에 등록했다. 운동의 목적을 묻는 강사의 말에 “목 디스크 때문에요”라고 말했지만 속으론 이랬다.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요.’ 35년이나 함께 살아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자꾸만 낯설게 느껴졌다. 전에 손쉽게 할 수 있었던 움직임에 허덕이게 된다거나 더 빨리 지치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전에 알던 내가 도대체 뭐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알던 ‘이전의 몸’에는 근거가 없었다. 최소 15년이 넘은 기억, 20년 전의 학창시절의 기억이다. 체력장은 늘 1급이고 체육소녀라 불리던 시절. 그때는 타고난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넘치는 성장에너지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체력과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나 애씀 없이 당연히 존재하고 있겠거니 하면서 10년, 20년이 지났다. 오늘의 이 엉망인 몸과 통증은 당연한 방치의 결과다.


피트니스를 하고보니 방치의 결과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온 몸 운동은 그럭저럭 해낼 수 있지만 작은 근육에 집중하다보니 취약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나쁜 자세로 오래 일을 하며 굳어버린 어깨와 목의 움직임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어려운 자세도 아닌데도 팔만 올리면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의식하지 않는 사이 가슴 앞 근육이 수축되어 어깨가 심하게 말려있었다. 그나마 하체는 튼튼한 편이지 하고 믿었건만 하체 운동 두 코스만에 나가 떨어졌다. 근육을 더하는 운동이 아니라 근육을 새로 생성하는 느낌이었다. 사흘을 갓 태어난 새끼 고라니처럼 걸어 다녔다.


피트니스와 함께 도수치료도 병행했다. 몸에 다양한 통증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몸의 잘못된 쓰임들 때문이었다. 평소의 잘못된 습관들이 점괘를 맞추듯이 발견되는 것이 신기했다. “발바닥을 딛는 자세에 균형이 무너져 허리에 측만이 생겼을 거예요, 아마 이거 안 될걸요?” 하면 신기하게 그 자세가 전혀 되지 않았다. 발을 바르게 딛는 법, 책상에 앉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다음에 오면 바르게 눕는 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서는 법, 앉는 법, 걷는 법까지. 새로 태어난 몸엔 새로 배워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제는 내 몸이 스스로 더 나아질 일은 없을 것이다. 썩 반갑지 않지만 이 낯선 변화들은 앞으로 더 자주 찾아오겠지. 자연스럽게 노화되고 퇴화되겠지. 이상하게도 환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꼭 좋은 것만 환하게 대하라는 법이있나. 번쩍번쩍한 고통과 삐걱거리는 몸의 변화들을 잘 살피고 정성껏 돌보아야겠다. 틈틈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가슴을 쫘악 펴고 앉는다. 편안하게 굽은 몸을 빳빳이 고쳐 세운다. 발바닥을 고르게 딛고 힘주어 선다. 오늘은 노화의 34일째 날.




첫 차를 산다면 트럭

by. 제호사


첫 차를 산다면, 트럭을 사고싶단 생각을 했다. 예전에 목공을 배우면서 여러가지 가구를 만들었다. 친구들 것도 만들고 지인의 가구도 만들어줬다. 그때 마다 가구를 배송하는 일이 늘 힘들었다. 용달을 부르자니 가구 1-2개 옮기는 비용으로는 너무 낭비고, 들고 가긴 무겁고, 승용차에 겨우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나무 자재를 소량으로 사면 늘 배달비가 아까웠다. 조금 사는 건데, 7-8만원이 들었다. 그래서 자가용을 사면 트럭을 사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목공을 배우는 게 끝나자. 그런 생각은 한동안 없었다. 


욕실/ 타일 일을 시작하게 되어서 다시 트럭 생각이 났다. 막연하게 첫 차를 산다면 트럭을 사고 싶단 생각을 했었는데, 트럭이 필요했다. 욕실을 시공할 때, 기존 욕실의 철거된 쓰레기의 양이 많았다. 일반 승합차로는 옮길 수가 없었고, 건설폐기물 집하장에서 내리기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1톤 트럭을 계약하기로 했다. 이 비싼 것을 계약할 때에는 좀 두려웠다. 혹시 일이 잘 안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 그러나 다시 트럭을 사면 욕실/타일 일이 아니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뭔가 잘 못 되어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될 것 같았다. 뭐든 물건을 옮기는 일도 할 수 있지 않나? 하면서 말이다. 1톤 트럭 중에서 가장 길이간 긴 트럭을 샀다. 4인승. 트럭 모델에서는 4인승을 더블캡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공구를 안전하게 싣고, 필요에 따라서 사람을 더 태우고 싶었다. 폭 1740mm x 길이 5125mm x 높이 1995mm 무게는 1955kg  내가 산 것 중에 가장 크고, 무겁고, 비싼 물건이었다.


2023년 12월에 할부금을 다 갚았다. 온전한 내 것. 두려움과는 다르게 3년 간 이 트럭으로 욕실/타일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었다. 차 값도 벌고, 이사도 직접 하고, 친구들의 이사도 도울 수 있었다. 용달 알바까지도 가끔 할 수 있었다. 300% 활용도가 있는 트럭. 첫 차는 트럭을 권함! 물론 주차는 조금 까다롭지만….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by. 영은



30이다. 어쩌다 보니 처음으로 30년을 살았다. 처음 맞는다는 이유로 나이에 매년 일일이 반응하는 일이 가소롭다지만 노화는 어지간히 두려운 일이기에 알면서도 동요한다. 엄청나게 큰 숫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더 어렸던 때의 감각처럼 믿을 수 없다거나 새 나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압도 같을 걸 당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새로우니까 아무렇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나치게 보편적인 경험이기에 번번이 맞딱들임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여간 눈치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느낌에 까지 솔직하지 못할 필요는 또 무엇이겠는가. 이런 말들이 누군가에게 우스워보인다면 나는 여전히 어리기도 하다는 뜻일 것이다.


나이를 먹는 일도 그 나름의 경험이 쌓이면서 받아들임 또한 겸허해지고 담담해져서 어쩐지 미리 이 나이가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 같다. 장황하게 적었지만 '어후 내년이면 벌써 서른이야' 따위의 말을 외다 보니 막상 그날이 도래했을 때에는 '올 것이 왔구나' 만이 남는다. 새 나이가 어떻냐고 묻는다면 답은 이미 쓴 날 보다 앞으로 쓸 날이 많아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다. 예상을 빗나간 건 생각보다 어색하진 않다는 것이었다. 지난 날의 아쉬움을 고르라고 한다면 어릴 때 어리다는 걸 몰라서 불필요하게 의젓했다거나(...했나?) 나이 뒤에 숨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정도인데, 적고보니 참으로 비겁하고 유치한 후회이다. 그때 이미 미래의 나이를 빌려다 썼던 건지 '응애 나 아기'를 외치며 해야 할 일에 앞서 회피(Not happy)타임을 갖는다.

나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특이라고 하지만 좀 더 유난스러운 것 같다...설마 자의식과잉일까?


성인기의 시작이 재수였어서 그랬을까? 밍숭맹숭하게 지낸 휴학기와 코시대 때문일까? 좋아하는 일을 찾기까지 너무 게을렀던 탓일까? 너무 동생들이랑만 어울렸던 까닭일까? 유난스러움의 갖은 이유를 생각해보지만 피상적이면서도 이런 이야기들은 핑계와 변명 같은 이름과 더 잘 붙는 듯하다. 오히려 기질적으로 높은 불안도가 깔끔하고 객관적인 수치에 찰싹 달라 붙어버렸다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30살이 될 때 까지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으면 어떡하지?"


철이 없었죠 어쩌고... 말이 씨가 된 건지 실제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 근데 뭐. 그게 어때서. 그런 서른이 있고 그게 나라는 게 무슨 대수라고 건방지게도 망언을 일삼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또래들이 얼추 자리는 잡아가는 것 같지만 대단히 부럽지도 않다. 이거 설마 질투일까? 돈을 좀 더 버는 것 같아 부럽기는 하다. 부러운 점을 더 꼽고 싶은데 잘 모르겠다. 질투인가 보다 한다. 부모님으로 부터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고는 나의 가난을 감당해주는 정도의 재력이 그분들에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염려와 눈칫밥 그 사이 어딘가에서 감사를 외친다. 앞서 말했듯 나이를 미리 써버린 탓인지 미래를 걱정할 기력이 바닥났다. 그냥 지금 나쁘지 않으니 할일을 해치우며 좋다고 말해본다.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드라마작가 역을 맡은 주인공의 각본 제목이다. 그는 이 제목을 쓰면서도 정말 괜찮아지나 같은 의문을 던졌던 걸로 기억한다. 캐릭터의 나이가 30이었는데 지금 보니 무슨 말인지 알겠으면서도 30살로서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기도 한 것 같다. 그말이 그말은 아니겠지만.

처음은 특별하지만 반복된다. 대단한 통찰도 아니라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아무튼 그래서 다른 여러 실망스러운 처음을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고 너무 아쉬워했던 박영은을 달래본다. 서른이 되면 괜찮아진다고 하니 괜찮아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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