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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산공원 Sep 09. 2024

여행 여운

긴 꿈을 꿈 것 같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둥글고 기일게 늘어져있는 기분이다. 출근을 해 미뤄둔 메일에 답장을 하고 전화를 받고 시안을 만들고 팽팽하게 하루를 썼는데도 좀처럼 늘어진 시간 안에서 벗어나지지가 않는다. 어젯밤은 찍은 영상을 보면서 제목을 달고 이름이 생긴 여행 영상들을 다시 하나씩 보고 있다.

무섭고 아름다운 바다가 자꾸 생각이 난다. 40분 가까이 배를 타고 도착한 장소에서 맘이 급해 오리발도 없이 첨벙 뛰어들었던 바다에 얼굴을 담그던 첫 순간. 10m가 넘는 바다의 짙은 푸른 색과 수십마리 물살이떼들. 환각에 빠진 것처럼 형형색색의 선명한 산호 숲. 푸른산호. 잠수를 하고 싶은데 자꾸 맘이 들떠서 몸도 막 둥둥 떠올랐다.

산호, 문어, 거북이, 반딧불, 절벽, 노을, 무지개, 은하수, 별똥별, 비. 바다 깊은 곳부터 하늘 끝까지 너무 좋은 것들을 봤다. 잠깐 보는 사람에게는 오늘의 날씨가 중요한데 운인지, 요정인지 신기하리만큼 내내 날씨가 좋았다. 하도 보아서 뭔가 계속 보거나 발견하는 발각되는 꿈을 꾸었다. 일본어로 미떼미떼하면서, 뭔가를 봤냐고 자꾸 묻고 확인했다. 좋은 것을 볼 때 중요한 건 꼭 같이 봐야만 했다. 다리를 건널 때 먼 바다에서 떠오르는 거북이, 별똥별 같은 걸 혼자 보는 건 모조리 무효였다. 좋은 걸 같이 본 만큼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돌아오자마자 무겁게 늘어진 몸으로 기후정의행진에 갔다. 함께 좋은 걸 볼 사람은 없고 약간의 의무감 때문에 갔는데 즐겁게 다녀왔다. 상희샘 말처럼 이 운동이고 저 운동이고 일단 하고 나면 좋은 것...... 행진을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사진을 찍었다. 기후는 엉망이라면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의 날씨가 좋아서겠지. 좋고 즐거운 걸 함께 봐서겠지. 


내가 여전히 지키고 싶은 건 좋은 날씨와 같이 볼 사람들. 바다, 산호, 은하수. 바닥부터 하늘까지 원래 있던 것들. 운이 좋으면, 날씨가 좋으면, 곁에 있다면 마주할 수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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