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어쩐지 내 생각보다 순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조금 더 하고싶은 일에 집중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일을 벌리고 있었다. 그게 스스로도 좀 당황스러웠다. 호두 멤버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왜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 일들이 불쑥 입으로 튀어나올까.
우리끼리 재미도 있었으면 좋겠고, 약간의 의미와 보람도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주말마다 판매되는 내역들 보단, 재활용 될 수 있는 쓰레기들의 정거장 역할을 할 때 조금 의미와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만큼 재밌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몇번의 회의는 죄지은 마음으로 참여하게됐고, 고민하다가 이야기를 꺼내놓았을때. 또 우리는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주말에 가게를 열고 물건을 판매하는 일 보단 우선은 우리가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해보는 것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지 않는 일은 두렵다. 그래도 일단 재밌을 것 같으니, 매주 글을 한편씩 써보기로 했다. 우리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재미있는 궁리를 같이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좋다. 일단 그것으로 좋다.
처음이 어려울까, 두 번째가 어려울까?
그에 대한 생각이 최근에 바뀌었다. 예전에는 항상 처음이 어려웠다. 난 뭘 해도 서툰 인간이었으니까. 서툰 처음을 겪고는 두 번째는 이것보단 나을 거라고 자신 있게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처음은 어떤 식으로든 해내는 일이 되었다. 오히려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무작정 해낸다.
예를 들면 카카오톡 이모티콘은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시안을 만들었고, 처음 넣은 시안이 승인이 됐다. 그러고 1년이 지났나, 2년이 지났나? 여전히 두 번째가 없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완성된 원고를 그렸다. 이걸 그리고 나면 나는 다른 작업들도 술술 하게 될 줄 알았다. 한번 해봤으니까. 하지만 또 1년이 다 되어가는데 두 번째가 없다.
오히려 생각이 많아지는 탓인 것도 같다.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머뭇거림이 많아졌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내지 못하니, 내가 이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도 못한다. 사회생활이랄까, 그런 사회적 동력을 주는 게 '일'이라면. 나에게 내적인 동력을 주는 일은 '작업'인 것 같다. 그러니 그걸 잘 해내고 싶은데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은 없고 마음만 초조하다. 그래서 사실은 변명할 공간이 필요했다.
작업을 하고는 있으나 아직 보여줄 게 없는 변명 같은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호두와글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지금, 뜨끔! 하고 알아차렸다. 처음보다 두 번째가 어렵다 정말로!)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과나무에서 퇴근하면서 결심하는 것은 대체로 비슷하다. '얼른 집에 가서 저녁 챙겨 먹고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책상 앞에 앉아야지.' 하지만 가끔은 산책을 빼먹고 가끔은 책상 앞에 앉는 일을 빼먹는다. 어떤 효용감이나 성취감을 맛보지 못하고 침대로 들어갈 때는 세상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나는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이길 바라는데, 사실 나는 그림을 늘상 그리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 때문에 가끔, 어쩌다 생각나면 찔끔. 그림을 전공했으나 그림을 진정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늘 버려지지 않는 미련은 있었다. 그런 생각에 골똘했던 작년, 재활하는 심정으로 인체 책을 사다가 묵묵히 따라 그렸다. 매일 좌절했지만, 좌절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내일 조금 더 좋아질 거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다독이는걸 잘 못했던 것 같다. 생각만큼 안 그려지면 '안 해!'하고 뒤돌아버렸던 순간이 더 많았다. 매일 실망스러운 나를 다독이며 그려나가기 시작하자 다시 그림이 조금씩 좋아졌다.
인체책을 한번 훑고 나서는 그냥 혼자서 크로키를 시작했다. 매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선언해놓고 매일 하지 못할 나를 상상하며 조용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친구와 얘기하다가 같이 매일 크로키를 하게 됐다. 크로키를 하는 게 나를 책상 앞에 앉게 했다. 조금씩 그림이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크로키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작업들이 진전이 없었다.
작년엔 꼭 그린다던 시무룩한걸의 후속 이모티콘을 올해는 진짜로 꼭 그릴 거다. 벌써 3번째 스케치를 다시 했다. 상반기 중엔 꼭 제안을 넣을 테다. 두서가 없지만, 가장 가까운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다시 30일 크로키가 시작됐다. 매번 나름의 목표를 정해두고 하는데, 이번에는 어떤 목표를 갖고 해야할지 아직 모르겠다. 습관적으로 그냥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늘상 그냥 그린다면 무엇이 나아지는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무엇이 정확히 어떻게 나아지고 싶은지 생각하며 그리는 편이 좋다. 첫날은 호기롭게 자동차를 그렸는데, 둘째 날 그린 자동차는 어떻게든 그렸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업로드하지 않았다. 셋째 날인 오늘은 뭘 그릴까. 무슨 생각으로 그리지.
3.8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충남기획단에서 준비한 <그을린 얼굴로 웃기가 왜 이렇게 어렵지>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그리고 오늘은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에서 여성의 날을 맞이해서 청년 여성 노동자들을 인터뷰 한다며 사과나무에 오셨다. 인터뷰 내용은 일하면서 느끼는 성차별이나, 세대간의 차이 같은것을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 이야기하다보니 큰 주제는 ‘페미니즘’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토크 이후에 머릿속에 내내 나의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내가 페미니즘을 만난 이야기를 하려면, 첫 사회생활을 하던 무렵을 이야기 해야하고, 사과나무와 호두와트에 관해 그리고 찌찌언즈까지 이야기 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이 일베와 메갈로 떠들썩 할 때도 사실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페미니즘 이전에 여성주의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고, 지금 쓰이는 페미니즘과 여성주의가 다른건가 싶었다. 왠지 ‘페미니즘’의 단어 자체가 왜곡 되고 오염된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이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 시기에 나는 내 막막함에만 골똘 했었다.
20대 중반에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일주일 출근하고서는 엉엉 울면서 퇴근했다. 한달을 다녔고, 여전히 한달 가지고는 이 회사생활에 대해 내가 얘기할 것도, 얻어갈 것도 아직 없다는 생각에 1년을 다녔다. 좋은 점들도 분명 있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이 더 크게 보였다. 그래서 1년을 채운 시점에 워홀을 준비했다. 그 비자를 받아 가슴에 품고 나머지 1년을 더 버티다 출국했다.
이 무렵이 나에게 가장 긴 터널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그때 호두와트를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때 우리엄마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저녁엔 자신의 흥미를 쫓아 캘리그라피도 배우러 다녔다. 그때 배웠던 선생님이 호두와트의 멤버였고, 엄마가 집에와서 그 젊은이들에 대해 몇번 얘기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나보다 재밌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관심이 없었다. 한번은 엄마가 섬잔치 라는 것을 한다며 나를 이끌고 단대호수에 갔던 적도 있다. 섬잔치는 호두와트에서 기획하고 진행했던 행사였다. 또 그당시 나는 천안에서 나만빼고 재밌게 노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어 배만 아팠다. (사실 이때 네이버에 검색도 해봤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어서 배가 더 아팠던것 같다.)
일본에서 1년을 보내고 돌아와서 우연한 기회로 사과나무에서 일하게 되었다. 거기서 일하게 되면서 드디어 나는 호두와트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사장님 주변에 있었고, 다 연결되어 있었다.) ‘아, 이사람들이 여기 다 있었구나!’ 왠지 나혼자 쥐고 있던 공허한 퍼즐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전에 배아픔은 샘이 났던거였다. 나도 그 안에 들어가고 싶었던 거였다. 신기하게도 내자리가 있었던 듯 나는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바랐던 그 자리에 안착했다. (착각일까?)
이제 막 사과나무에서 일을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세계를 넓혀가는 시점에 명재쌤이 페미니즘 독서모임을 같이 하자고 했다. 사실 언젠가부터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때는 정말 운을 뗄때 마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며 말을 시작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전에도 독서모임을 해본 적도 없었고 더군다나 페미니즘 도서는 읽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무튼 결국 나는 이름조차 뭔가 수상한 찌찌언즈에 합류해서 페미니즘 도서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진 못한다. 하지만 대체로는 마땅한 이야기들이었고, 혹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건가 궁금했던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의문스러웠던 경험들이 나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어쩌면 여성이어서 겪은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왠지 나는 조금 자유로워졌다. 내 안에 있던 의뭉스러웠던 부분들을 말함으로써 나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나는 할말이 많아졌다. 말하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내가 있었다.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나서 가장 뚜렷하게 달라진 점은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스스럼없이 말하게 됐다는 점이다. 페미니스트가 뭔가 불온하고 엄청 어려운 단어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페미니스트가 되는건 어렵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더 많은사람들과 페미니즘이 스며있는 대화들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2022년 3월 13일 일요일
이날까지는 제발 무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왜냐하면 청년주일이었기 때문에. 특송도 해야됐고. 정확히 언제부터 목이 잠긴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분명히 인지한건 그날 오후부터였다. 아침에 잠깐 잠길 수 있지만 계속 목이 가라앉는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자가키트를 해봤다. 하지만 음성이 나왔고, 자러갔다. 그런데 새벽 4시쯤 깼다. 이시간에 깨는 일은 드물었고 내 목은 계속 잠긴 상태였다. 쎄한 느낌이 들기 시작해고 그때부터 꿈에서 계속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깼다.
2022년 3월 14일 월요일 격리 1일차
쎄한 느낌에 씻고나서 자가키트를 다시 해봤더니 생각보다도 선명한 두줄이 나타났다. 두둥! 하고. 그래서 빨리 단톡방에 말하고 엄마한테 말한 다음. 사무실에 가서 파일들을 챙겼고, 그다음에 시청앞에 갔다. 그랬더니 줄이 너무 길어서 일단 동네 병원에 가봤다. 한 곳은 오전 검사는 마감되어 있었고, 반대편은 아직 마감을 안했길래 가장 끝줄에 가서 섰다. 줄이 생각보다 안 줄어들어서 1시간 반 정도 서있어야 했다. 거기 서서 소년심판을 봤다. 오늘부턴가 또 정책이 바뀌어서, 병원에서 한 신속항원검사 만으로 확진 판정을 받는단다. 그래서 PCR은 하지 않아도 됐다. 의사쌤이 최시내씨는 양성이네요~ 했고, 약국에서 약을 받았다. 확진자는 약은 무료란다. 진료비 8천원 정도만 계산하고 약을 받아 나오는데 비가 엄청 내렸다. 처량한 확진자가 되어 집으로 들어갔다. 아픈다는것을 확인받고 나면 왠지 더 아픔이 밀려온다. 온몸이 으슬으슬 쑤시고, 목이 칼칼했지만. 오늘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일을 마무리하고는 조금 일찍 자려는 생각으로 누웠는데, 피곤한데 눈은 점점 말똥말똥했다. 심박수는 평소보다 높았다.
2022년 3월 15일 화요일 격리 2일차
잠이 안와서 결국엔 평소 자는 시간하고 비슷하게 잔 것 같다. 일어나니 땀이 흥건했다. 그렇다고 어제보다 더 아프거나 한 것 같지는 않다. 약을 먹기위해 부지런히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랬더니 소산언니가 보내준 포케가 도착했다. 포케는 점심으로 먹었다. 마감이 코앞에 있는 일이 몇개 있어서 그것들을 하고있다. 오후엔 엄마가 두 손 가득 구호식품들을 챙겨다줬다. 분명 전화로 이거저거 챙겼는데 먹을게 없다 그러더니, 절대로 일주일치 식량이 아니다. 저녁은 엄마가 해다 준 제육볶음과 나물반찬 (콩나물! 시금치!) 과 오이소백이로 먹었다. 입안이 봄이다. 동생이 4일차 지나면 미각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그래선 정말 곤란 할 것 같다. 냉장고가 터질거 같거든.
2022년 3월 16일 수요일 격리 3일차
6:30 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머리나 몸은 가벼워진 것 같은데 기침할 때마다 목 안쪽은 점점 따갑다. 어제 파인애플을 먹는데 목 안쪽으로 넘어갈 때마다 쓰렸다. 삼키는건 괜찮은데.. 그냥 목구멍이 아파. 아침을 먹기에도 이르게 느껴져서 조금 더 침대안에서 뭉갠다. 일어나선 호사스러운 아침을 챙겨먹고 10시 무렵에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11시쯤부터 너무 배고파서 11시 반에 점심을 먹고, 조금 노곤해져서 약을 먹고 1시간쯤 누워있었다. 그러고 나서는 왠지 다시 몸이 무거워졌다. 조금 멍때리다가 일을 하고 저녁 먹으면서 쉬다가, 내일 오전에 넘겨야 할 일이 있어서. 교정파일이 넘어오길 기다리며 다른 작업을 했다. 하지만 교정파일은 늦어졌고, 새벽에 후다닥 해야 할 것 같다. 코로나 걸리고 왠지 아침에 눈이 잘 떠지니까......내일에 나에게 맡겨야지.
2022년 3월 17일 목요일 격리 4일차
알람을 6:50쯤 해놓고 잤는데, 한시간 간격으로 깨서 카톡을 확인했다. 꿈에선 계속 교정파일이 언제쯤 오는지 물어보려고 고민했다. 그리고 다시 깬게 8시 쯤. 파일은 7시쯤 들어와 있었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아직 머리랑 코랑 입이 웅웅거려서 약을 먹어야 하니까 일단 입에 뭔가를 넣는다. 또 나의 식단이 있었는데 ㅠㅠ 마감이 더 급하다. 흑. 먹고, 일 하니까 심심할 틈이 없는데. 갇혀있다는 느낌이 여실하게 느껴진다. 마감은 점심을 넘기고 어찌저찌 마무리 되었다. 점심으론 떡볶이와 콜라를 먹었는데, 떡볶이에선 짠맛만 났다. 콜라의 달콤함을 느낄 수 없었다. 동생이 말한 4일차부터 미각이 사라진다는게 진짜였나. 바이러스가 코에 죄다 몰린것 같이 찡하면서 막혀있다.
2022년 3월 18일 금요일 격리 5일차
늦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이 업무전화를 받는 날일 때, 첫단추를 잘못 끼웠단 생각이 든다. 빨리 토요일이나 왔으면. 전화받고 양치하는데 치약맛이 하나도 안난다. 목소리가 더 이상해진 것 같다.
2022년 3월 19일 토요일 격리 6일차
찾아보니 코가 찌릿찌릿하고 맹맹한 상태를 코매움 이라고 말하더라. 코매움이 지속되고 있고, 맛과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눈알이 살짝 압박을 받는 느낌? 아침을 거르고 늦잠을 잤다. 어제밤부터 꿔바로우가 먹고 싶어서 일단 시켰다. 일단 냄새가 나질 않는다. 결정적인 맛은 나질 않는다.
2022년 3월 20일 일요일 격리 7일차
여전히 코가 맹한 느낌이 살짝 들지만, 대부분의 증상이 거의 사라진 것 같다. 커피향은 여전히 나지 않는다. 뭐든지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는데, 아무튼 내가 알던 냄새에서 많이 옅은 냄새가 난다. 입맛이 없다고 해서 아예 안먹고 넘어가진 않는다! 벌써 17번째 약을 먹었고, 밤에 18번째 약을 먹고 잘거다. (두번 정도 빼먹었다.) 격리가 끝났다는 것은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그래도 산책은 하고 싶다. 맛이 안나더라도 맛있는걸 먹으러 가고 싶다! 기다려라 세상아!
얼마 전에 서울에서 친구들이 왔다. 이야기를 하다가 ‘천안에서 사는 장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자리에서는 뚜렷한 장점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천안은 언제나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초등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1반밖에 없었다. 6년을 같은 친구들과 보냈는데 6학년 무렵엔 이유 없이 답답했다. 그래서 중학교도 대안학교를 가볼까 하고 알아봤었다. 하지만 학비와 거리와 기숙사 생활이 두려워서 포기했다. 고등학교 땐 천안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전라도 담양에서 학교를 다녔다. 17살엔 정말로 학교가 재밌었다.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왔다가 엄마가 빨리 학교에 가라고 해도 아쉽지 않은 마음으로 냉큼 학교로 돌아갔다. 그러곤 대학은 다시 천안으로 왔다. 인 서울에 실패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전공이 천안에 있었고, 유일하게 지원한 학교에 합격했다. 대학교를 재미없게 다니긴 했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시기였다. 그러곤 천안에 머물던 친구들이 자기 일을 찾아서 대부분 상경했다. 20대 땐 항상 서울을 꿈꿨던 것 같다. 한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천안에 자리를 잡게 됐다. 아무래도 사과나무에서 일하게 됐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로 사과나무에서 일하게 됐고, 거기서 20대 내내 해소되지 않았던 나의 문제들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일하는 또래들을 만날 수 있었고, 사과나무에서 나의 쓸모를 계속 찾아주었다. 일을 서툴게 하면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과 세상을 만날 기회가 생겼던 것 같다.
얼마 전에는 호두 구판장 친구들과 시작한 책모임에서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을 읽었다. 어려운 책이었지만 납작하게 이해한 대로 말해보자면. 사람됨은 자연한 것이 아니란다. 사람됨을 수행하고 연기하고, 또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의해 그냥 인간이 아닌 사람이 되는 거라고 한다. 나의 사람됨은 사과나무로부터 받은 부분이 큰 것 같다. 사과나무에서 일하면서 일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 또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으면 좋을지 배우고 있다. 그래서 내가 천안에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사과나무에서 일하는 점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배운 좋은 것들을 우리 교회 가서 써먹는다. 우리 교회 애들은 이미 나의 서툼을 다 눈치챘음에도 잘 덮어주고 채워주면서 같이 놀아준다. 그게 나의 안전망이고 울타리라고 느낀다.
그게 천안의 장점인 것 같다. 지금 여기에 살게 하는 이유들이다.
금요일에 S.W.C 모임이 있었다. S.W.C는 걷자고 모여서 걷기보다는 먹고 마시는 모임이다. 그러던 중 이번 주에 가장 잘한 일에 대해서 얘기했다. 누군가는 화를 내지 않은 것, 누군가는 복싱을 시작한 것, 누군가는 거절의 말을 한 것, 누군가는 일하면서 했던 노력들에 대해 얘기했다. 정작 질문을 던진 나는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꼭 질문 앞에서는 답이 생각 안 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이번 주에 드디어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두 번째 이모티콘을 제안했다!
세 차례 정도 스케치를 다시 했는데, 그럼에도 아주 마음에 들진 않는다. 아마도 거절당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일단 내 손을 떠나보냈다는데 조금 홀가분해졌다. 거절당한다면 다시 수정해서 제안할 테다. 그리고 새로운 시안도 작업해둬야지.
고등학교 3학년때 담임선생님은 국사 선생님이었다. 매번 수업시간마다 칠판에 단기 몇년, 몇월 며칠 이라고 적고. 그날 역사상 의미 있었던 날들을 알려주셨다. 여러 날들이 있었고 필기도 몇번 했던 것 같은데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선생님이 4월 19일을 적으면서 너희가 대학에 가서, 사람들이 그날이 어떤날인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너희가 잠시 4.19 혁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었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속으로 ‘절대로 먼저 말하진 못할거야’ 하고 소심하게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다닐때는 5.18민주화운동과 4.19혁명에 대해 강조해서 배웠고, 매해 5월 18일엔 담양에서부터 망월동 묘역까지 걸어갔다. 4.19혁명 기념일엔 학교 뒤에 있던 산을 올랐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런식으로 기억하는 법을 배웠었네.
하지만 살다보니 기억해야 하는 일들은 계속 늘어났다. 4.16도 그런 날이 되었다. 그날이 되면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려고는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세월호참사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나는 사과나무에 오고나서야 겨우 4.16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다.
18년도 세월호참사 4주기때 명재쌤이 4.16때 거리에 걸어둘 현수막에 들어갈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처음엔 도대체 뭘 그려야 할지, 내가 그려도 되는지 막막했다. 5주기에도 6주기에도 그렸던 것 같다. 그 현수막이 시내에 걸렸을때, 내 작업을 보고 특별한 반응을 보인적이 별로 없던 엄마가 현수막이 걸린 곳을 일부러 지나갔다고 했다.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며 드디어 내가 아주 작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된거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서서 먼저 ‘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되진 못했다. 이번 4.16행사를 준비하는 주간은 다른 업무들도 조금 바쁜 한 주였다. 그김에 엄마에게 투덜 거렸다. 해야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고. 뭐도 해야되고 뭐도 해야되고, 4.16행사 준비도 해야된다고. 그랬더니 엄마가 한마디 했다. 그런거 할 수 있는게 다행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맞다.
나는 가능하면 일이 되어버리는 일들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려고 한다. 은근슬쩍 모른척도 한다. 그런데 다행이도 주변에서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가만뒀으면 내 생각에만 골똘한 인간이 되어있을건데 주변 사람들 덕분에 잘 묻어간다. 그게 정말로 다행스럽다. 슬픈 날이지만 그안에 기쁨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IyWigoyRAc
요즘 두개의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하나는 교회안에서, 다른 하나는 호두구판장 멤버들과. 대략 한달의 텀을 가지고 모임을 하는데 늘 책을 읽는 시점은 모임이 있는 주다. 허겁지겁 책을 읽는다. 더군다나 이번달은 두 모임의 시점이 같은 주간에 있다. 숙제를 쌓아놓고 매번 벼락치기로 위기를 모면하는 학생이 된 것 같다.
성인이 됐는데도 벼락치기가 여전하다는게 조금 당황스럽고, 왜 할일에 할일을 보태며 허둥거리는지 모르겠다. 독서모임의 시작엔 분명 내 흥미도 관여했겠지만 어느정도 타의로 시작했다는 생각도 든다. 타의로 시작했다는 것은 나를 어느정도 강제하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고 받아들여진다. 억지로 버겁게 무언가를 하고 싶었나? 싶으면 왜인지 분한 마음이 차오른다.
그럴때 내가 이것을 타의로 하는게 아니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라는 최면을 거는 방법은, 사실 그 일을 주도적으로 해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허둥지둥 다른 하고 싶은 일들을 미뤄둔채 책을 읽고, 발제문을 쓴다. 심지어 모임에 가서는 신나게 떠드는 것도 나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문득 억울해지는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늘 우선순위를 내어주는게 일상인데, 나 스스로가 아닌 다른이들과의 약속은 나 혼자와의 일보다 우선한다. 결국 내가 나와의 약속을 배신했기에, 다른 이들과의 약속을 핑계삼고 억울해한다. 이렇게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며. 나의 열심은 다른데 쓰기위해 아껴둔거라고. 엉뚱한데 열 올리고 있는 거라며.
결론은 늘 같다. 내가 하고싶은 일이던 하고싶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내기 위해선 더 열심히 해내야한다. 매번 실패하는 기분이 드는건 구체적이지 못해서 일까? 혼자의 고민이 드러나지 않아서일까? 창작의 영역에 있어서 고민은 나중에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혼자 품고 있는데. 난 품이 작아서 그게 자꾸 비집고 튀어나온다. 구려서 참을수가 없다. 언제까지 다른일들을 변명거리로 삼으며 억울해할까.
심지어 뭐 그렇게 열심히 산다고. 그치만 나 치고는 너무 열심히 사는거 같다. 방구석에서 쓸모없는 일들에 열중하는게 좋은데…..
작년에는 나 스스로에게 나를 증명하겠다며, 꾸준히 하는 것에 집착했었다. 나름의 결과물도 손에 쥐었고 그게 좋았다. 올해도 꾸준히 나를 증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습관이 되면 어렵지 않을거라고 조금씩 하나씩 해야할 것들을 더했다. 하지만 어느순간 부대끼기 시작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겹겹이 하려고 하는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중요했던 것들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작업이 하고 싶었더라, 왜 그림이 잘 그리고 싶었지, 얼만큼 그리면 잘 그리는거지? 무슨 글을 써야할까. 이걸 일주일에 한번씩 해내면 나한테 뭐가 돌아오지? 초반에 야심차게 작업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겠다더니, 작업도 글도 놔버렸다. (이모티콘 제안의 실패가 한차례 있었고, 그 이후엔 하다 만 작업들만이 남았다.) 그냥 흘러가듯 쓰는 일기가 아니고서야, 어떤 흐름이 있는 글을 쓰는건 너무 어렵다.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겠지 싶어서 15주간 글을 쓴 소감을 적는다. (땡땡이를 많이 쳤다.)
솔직히 홀가분하다! 언제나 마감이 있어야, 무언가를 해내는 힘이 생기지만. 나는 당분간 자유의지가 생길때까지 무언가를 다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마음가는 일이 생기기를 기다려야지.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내 글을 봤을까? 15주동안 너무도 허술한 글들을 흘려보낸것 같아 부끄럽다. 그래도 언니오빠들이 무슨생각하고 사는지 조금은 엿보아서 재밌었다. 그리고 누군가 호두와글을 지켜봐왔다면, 얘네들이 또 뭘 할지 아주 쬐끔이라도 궁금해 해주면 좋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른 재미있는 일로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아닐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