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 언니랑 남동생은 좀, 재미없는 애들이었다.
공부를 잘하는데다 열심히 했다. 친구들이랑 어울리느라 늦게까지 돌아다닌 적도 없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다며 취미 대잔치를 벌이는 일도 없었다.
물론 우리 삼남매는 제법 사이가 괜찮고,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퉁퉁거리면서 말하는 건, 쟤네들이 재미없는 탓에 내가 당치도 않은 누명을 써왔다는 거다.
"가혜는 끈기가 없어"
아, 내가 얼마나 듣기 싫어했던 말이던가..
그 근거란 이런것들인데
1. 야구게임을 하고 싶다. 사달라
- 몇 번 하고 쳐박아둔다
2. 청바지를 치마로 바꿔봐야겠다(리폼이 유행이었다). 가위로 자른다
- 앗 잘못 잘랐다. 버린다
3. 미술을 배우고 싶다. 학원에 보내달라
- 해봤으니 됐다. 그만둔다
4. 테디베어만들기 키트를 사달라
- 앗 또 잘못 잘랐다(수습불가). 더이상 만들수가 없어서 훌쩍이며 방치한다
★(메인)★5. 온 가족이 밀어주던(?) 피아노를 그만뒀다.
초등학교 때 언니따라 시작한 피아노였는데, 콩쿨에서 계속 좋은 성적이 나오자 가혜와 부모님과 선생님은 욕심을 내게 되고,
결국 예술중학교 입시로 이어지는데.....결론은 뭐, 그만뒀다.
이른아침부터 저녁까지, 10시간 넘도록 이어지는 연습도 지치고. 내 나이 열두살, 슬슬 어른들 말도 듣기 싫어지고.
아니 근데 정말 너무 했다. 다 있을 수 있는일 아니야? 아무튼, 열 몇 살 짜리 아이에겐 너무 가혹한 평가였다.
10대에서 20대 내내, 상을 받아도 좋은 성적이 나와도 '열심히는 하지 않으나 머리와 재주가 있는 애'라 그렇다는 소리만 듣고 살았다.
나름 성실하다고 자부하며 살았지만 집에선 끈기없는 애로 낙인 찍혔으니, 게다가 내 남매들의 성실함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으니...
천성이 성실한 사람과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차이일까?
어쩌면 성실하고자 아둥바둥했던 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평가에 대한 억울함,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일까봐 두려움, 사랑과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
어렸을 때의 낙인이 어떤 주문처럼 내내 나를 따라다녔던 것 같다.
그래서 꾸준하게, 묵묵히, 버티면서 살려고 노력했었는데, 여기서 그만두지 말아야지라는 주문을 쫓아왔었는데
몇 번의 버팀과 포기, 좋은 동료들, 함께 일하는 것들을 배우고 만나가면서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계속하는 힘 만큼이나 놓을 수 있는 힘도 되게 쎄고 멋진 힘이라는걸 알게됐다.
이렇게 장황하게 나의 어린시절과, 억울함을 털어놓은 이유는
호두구판장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어떻게 모든일을 끈질기게 해내나. 한두가지쯤 그만두면 어떤가. 다른 한 편에선 꾸준하게 저마다의 성실함으로 버티고 있는 일들이 있을텐데.
그리고
그때 그때 흐르는 물살 속에서 내 온 몸을 딛고 있게 해주는, 끝내는 발을 떼며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돌다리를 함께 놓고 있는 동료들이 있다.
그만두는 게 아니라 딛고 지나가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돌을 성실하게 놓고 있는 나와 내 동료들이 있다는걸 안다.
우연히(?) 보게 된 사주
말을 잘하는데
아픈 말을 잘하시네요.
글을 써보세요. 글을 쓰면 말을 좀 다스릴 수 있을 거예요
실은 진작부터 쓰고 싶었다.
혼자서 되뇌는 말들이 흩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리하여 쓰기 시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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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전해져야 할 이야기
지난봄부터 시작된,
문득문득 찾아오는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에
조금 겁이 났다.
그래도 이 마음만은 언젠가는 전해졌으면.
너무 고마운데 차마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적어둘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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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학원 다녀요
아파트 상가의 작은 피아노 학원에서는
근처 초등학교 친구들이 레슨을 마치고 돌아가는 저녁부터 성인반이 시작된다.
문을 열자마자 늘어선 슬리퍼와 노란 학원 가방, 동그란 모양의 작든 테이블을 지나
알록달록 시트지가 붙은 문을 열면
드디어 피아노와 마주치게 된다.
작년 여름, 갑자기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생기 없던 지난해를 이어 붙여 준,
어딘가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 시절을 보듬는
피아노 앞에서
즐기면서, 힘을 빼면서 뚱땅뚱땅 거리는 날들을 끄적일 예정.
얼마 전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
나이가 들수록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할 일들이 하나둘씩 생기는데, 이번엔 십자인대가 잘 있는지 보는 날이었다. 이식한 십자인대는 아주 잘 붙었고 재활도 잘 되었다며, 몇 달 있다 핀을 빼자고 했다.
작년에 땅따먹기(....)를 하다 끊어진 십자인대 때문에 처음으로 수술을 하고 장기입원이라는 걸 해봤다.
입원 며칠 전부터 남의 블로그를 염탐하며 입원기를 읽고 다이어리에 필요한 준비물 리스트를 적어두고, 다이소에 갔다가 이마트에 갔다가 배낭을 쌌다가 캐리어를 쌌다가 하며 만반의 준비를 다 마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쳐 못 챙긴 게 있었다.
"누가 데려다줘? 같이 갈 사람 있어?"
"나 혼자 입원해봤잖아. 정말 외로운 일이야. 내가 내일 데리러 갈게"
난생처음 해보는 입원 수속은 특별할 게 없는데도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그리 길지도 않았던 대기시간에도 초조함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어색하게 들어간 병실에서 환자복을 갈아입는 동안 소산이는 매점에 내려가 군것질거리와 간호사 선생님이 말한 찜질팩을 사 왔다.
하려면 충분히 혼자 할 수도 있는, 하지만 한없이 막막하고 고독했을 시간.
얼떨떨하고 낯설던 시간이 지나가고, 소산은 기념이 될 만한(?) 사진 몇 장을 찍어주고 떠났다.
돌이켜보면, 어쩌면 혼자 지나야 했을 순간들에 자주 산이가 곁에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왠지 수줍어서,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어 주저하던 때에 선선히 곁에 서준 덕에 많은 일들을 해냈었다. 혼자 괴로워하던 밤, 늦도록 주절주절 토로하는 말들을 끝없이 들어준 덕분에 혼자서 새까맣게 타버리지 않았었다.
나는 어땠지?
잘 모르겠다. 함께 해내는 많은 일들에 묻혀, 정작 그 고마운 친구의 낯빛을 살피지 못했던 적이 많다.
2000.
세상의 모든 무게가 나와 피아노가 있는 작은 방을 향하던 지독히도 고독했던 공간.
방만큼의 산소를 다 마시고 나면 늘 숨이 막혔었다.
아침에 좀 더 자고 싶은데, 오늘은 정말 치기 싫은데, god 육아일기 할 시간인데.......
참 신기하지. 얼마 전 칭찬을 받았던 곡인데, 몇 시간을 앉아 연습을 했는데도 더 나아지기는커녕 자꾸만 손이 꼬이고 만다. 숨이 막히는데 별 수 있나. 그만둬야지!
물론, 그 후로 한동안은 자기가 꿈을 잃은 것처럼 구는 엄마의 세상 실망스럽고 슬픈 표정을 견뎌야 했다. 어느 날은 베란다 창밖을 보니, 내가 죽지도 않았는데 내 장례를 치르고 있길래 창문을 열고 엉엉 울면서 소리를 지르다 깨어났다. 숨 막히는 시절이었다.
아니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고, 친구들이랑 더 놀고 싶을 수도 있고, 티브이를 보고 싶을 수도 있고 선생님이 속상하게 했을 수도 있고, 게다가 다른 꿈이 생겼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거 아닌가?
뭐 한창 그럴 나이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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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까닭 없이 떨리는 손과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면서 한 음이라도 빠트릴까 봐 또박또박 누른다.
늘 무서운 선생님들만 만나와서 그런가 피아노 선생님 앞에선 왜 자꾸 주눅이 들지..
"너~~무 잘했어요"
"선생님! 완~벽해요!!"
"진~~짜 잘하시는 거예요"
요즘 이 작은 방이 아니면 어디서 또 이런 과한 반응과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레슨 받는 45분 동안 계속되는 칭찬과 큰 리액션에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그런데 손가락이 자꾸만 춤을 추네.
하긴 뭐, 한창 칭찬받고 싶은 나이 아닌가.
작년 피아노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처음 친 곡은 슈베르트 즉흥곡 Op.90의 2번. 플랫이 세 개 달린 내림 마장조에 셋잇단 음표가 따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하며 쉼 없이 흐르는 곡이었다. 첫 곡이라는 부담감과 떨림으로 어깨에 힘 빡 주고 뚝딱이면서 쳤던 기억이 선하다. 그 다음은 흑건으로 불리는 쇼팽 에튀드 Op.10-5, 워낙 유명한 곡이라 귀에 익숙한 음악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만족스럽지 않아 스트레스를 꽤나 받았었다. 그 다음엔 드뷔시, 거쉰, 그리그... 도입부 정도는 한 번씩 들어본 음악들이었다.
가장 신나서 쳤던 곡은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이다. 다음 곡으로 넘어갈 때 까지 만족을 몰랐던 곡이지만, 그만큼 재미있었고 계속 계속 뭔가를 더하고 싶었다. "구름 속에서 걷듯이" 쳐보라는 말에 정말 눈을 감고 허공에 발 딛듯 손가락을 누른다. 볕 좋은 날, 공원에 나가 연못에 그려지는 물결을 따라 가듯, 머리 위로 살랑 부는 바람을 타듯. 빠르게 흐르는 속에서도 숨이 쉬어진다. 대부분의 곡들은 그렇지 못하다. 숨쉬지 못하고 연주하는 것이 요즘의 가장 큰 고민! 쇼팽의 흑건과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 가단조는 힘들었다. 물론 가장 큰 것은 내 실력 탓 이지만 나는 유독 세게 때려 누르며(?) 휘몰아치는 곡은 더욱 힘들다.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XtKwzLU33kU
매주 목요일에 왕복 두 시간인 내포 까지 출근했다 집에 돌아와 잠깐 쉬고 8시 반에 레슨을 받으러 가는데, 30분 정도 피아노를 치다 보면 거의 에너지가 바닥이 난다.
“자 그럼 아까 제가 얘기한 부분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만 더 쳐보고 끝낼까요?”
마지막 한 번은 정말 정신력으로 치는 거다...
진이 다 빠지고 하는 연주는 안 그래도 기계적인 내 연주를 더 퍽퍽하게 만든다. 음표가 저기 저렇게 있으니 그냥 누르는 것 뿐... 악보 보는 것은 스스로도 자신이 있고, 나름 꾸준하게 연습도 해 가는 편이라 악보를 따라 정확하게 음을 누르는 수준의 연주는 그럭저럭 하는데, 내가 듣기에도 너무 무매력으로 연주를 하고 앉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거기다 나는 은근 기계적이고 강박적인 사람.... 요즘은 치다 치다 “선생님 저 지금 너무 구차하게 연주하는 것 같아요....”라고 하소연하곤, 무슨뜻인지 알아들은 선생님과 박장대소 하곤 한다.
여기에서 왜 이 음을 썼을까? 여기엔 왜 이런 표현이 있지? 이 다음 장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려면 어떤 느낌으로 마무리해야 하지? 단지 건반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곡을 이해하고, 그 흐름에 따라 연주해 가는 것, 흐름을 따라가는 연주에 나의 감정도 불어 넣는 것......! 하고싶다... 그런데 막상 피아노 앞에 앉으면 다만 틀리지 않으려고 기계적으로, 필사적이고 구차하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양새가 꼭 나의 다른 일상들과도 닮아있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피아노도 일도, 내게는 너무 재미있고 좋아하는 것들이고 나름은 즐기면서 하는 것들인데, 몸에 밴 듯 묘하게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이 모습은 대체 뭐지..!
어렸을 적, 가난하고 투박하고 서툴렀던 젊은 엄마는 우릴 데리고 열심히 서점이며 책방이며를 돌아다녔다. 평생 자기는 책 한자 안 읽었으면서...
의정부 역사 2층, 아직도 기억나는 냄새와 조명, 어린이 책 코너와 책을 사던 날의 대화들.
종종 퇴근하는 아빠를 마중하러 엄마랑 언니랑 의정부역엘 갔다. 셋이 나란히 서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아빠가 그곳까지 우릴 찾아오면 다 같이 집에 걸어 돌아가곤 했던 핸드폰 없던 시절.
어쩌다 한 달에 한 번 쯤, 늘 읽기만 하고 다시 꽂아두고 오던 책을 사는 날이 있었다.
언니와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날.
마음 속 담아뒀던 최고의 책이나, 언니와 신문 광고에서 보고 오려둔 최신의 책(게임북..)들을 손에 넣고, 또 오는 길엔 통닭도 한 마리 사던 기분 좋은 날.
아마도 아빠의 월급 날..!
아직 유치원에 가기 전인 내 손을 잡고 예쁘게 자르고 남은 오뎅 자투리를 사러 오뎅 공장엘 가고 껍질에 금이 간 계란 파치를 사러 양계장엘 가고 그리고 저녁이면 의정부역 서점엘 가던,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는 어떤 생각들로 하루하루를 버텼을까?
늘 아픈 말을 골라서 하는 내게 혹시라도 몇 안 되는 좋은 점들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엄마 손을 잡고 의정부역까지 걸어가며 들은 아기새와 가을 낙엽 이야기, 집에서 직접 만들어 주던 빵, 사실은 농사꾼 같은 엄마 모습을 친구들이 볼까 부끄러워 빙 돌아가곤 했던 동네 한복판 엄마의 텃밭, 온 서점을 도서관 삼아 읽던 책, 책을 손에 넣던 날의 행복,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가난하고 투박하고 서툴렀던 젊은 엄마가 내 마음에 뿌려놓은 씨앗 속에서 싹텄겠지
선생님한테 얘기해서 연속 두 곡을 재즈곡으로 진도를 나갔다. 뻔뻔하고 능글거리는 것도 연습으로 가능하다면, 대놓고 그런 곡들만 쳐서 뻔뻔함과 능글거림을 몸에 익혀보아야지 하고.
얼마 전에 우리 단체 총회가 끝났다. 일을 한 지 10년 정도 되었으니, 그동안 치룬 총회도 열 개 쯤은 되려나. 2, 3월에 시민단체 상근자들을 만나면 서로 할 말이 총회밖에 없다. 언제 하는지,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로 시작해서 힘들어 죽겠다, 그러게 얼굴이 안 되어 보인다, 하루 빨리 해치우고 잠깐이라도 푹 쉬자로 끝나는 대화. 적당히 맞장구를 치지만 사실 총회가 별스럽지 않아진지는 오래됐다. 유독 운이 좋아 편한 단체들만 거쳐 온 건지, 내가 일을 대충 하는 건지. 아무튼, 올해는 어느 해 보다도 느긋하고 평온한 총회의 날을 보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처음 동네에서 일을 시작 했을 때, 이 바닥에 흔치 않게 제 발로 찾아온 ‘청년’ 중 한명이었던 나는 별거 아닌 일에도 온갖 칭찬을 들어야했다. 젊은이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버무려진 칭찬들. 아이디어가 너무 좋다, 통통 튄다, 반짝반짝 빛난다 같은. 좋았다. 좋았는데, 굳이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모습으로 칭찬을 받으려니 머쓱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다.
막막함은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나는 계속해서, 그리고 여전히 아이디어가 넘치고 통통 튀고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무엇이든 꾸준하게 잘 해 낼 자신은 있었다. 다행히 이런저런 것들이 잘 맞아서, 손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부침 없이 경력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대여섯번의 총회를 치루고, 몇 개의 지원 사업을 말아먹기도 하고 꾸역꾸역 처리하기도 하고, 가끔은 원치 않는 일을 맡아 괴로워하기도 하면서, 종종거리는 일 없이 느긋하게 총회를 준비할 수 있게 되는 동안 막막함은 점점 뚜렷한 형체가 되어갔다.
“너 요즘은 예전 같지가 않네”, “너도 좀 치고 나가봐”, “더 잘 할 수 있는데 아까워서 그러지”
꾸준하게 쌓아올리고 있는 것들이 하찮게 느껴질 때, 나에게는 없어서 함께하는 것이 더 소중하고 고마운 친구의 장점을 들고 와 굳이 비교할 때, 괴로웠다.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며
두 곡의 재즈를 끝내고 다시 쇼팽으로 돌아갔다. 뻔뻔과 능글은 개뿔. 자유로운 악보 속에서 리듬을 잡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파닥대다 끝났다.
새로 시작한 곡은 쇼팽의 'Etude Op.25 No.11‘ 에뛰드는 연습곡이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유려하게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도록 단련하기 위한 곡. 오른손은 계속해서 몰아쳐야 하니 손가락도 빨라야 하고, 긴긴 시간을 버틸 지구력도 있어야 하고, 특별히 튀는 음 없이 쭉- 이어치면서 옥타브들을 넘나들어야 하니 유연하게, 또 그러면서 왼손은 묵직하게 전체적인 음악을 끌고 가야 한다. 보통은 처음 악보를 볼 때 어설프게라도 완곡을 연주해보라고 하는데, 이번엔 여섯마디씩 끊어 치고 있다. 힘들고 지루하겠지만 이 곡을 다 치고 나면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고. 구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뻔뻔과 능글. 어쩌면 나는 타고나지 못 한건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막막하거나 괴롭지는 않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런 이야기들로 막막하거나 괴로워지지는 않는다. 내가 굳이 통통 튀거나 빛나거나, 치고나갈 필요가 없는 것도 안다. 뭐 더 이상 그런 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나는 그냥, 묵묵히 몸에 익힌 여유로운 분주함이 관성이 되지 않게 작은 변주들을 계속해 나가야지.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 이여
김수영 / 봄밤
출퇴근길 논밭두렁에서 연기가 폴폴 난다.
아침 일찍 삽교쯤 지나는 길엔 머릿수건 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밭에 매달려 있고, 올해는 서해 봄 꽃게가 대풍이라는 기사를 봤다.
지난주에 아버지가 장고항에서 실치회를 잔뜩 사다 남매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다. 봄이다!
봄이 오니까 괜히 나도 농사꾼 마냥 바빠진다.
충남지역 강제동원 노동자 상 설립 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충남에서 이름이 확인된 사람만 9,823명. 이름도 없이 사라진 사람은 얼마나 되려나.
걱정했는데 브리핑실에 기자들도 북적였고, 출범식 자리도 꽉 찼다.
아,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국제노동기구(ILO) 강제노동 철폐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단다.
그날 저녁엔 문정현 신부님과 봄바람 순례단이 오고, 페미니스트 박소선이 발언을 한다길래 쫓아 나갔다가 야우리 앞에서 다 같이 빙글빙글 돌면서 노래를 불렀다.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정부는 FTA보다 더 센 메가 FTA인 CPTPP에 가입하고 싶어 한단다. 다들 문을 열고 장벽을 낮추고 세계가 이웃인 것처럼 자유롭게 오고 간다는데, 왜 농민들이 디딘 땅은 자꾸만 좁아지지. 근데 농민회는 요즘 누가 남아서 싸우려나
"오늘의 세월호는 어디지?" 금요일 낮, 시내와 다음 주 세월호 천안 기억 주간 행사를 준비하면서. 그 꼴을 겪고도 도처에 세월호가 널려있다.
JTBC에서 이준석과 전장연 활동가가 장애인 이동권을 놓고 토론을 한단다. 내가 지금 뭘 본건가.
금요일 저녁부터는 다음 주에 나갈 지속 가능한 공익활동지수 어쩌고에 보낼 발표자료 때문에 끙끙댔다. 그냥 공익활동 지속가능지수가 아니라 활동가들이 일하는 모습 속에서 지속가능을 묻는 연구라 조금은 반가웠다. 조직문화/활동 만족도/재충전/건강/활동가 정체성... 이 지표들에 점수를 매기고 또 가중치를 준다. 그렇게 산출된 2021년 공익활동가 지속가능성 지수는 64점. 생각보다 높아서 놀랐다. 하긴 나도 지속하고 있구나.
지속가능이라는 말,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그런데 나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말하려니 잘 모르겠다. 우리가 즐겨 얘기하는 산은, 강은, 바다는, 지구는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지속 가능하기를 바랄까? 이렇게 된 이상 멸망으로 간다 하고 있진 않을까?
농사꾼 마냥 바쁘게 뛰어다니는데 내가 뭘 심고 있긴 하는 건가.
얼마 후 문득 피어난 새싹 하나, 그러다 가을엔 열매 하나쯤은 볼 수 있으려나.
"꽃이 필 것이라는,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기대 없이 어떻게 나는 계속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아침부터 사무실이 술렁이는 날이었다. 다들 휴대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상황을 확인했고 가끔 누군가 새로 올라오는 뉴스 소식을 전했던 것도 같다. 그때 난 동네 선배의 선거캠프에 대놓고 뛰어든 것도 아닌, 그렇다고 아닌 것도 아닌 상태로, 스리슬쩍 발 담그게 된 것에 골이 난 채로, 그런데 도움은 되고 싶은 아리송한 마음인 채로 사무실 한구석에 앉아있었다. 2014년 4월 16일. 모 당의 천안시장 후보 경선이 진행 중이었다.
집에서 나설 즈음부터 아침속보로 저 아래 어딘가에서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걱정스럽지만 무감한 채로 출근을 했고, 경선 진행상황에 초집중인 사무실 속에서 역시나 무감한 채로 메일함을 열고, 포털에 들어가 뉴스를 봤다. 배가 많이 기울었다. 선장이 구조됐다. 탈출과 구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전원 구조됐다고 했다.
오후 내내 술렁이는 사무실에서 바다위로 헬기가 떠다니는 뉴스만 봤다. 아직 고등학생인 막둥이 남동생이 기숙사에 있었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속절없이 모니터만 보고, 순한 내 동생 얼굴만 떠올라서 계속 손이 떨렸다.
경선결과 언제 나왔지. 아무튼 우리 후보는 떨어졌다. 다 같이 서해에 갔다. 제철음식 좋아하는 선배는 쭈꾸미 샤브샤브를 먹고 진탕 취해서 바닷가에 드러누워 노래도 부르고 소리도 질렀다. 우냐...... 그 꼴이 너무 웃긴데, 누구도 마음껏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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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416 행사를 준비하거나 진행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날의 기억들을 공유해달라는 주문은 많이 했으면서 정작 나는 오늘이 처음. 이렇게나 생생한 기억이구나.
2주기 때는 북콘서트를 준비하다가 마음이 아파서 한 달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울기만 했다. 끙끙 앓고 난 후로는 한동안 조금 비켜나 있었다. 그러다 5,6주기 쯤 해서는 민망했다. 괜히 화도 나고. 매일 기억만 외치는 것 같아서 면구스러웠다.
올해는 봄볕 쬐는 원성천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많이 슬프거나 아프지도 않고 민망하지도 않은 기분으로 웃고 노래도 따라 불렀다.
“슬픈 날은 슬픈 날대로 기쁜 날은 기쁜 날대로” 기가 막히는 네이밍이다. 사과나무 천재 만재
처음 나의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번 건 언제였나
친구들이랑 엘리베이터 없는 5층 빌라에 한장에 50원짜리 치킨집 전단지를 붙였던가
필요가 생길 때 부모님께 타 쓰거나, 사달라고 해본적은 있지만 한달에 얼마씩 주어지는 '용돈'은 받아본 기억이 없다. 용돈이 당연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삼남매 중 나에게만 해당됐던 이 특별함(?)은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부모에게도 유독 손이 덜 가는 녀석이 있겠거니 할 뿐.
수능이 끝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알바를 구하는 것. 마침 천안에 처음 상륙한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알바생을 대거 채용하고 있었다. 당시 3,100원이던 최저시급에서 무려 200원이나 더 쳐주는 그곳은 충성을 바쳐 일하기 좋은 곳이었다. 머슴도 부잣집 머슴을 하라고 했지..
직원은 40프로 할인된 가격에 매장을 이용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5시간을 일해야 먹을수 있는 음식들을 3시간 임금으로 먹을 수 있다니..! 돌이켜보니 그렇게 나의 월급 중 많은 돈이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손님이 많아 한순간도 앉지 못하는 날은 최대치의 연장 근무를 찍었다. 최저임금 따윈 개나 줘버리고 초과근무 수당은 알지도 못하던 시대에 얼마나 행복한 노동이었는지. 한가한 날은 조기퇴근도 시켜주던 참 좋은 곳이었는데.... 아, 이제는 우리는 그것을 '꺽기'라고 부른다(안돼요)
입학과 함께 시작한 청주 생활. 낯선 곳에 적응 한 후 할 일은 다시 알바를 구하는 것. 시급이 안 적혀 있길래 일단 면접을 보러 간 편의점에서는 2,500원을 준다고 했다. 최저임금이 3,480원으로 올랐는데, 너무 적다고 했더니 이 동네는 일 할 학생이 널렸다나. 그래도 천원이나 후려치다니 (당신 정말 양아치....) 3,480원을 주는 곳은 끝내 찾을 수 없어 겨우 3천원대의 자리를 찾아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대 초반을 먹여살린 편의점, 빵집, 막걸리집, 학원강사, 과외, 영화관, 약국... 마음 속에 수없이 잡혀가던 구김살 만큼은 생활이 피었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잔뜩 구겨지며 사는 동안 엄마도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갈 즈음 폭삭 주저앉아버린 집안 때문에 졸지에 가장이 된 엄마에게 가사노동에 임금노동이 더해졌다. 옛날에 부업이나 좀 했었지 밖에 나가 돈을 번 일이 없던 엄마에게는 일터도, 집도 얼마나 커다란 막막함이었을까. 일 경험이 없는 중년의 여성인 엄마는 비슷한 사정의 다른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여사님'이라 불리우며, 더 큰 건물과 일터를 전전하며, 집에서 하던 일들을 밖에서도 하며 돈을 벌어야했다. 그사이 나는 졸업을 하고 첫 단체에서 120만원을 받으며 일을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이니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도 월급은 그대로 였는데, 퇴사를 앞둔 어느 날, 회의에서 내 자리를 채우기 위한 채용공고 얘기가 나왔다. 그래도 150은 줘야 사람이 오지 않겠냐고 했다. 정말 난 월급 같은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는데, 아팠다(언젠간 말할거야...)
엄마는 가끔 쭈뼛거리며, 망설이며 전화를 할 때가 있었다. 이해 안되는 월급을 받았을 때, 용역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갈아치우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 때, 다른 일터의 사람들은 다 따로 받는 식대를 엄마와 동료들은 못 받아왔다는걸 알게 됐을 때, 자기 일이 아닌 업무를 요구 당할 때, 일하다 다치고 들어와 산재처리가 안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던 때, 그리고 당일 아침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노동이며 인권이며 떠들고는 있지만, 실은 나와도 가깝지 않았던 규정들을 보고 싸우고 오라며 대본도 써주고, 옆에서 통화 녹음도 하고, 문자도 보내고, 때론 대신 싸우기도 했다. 엄마는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할 때면 우리 딸이 뭐하는지 아냐며 되려 큰소리를 치곤 한다고 했다(엄마 제발...)
적정선의 임금 체계라는 것을 갖춘 일터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학자금을 다 갚고 적금도 붓기 시작했다. 임금의 최저선이 조금 가파르게 올랐던 해, 후리지아 두 단을 사 집에 들어가는 길에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린 기억이 선하다.
운이 좋았다. 엄마와 내가 일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더한 꼴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아침에 집을 나섰다 저녁에 온전한 몸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삶이 최저선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배부른 소리처럼 느껴져 민망하다.
최저선 조차도 닿을 수 없는 사람들. 보이지 않고, 보여서도 안되는 사람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다른 세계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 별안간 일터가 사라진 사람들. 일 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 '일'이 오늘과 내일을 가르는 삶 속에서 치욕을 견디는 사람들. 엉덩이 한 쪽 붙일 데 없는 일터와, 비닐로 둘러쳐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돌아가지도 못한 사람들.. '운'에 기대어 살기에는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는 너무 약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손 본단다. 최저입금을 업종별로 탄력성있게 적용한단다. 원하는 사람은 더 긴 시간 노동할 수 있도록 한단다. 벌써 발밑이 요동친다. 최저선이 일렁이고, 그 아래는 더 아득하다.
오월엔 꼭 광주에 가려고 한다.
광주에 가면
철이네 친구들도
"먼데 까지 뭘라고 또 왔대"
"오월이라 겸사겸사 왔어요"
철이네 선배도
"요새 젊은 사람들도 잘 아요?"
"더 잘 알아요"
전일빌딩 경비아저씨도
"어서 왔대요"
"천안이요"
하면 "참말로 고맙소"한다.
뭐가 그렇게 고마운지, 자꾸만 고맙다고 한다.
언젠가 어떤 정치인이 망월동에 갔다가 후문 담장을 뜯어내고 도망치듯 광주를 떠난 날, 태극기 앞세운 사람들이 추모행사에 맞불을 놓겠다고 몰려왔던 날이 있다.
저놈들을 무사히 돌려보내다니 광주사람들 참 대인배라고 하자 철이는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라고 했었다. 조심하는거라고 했다.
오랜 세월을 편견 속에서, 침묵을 품으면서, 치욕을 견디면서 살아온 서럽고 늠름한 모습이 어째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걸까
왜 그런일을 겪었으니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도지사를 그딴 놈을 뽑는다며 제주도 사람들을 욕하고, 또 어떨땐 광주가 어떻게 그럴수 있냐며 광주 사람들을 탓하던 마음이 민망하다.
생각하면 오히려 미안한 마음인데, 하여간 광주사람들은 자꾸만 알아줘서, 찾아줘서 고맙다고 한다.
“광주 시민들이 ‘폭도’라는 말에 그토록 격분한 것은 바로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싸운 존엄한 인간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체 차원의 투쟁의 동기는 생명의 보호였다. 광주 시민들의 공동체는 삶과 죽음을 공동체 차원에서 정의했고 광주 시민들은 서로가 모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젊은이들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연약한 아녀자들을 지키고, 어린아이들을 지키고, 광주 땅과 그 땅의 모든 생명을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이 공포와 분노와 해방감에서 이루어졌다면 생명을 보호하고 고향을 지키는 투쟁은 냉철한 결의에서 일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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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결코 미친 사람들, 싸움에 중독된 그런 비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적들이 진실을 영원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모든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생매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명정한 정신으로 그 자리에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투쟁의 진실을 깊은 땅 속으로 감추어 자신들의 몸과 함께 언젠가는 우리 앞에 진실로서 부활할 수 있도록 화석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호두북클럽의 5월 모임책, 《오월의 사회과학》
어쩌다보니 6월..... 그다지 결산할게 없는 평-범-한 시간이었지만, 서른다섯짤의 상반기 결산
1. 천성이 운명이에요
올 초엔 어쩌다 점(?)을 보게 됐다. 제대로 뭘 본 적도 없으면서 사주 사주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사람... 바로 나...!
우리는 가끔 이해되지 않는 현상을 접할 때 신비한 무언가를 찾지 않나, 예언이니 음모니 우주선이니 따위의 것들....
마찬가지로 도저히 알 수 없는 내 인생이나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내 성격 같은 것들을 설명하거나 받아들이게 하는 데 사주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
아무튼, 무지 유명한 선생님이 있는데, 3인 이상 팀을 짜야지만 출장을 나오시는 용한 분이라나.... 신년 운세는 음력으로 새해가 오기 전에 봐야 한다나.....
1월의 어느 날, 그렇게 나도 모르게 스르륵 3인 중 1인이 되어 반포 터미널 앞 투썸 플레이스에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사주가 아니라 점을 보시는 분이었고, 이름과 생년월일을 듣자마자 혼자 중얼중얼 거리더니 갑자기, 마치 시를 읊듯 나에 대해 읊기 시작했다. 그렇게 들은 이야기들은 1도 새롭거나 놀랍지 않았고, 뭐 대단한 개시 같은 것도 없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흘러온 대로, 흘러가는 대로 일 것만 같았다.
그래도 뽕은 뽑아야겠다는 생각에 인생 잘 풀리려면 뭘 해야 하냐고 묻자 선생님께서 이르시길,
"먹는 거 혼자 먹을 수 있어요? 옆에서 힘든데 남 일 보듯 하며 살 수 있어요? 천성이 운명이에요. ("아니 그럼 이런 걸 왜 봐요?") 천성을 직시하라는 거에요. 내가 가진 걸 갖고 나 답게 살라는 말이에요"
이게 무슨 힐링 계열의 자기 개발서, 인생멘토 같은 말씀이시죠.. 그치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몇만원을 주고 이미 알고 있던 걸 확인한 날, 특별할 건 없었지만 나대로 잘 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조금 안도감이 들었던가.
2. 붉고 다정한 눈
작년 겨울부터 새 직장으로 출근을 시작하면서 정식으로 운전이라는 것을 해보게 되었다. '천성'이 쫄보인 사람에게 운전은 너무나도 무서운 일..
차선을 변경하는 일은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대체 언제 끼어들어야 하나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고 타이밍을 잡느라 속도를 늦추면 내 뒤로 줄줄이 민폐를 끼치게 된다.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는 것도 무서운 일이다. 좌측이나 맞은편의 차들이 신호를 받아 내가 진입하려는 방향으로 밀려오면 쉽사리 끼어들지도 못하고, 또다시 내 뒤에서 우회전을 기다리는 차들을 가로막게 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모든 차들이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다, 괜히 혼나는 것 같아. 아, 도로에 차들이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렇게 막막한 기분이 들다가도 조금 지나면 신기하게 어느새 도로에 녹아들어있는 느낌, 도로 위 수많은 평범한 차들 중 하나가 된 기분이 되곤 한다. 방향지시등을 켜면 속도를 늦춰주는 것, 신호가 없는 교차지점에서는 직진차가 우선인 것 등등. 이 당연한 것이 새삼스럽다. 다른 차가 운전을 잘 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차를 굴릴수가 없을 것 같다. 어떻게 서로를 믿고 이렇게 할 수 있지? 어 그러고 보니 나도 신뢰 받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이 도로 공동체의 일원이군! 하는 조금 바보스러운 생각도 하면서.
사실 가장 고역은 오히려 차가 한 대도 없는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일이었다. 낯선 길, 낯선 차, 낯선 운전. 가뜩이나 좁은 시야 끝에 어떤 길이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아 함부로 엑셀을 밟을 수가 없다. 어쩐지 고독한 기분으로 주행하다가 마주 오는 차를 지나치거나, 앞선 차를 발견하면 붐비는 도로 위에선 그렇게 불편하던 다른 차라는 존재가 눈물 나게 반갑고 고맙다. 앞서가는 차의 붉고 다정한 눈. 그 눈에 눈을 맞추며 앞으로 나가다 보면 어느새 밝은 길로 나와있다. 이게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차들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친다.
3. 원래 그랬다
우스개소리로 성수기가 시작됐다고 한다. 선거철이기도 하고, 여하튼 부쩍 기자회견이 늘어난 느낌이다. 사실 별다를게 있나 싶기도 하다. 일하다 사람이 죽어도, 여기 좀 봐달라고 사람이 굶어도, 울부짖으며 사지가 들려나가도 눈 깜짝하지 않는 세상, 정권이 바뀌어서 갑자기 시작된게 아니지 않나. 원래 그랬다. 그래도 걱정스러운건, 세상이 망가지는 속도가 더 빨라질까봐.
지난주에 몇 개의 단식 농성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진 게 아니라고, 더 잘 싸워야 되니까 내일을 위해 물러선거라고 말을 하지만 속상하다. 단지 원하던 결과를 보지 못 해서가 아니라, 절박한 사람들의 아우성이 철저히 무시당한 것 같아서 분하다.
4. 와글와글 호두와,글
이번이 아마 열다섯번째 호두와글. 개근을 하지 못했다. 한 주에 한 편 쯤은 뭐라도 끄적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을 하고 사는 일도, 생각을 풀어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땐 피아노 일기, 고마웠던 이야기를 써야지 했었다. 한 다섯번 쯤 쓴 후로 그때그때 생각나는 일들을 쓰는 것으로 바뀌어버렸지만. 지금까지 쓴 글들을 보니 은근 가족 이야기와 일 이야기가 많다. 일 다운 일 이야기는 없지만, 일상도 관심사도 온통 일과 떨어질 수 없으니.. 노동절도, 세월호도, 5.18도 다 일 이야기가 아닌데 나는 꼭 일 이야기를 쓴 것만 같다.
얼마 전 소산은 사람을 계속 보다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대충 보인다고 했다. 나는 어떤 것 같냐고 하니 "응, 넌 일을 아주 잘 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어"라고 했었지. 맞아, 나는 정말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이야. 일을 잘하고 싶고,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마감이 임박해 나오는 대로 써낸 호두와글 속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알아볼 수 있는 내 모습이 담겨있다.
보통은 늦은 밤에 글을 쓰고, 나는 밤엔 대체로 기분이 가라앉아 있으니, 그런 상태에서 쓴 글은 무거울 것 같았다. 게다가 일이나 사회적인 주제가 조금이라도 묻어있는 글을 쓰다 보면 너무 징징 대는 건 아닐까, 불평하는 글만 나오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다. 나는 일을 좋아하는 만큼 일 때문에 마음이 아픈 날도 많으니까. 모아놓고 보니 밍숭맹숭 별거 없는 글들이다. 쓴지 좀 지난 글들을 다시 보면, 내가 나를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느낌이다. 밍숭맹숭하다.
매주 친구들의 글을 엿보는건 즐거운 일이다. 꽤 오래 알고 지냈는데,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기분이다. 귀엽고 웃기다. 가끔은 미안해질 때도 있고,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 말로 오고가지 못하는 것들이 오고가는 느낌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와 조각들을 많이 주워 모아둔 것 같아서 좋다.
자주 실패하면서도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분투하는 친구들이 고맙게도 곁에 있다. 감히 나는, 이 친구들을 내 자랑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이쯤 하고 싶은데, 상반기 결산을 어떻게 끝내야 하지.....
예로부터 마무리는 급 희망과 다짐의 메세지 아니던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