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잠깐 담배를 피러 옥상에 올라갔는데 바람이 씨게 불어서 우산이 3번이나 뒤집어졌다, 다음 날 회의를 급히 취소했다. 120 와인을 마셨는데, 이건 첫잔만 딱 좋은 술이다. 둘째잔, 셋째잔의 맛이 점점 달라져서 결국 한 병을 다 못 먹어버리는데, 대신 다음 날 남은 술을 홀짝이는 또 다른 맛이 좋다. 집 앞에 우리 생활비의 5%를 써버리는 동네 편의점에 있는데 이제는 술을 주문해서 먹는다. 나는 철마다 좋아하는 맥주가 바뀌는 사람이라 좋아하는 맥주들을 발주해 달라고 부탁하고, 와인도 주문하고.. 이제는 편의점 프로모션이 있을 땐 먼저 제안해주시는 편. 단골이 되는 건 즐거운 일이야.
일기를 쓰면서 태풍이 지나가고를 틀어놓고, 알게 된 BGM을 듣다가, 김여명을 듣다 강아솔을 듣다 곽진언을 듣다가. 니나랑 바깥에 바람을 구경하다가. 비오는 날엔 뭔가 있는 것처럼 습습한 기분이었는데 책장에 꽂힌 좋은 시집을 우연히(?) 읽고 단숨에 환기가 되었다. 어디서 어떻게 샀는지 기억이 안나는(그래서 책방 도장 받아야해ㅠㅠ)곽은영의 시집 <관목들>.
시집은 보통 아무데나 펼쳐놓고 좋아하는 부분이 나올 때까지 읽는 편인데, 이 시집은 통째로 모리스 호텔에 관한 시다. 평론에는 이 시집의 장르는 모리스 호텔에 초대장이라고 적혀있다. 아마도 없을 것이 분명한 먼지 쌓인 모리스 호텔, 장기투숙객의 침대 삐걱거리는 소리를 기다리는 모리스 호텔, 사람을 버리고도 가는 보리스 호텔, 비가 멈추지 않는 모리스 호텔, 유럽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들기름 국수를 해먹는 모리스 호텔, 낡고 구식인 모리스 호텔이 무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시를 이렇게도 쓰는구나. 사랑하는, 아픈 것들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 때려넣고 온통 그리움 대해 오래 말하는 시를 쓸 수도 있구나. 이 시집은 선물이 되겠다. 누구에게 가려나?
까무룩 잠들고, 어제의 회의를 취소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아침에 맑게 개인 하늘........
어차피 저녁에 서울에서 머리를 할 일정이어서 오전에 간단하게 일을 하고 급하게 서울행. 왠지 종로에 가고 싶어져, 요새 나의 우물인 호철에게 좋아하는 공간을 물어보니 세운상가에 있는 몇 가게를 추천해주었다. 안성에서 대중교통으로 서울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버스인데 경부터미널에서 띤띤익스프레스를 발견해서 진짜 다행이야. 콜바넴을 보며 333과 반미를 먹고. 종로3가역에서 나오자마자 플라타너스의 꼬질한 냄새가 너무 좋았지.
세운상가 5층에서 보는 북한산과 종묘가 좋다길래 냉큼가서 구경했다. 앞에 작게 보이는 초록산은 북악산, 멀리 보이는 바위산은 북한산이라고. 언젠간 서울산 전문가들과 북한산에 오르고 싶다. 관악산도 가고 싶고 사랑하는 낙산공원도 가고싶어~~ 마침 호철은 북악산에 있다하고 서로 보이지 않지만 안뇽안뇽하며 인사를 나눴다. 마치 만난 것 같은 반가운 기분.
세운상가에 오면 디디의 우산이 생각난다. 몽골에 황정은 단편집을 들고 갔는데 단 한편밖에 읽지 못했지.... 몽골의 유일한 단점은 책을 잘 읽을 수 없다는 거(?). 여하튼 금지옥엽이라는 영화 굿즈샵에 갔는데, 사장님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 포스팅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 관련된 굿즈가 있냐고 묻는데 아직 없단다. 조만간 또 와야할 삘... 여튼 책을 살펴보다가 퍼스트카우 감독 인터뷰가 담긴 잡지와 자기만의 방에서 나온 <배우의 방> 인터뷰집을 사서 호랭카페로.
호랭의 아메리카노는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배우의 방 책을 뜯자마자 딱 필요한 페이퍼가 나와서 소오름이 돋았다. 인터뷰하는 사업을 하나 더 맡게 되서 컨셉에 대한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고스란히 실현한 것을 보았던 것..! 내가 생각하던 무언가를 누군가가 이미 시작했고 야금야금 따라가는 기분, 너무 멋지다! 덕분에 생각가지들을 정리하고 길음역으로 머리하러.
미용실에 가면 거울을 너무 오래 정면으로 보게 되는 것이 괴롭다. 머리를 3번이나 감았는데 감겨주시는 분들의 손길이 다 다르고 한 때는 너무 좋아 신음을 낼 뻔했는데 겨우 참았네. 오랜만에 차분하고 정돈된 짧은 머리 커트가 썩 맘에 든다. 여튼 기르기에 좋은 머리! 제발 건드리지 말고 잘 지내보자!
집에 오는 길엔 서울 나들이 사진을 올릴까 하다가 또 못 참고 몽골의 도시 사진들을 업로드. 생각지도 않았던 짧은 시내 구경이 너무 좋아서 나중에 또 몽골에 가게되면 넉넉히 이틀정도는 구경해보고 싶다. 못가본 아이리쉬 펍도 가고 비건식당도 가고, 못가서 제일 아쉬운 도서관도 가야지.
집에 와서 씻고 나니 머리가 약간 너무 사정없이 멋있어서 부담스럽네. 오늘의 술은 그렌피딕 하이볼. 웅이는 다른 건 몰라도 내 술상을 차려주는 센스가 완벽하다. 들어가는 길에 하이볼 먹고 싶어~ 라고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컵을 고르게 한 후 얼음을 잔뜩 담아두고, 진저에일을 차갑게 식혀둔다. 와인이나 양주를 먹을 땐 올리브나 초콜릿 같은 안주를 담아주고 맥주 먹을 땐 먹태를 에어프라이기에 돌리고 소스를 만들어서 방에 배달해준다. 이러니 내가 술을 어떻게 끊어......
그나저나 내일부터는 정말 본격 야근모드일지도 몰라. 그치만 낼은 꼭 나가서 조금 뛰어야겠다. 강변 문이 열리려나. 잠깐 본 강의 수위가 최고로 높다. 넘실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