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씨는 정말정말 매일이 선물같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단 말이지.
기후위기충남행동에서 기차 한 칸을 빌렸다길래 평택에서 조용히 탑승하고 싶었으나 밖에서부터 칙칙폭폭 요란스러운 등장.. 멋지다! 입석표를 끊고 편하게 앉아갔다.
가는 길엔 시내가 선물해준 이중섭 책을 읽었다. 이중섭이 혼자 부산에 가난하게 살면서 아내를,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주고 받은 편지들을 모은 책.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로 슬퍼진다. 그리고 편지에 뚝뚝 묻어나온 사랑. 사랑. 사랑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편지만큼 좋은 것은 책 뒷면에 구상이라는 이중섭의 친구가 쓴 글이다. 이중섭이 가난 때문에 영양실조로 죽은 것이라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예술과 생활 안의 고뇌 때문에 식음을 거부하게 되고 그것을 이유로 죽게 되었다는 것. 이중섭은 그 때도 꽤 인정받고 있는 화가였고 후원을 받을 기회도 몇 번이고 있었는데,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일본에 가서 한국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곤, 그것이 좌절되자 중섭은 자신이 일본에 가고 싶은 이유가 사실은 아내와 아이들을 보러가고 싶어서였다고, 세상과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고 고백하는 대목. 그게 뭐가 큰일인지 몰라도 그 좌절로 병을 얻게 되어 죽어간 사람. 그 천진함에 화가나기도 하고, 그렇지만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것. 책을 보니 많이많이 더 궁금해졌다.
시청역으로 가는 길에 여기저기 붙어있는 기후정의행진 포스터! 사과나무가 만든 포스터 중에 가장 널리 퍼진 작업물인 것 같은데 이 얘기는 사장님이 나중에 글로 써주기로 했다. 아쉬워서, 그래서 더 재밌는 에피소드.
차도를 걸을 수 있는, 집회가 좋다. 곳곳에 피켓들을 준비한 사람들, 한껏 꾸린 집회 용사들이 있었다. 이런 곳에 오면 내 인생... 너무 평범하다고 느껴진다. 좀 더 전투적으로 살아야하나.... 기후는 위기라는데 사람들은 조금 신이나 보였다. 다들 집회를 기다려온 사람들처럼 모여들었다.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 호성이를 본 건 정말정말정말 행복한 일! 호성이는 2017년부터 계절이 바뀔 때, 긴 휴일(명절)을 지나올 때마다 메일을 보내준다.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겨울을 어떻게 보냈는지. 휴일에 무엇을 하고 무슨 노래를 듣고, 어디를 갔는지. 계속 같은 레퍼토리들이 반복되지만 호성이 메일을 받을 때마다 또 계절이 지났구나, 느끼게 된다. 아무튼. 나는 무지 반가워서 껴안고 악수하고 난리가 났는데 호성이는 당황에서 제대로 쳐다도 안 보았지만 나는 알지 무지 반가워했다는걸!ㅎㅎㅎ사진을 몇 컷 함께 찍었다. 오랜만에 메일에 답장을 쓸 수 있겠다.
내내 목이 말라, 집회고 뭐고 가혜랑 맥주집을 찾아 다니느라 7000보는 걸은 것 같다. 남대문 시장부터 시청을 한바퀴 삥 돌았는데도 낮에 여는 맥주집이 없었다. 기껏 들어가면 안주를 꼭 시켜야한다고 하고... 내 망상망상한 꿈 중에 하나는 지하철 역 앞에 서서 먹는 생맥주집을 만드는 일. 퇴근길에 그냥 맥주로 목을 축이고 갈 수 있는 아주 가벼운 스낵바를 만들면 나같은 목마른 술꾼들이 찾아오고,,, 프렌차이즈 100여점은 거뜬하지 않을까하는 뭐 그런 망상... 여튼 가까운 곳에 수제맥주를 파는 카페를 발견했다. 거의 눈물을 흘리면서 맥주를 두 잔 먹었다. 취했다.
사실 행진이 너무 하고싶었지만 모임을 하러 마포구청으로. 근 한달만에 다시 만난 몽골여행 친구들. 한국에 돌아가면 꼭 홍어를 먹자고 약속해 만나게 된 홍어회동. 느리가 재미있는 사랑영화를 몇가지 소개시켜주었다. 찬찬히 봐야지. 붕붕으로 가는 길에 인생네컷을 찍었다. 인생네컷은 친구들하고 술 먹고 하기 좋은 놀이! 다들 처음이라는게 더 재미있는 포인트. ㅎㅎㅎ
붕붕에 가니 또 여행친구들이 더해지고!(이름이 괜히 붕붕이 아니고만!) 주종을 고민하다 맥주를 마시고, 또 취해부린 밤. 용주샘이 항상 얘기하는 상상 속의 인물이 보내주신 귀한 음식을 먹었다. 실컷 몽골 얘기할 수 있어 너무 좋은 모임! 2차로 근처에 있는 식당에 가서 맛있는 안주를 먹었는데 사실 골뱅이를 깐 이후로 기억이 잘 안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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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해장을 하고 소의문 옛터부터 순성길을 따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으로. 서소문성지는 전부터 궁금했는데 마침내. 특별전시실의 그림을 먼저 보았는데 절두산 성지 그림이 아름답고, 낯설었다. 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고 한강에 던져버린, 아픈 역사의 장면을 그린 것이 마치 유원지의 풍경처럼 보였다. 순교의 마음이란 이런걸까. 순교의 마음.
서소문성지박물관은 엄청나게 엄청난 공간이었다. 안과 밖으로 전부. 하늘광장도, 하늘로 가는 길도, 내부의 전시실도 모두가 아름다웠다. 하늘과 대지에 사람이 있다, 라는 작품의 얼굴을 가까이서 쳐다보았다가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주하기 어려운 감정. 시간이 없어 전시를 후딱 보았다. 다음에 여유있게 천천히 꼭 다시 와보아야겠다. 이제껏 천주교 박해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사장님을 보내고 용주샘과 약현성당에 갔다. 찬찬히 올라가는 작은 공원도 좋았고 성당 외부도 너무 아름다와.. 아쉽게도 내부를 볼 수 없었다. 지나가는 수녀님께 여쭈어보니 내부는 지금 들어가라 수 없고 대신 뒷 켠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하셨다. 들어가니 어둠 속에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에서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단숨에, 정말 단숨에 이 공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마음이 시끄럽게 돌아다닐 때마다 찾아오고 싶은 공간.
생각해보니 난 그런 공간을 오래 그리워했던 것 같다. 예-전에 아주아주 깊은 혼잡에 빠졌을 무렵, 정말 정신 없이 차를 몰아 성거에 있는 만일사에 갔다. 그 공간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해본적도 없는데, 갑자기 만일사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충분한 위로가 되진 못했지만 어쨌든 밑에 있는 작은 저수지에 앉아 펑펑 울던 기억. 용주샘 말처럼 울기 딱 좋은 공간을 만나버린 것 같다. 아 다시 생각해도 너무 좋아....ㅜㅜ 짧은 기도를 드리고 서울역으로. 용주샘이 역사까지 마중해주었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하루. 가혜가 수원 화성에서 이랑이 오는 무료 공연을 발견했고(시내인가?) 표를 예약해주어 시내랑 셋이 행궁동으로. 타이밍 좋게 맛있는 식사를 하고, 해질무렵 화성성곽을 따라 공연장까지 갔다. 사람이 꽤 많았지만 견뎌지는 아름다움. 노을은 거의 90점이었는데 거기에 화성이 더해져 290점...... 아 정조대왕사랑해요.....ㅠㅠㅠㅠ그러나 절정은, 긴 성곽을 따라 걷는 것이 지칠무렵 도착한 공연장(동장대)가 말도 안되게 아름다운 것. 여기서 공연을 본다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눈물이 줄줄..... 담에 기대어서 노래를 들었다. 이랑의 노래를 평소 많이 듣지 않아 낯선 노래들이 많았지만, 마지막에 환란의 세대를 듣게 되어 너무 좋았다!
환란의 세대하면 봄의 공룡감자밭이 생각난다. 윤석열이 당선된 다음 날 착잡한 마음을 달래려 감자를 심으면서 한곡 재생으로 무한히 들었던 노래. 동시에 다 죽어버리자. 생각보다, 세상이 더, 빠르게 망가지고 있다. 는데 알맹상점 피드에서 위로가 될만한 글을 발견했다.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환란의 세대, 기후위기 속에서 좋은 가을날을.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요? 슬픔 속에서 기쁘게, 기쁨 속에서 슬프게.
우리는 우울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백 퍼센트 우울만도 슬픔만도 아닌 순간을 살 수 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예 하나도 없다는 것은 과장이다. 우리가 느낄 수만 있다면.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과 슬픔은 다른 모든 것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들 속에서 따스해진다는 일 아닌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 가슴에 살아남아 있는 따스한 무언가는 각자의 가슴속 빛의 영역에 속한다. 삶이란 힘든 것이고 우리를 둘러싼 조건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둠은 쉽게 물러나는 법이 없고 매번 다시 찾아오고 우리는 자주 지치고 힘을 잃고 우울하다. 그러나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가끔은 기쁘고 질서가 잡혀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정혜윤>
ps. 서소문성지박물관에서 참을 수 없어 사버린 오징어 그릇에 오징어 담아먹기...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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