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로 지쳐버렸다. 기운을 잘 챙겨야하는 날이로구나. 땡북에서 산 아니 에르노 책을 가방에 넣었다. 일찍 퇴근해서 해지는 것 보면서 정컵에서 읽어야지. 읽어야할 책들이 쌓여있지만, 오늘은 정말 아무도 안 시킨, 아무런 목적없는 책을 읽으면서 기운내야지.
점심엔 신부동에 있는 안골에. 줄을 기다리는 동안 볕을 쬐는 짧은 순간이 좋았다. 안골은 맑은 해장파의 국물! 나는 맛집을 기록해두거나 잘 기억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해장의 철학이 내 안에 차곡히 정립되고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맑은 해장이 필요한 날엔 현대옥, 남해복집, 안골.. 지인한 해장이 필요한 날엔 은희네, 삼보어죽.... 아무래도 해장을 테마로 가게들을 찾아봐야겠다. 히히 할 일 너무 많아~.~
신부동 골목에 있는 에프바에 드디어. 차를 타고 이런 카페에 와야하는 것이 조금 싫지만, 커피가 너무너무 맛났다. 에너지가 막 채워지는 너낌! 탐욕스럽게 두 잔이나 먹고도 사과나무에서 커피를 또 한잔 내려먹고. 오늘은 내 대신 커피가 살아주었다. 몽롱한 채로 일을 하곤 적당한 시간에 퇴근해 원성동으로 넘어갔는데, 정컵이 휴일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런 화요일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그래도 불티나에서 치킨을 맛나게 먹고, 호떡을 사들고 원성천을 산책. 4단지 앞까지 오랜만에 걸었다. 2-3년 전에 천안에 살지도 않으면서 시내네 집 앞으로 자꾸 찾아가 오래 산책하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 나눴던 이런저런 얘기들이 먼 미래같았는데, 지금 그 미래를 살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기대하는 일들, 나중에 살고 싶은 모습들, 하고 싶은 일들을 입 밖으로 뱉어내는 것은 좋은 일 같다. 언젠가는, 이라는 단서가 달린 말들을 좋아한다. 말들이 어딘가를 둥둥 돌아다니다가 찰싹 붙는, 언젠가는.
돌아오는 길에 내심 달이 뜨는 것을 기대했는데, 갑자기 정면에서 노란달이 떡하니 두둥등장. 어째서 저게 여기에 있는걸가. 도대체 왜 이러는걸까. 자꾸만 심장을 부여잡게 되고. 사실 달이 아름답게 뜨는 날들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닌데. 크고 예쁘고 노랗고 빨갛고 둥글고 가늘고 아름다운 달이 뜨는 날은 많은데. 몽골에 다녀온 이후로는 약간 만물에 콩깍지가 씌인 기분. 아름다운 것들을 더 아름답게보고, 자세히보고, 특별히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되는. 에너지를 느끼는 기분이 아니라, 정말 실체가 있는 에너지를 받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산책하게 되고, 하늘을 찾게 되고 그것들에게서 좋은 기운을 얻는다. 이 힘으로 소란한 가을을 견딘다.
출근길에 전진희 '우리의 사랑은 여름이었지'를 아주아주 크게 들었다. 무엇보다 소리의 배치가 좋은 앨범. (페달밟는 소리까지 들린다고 꼭 크게 들어) 이런 좋은 노래들에는 좋은 스피커과 공간 속에서 듣는 것이 예의라고 느껴진다. 살펴보니 앨범에 대한 소개, 만드는 이야기들도 너무 재밌다. 2년 동안 만난, 좋아하는 동료 음악인들과 함께 만든 노래들이란다. 모든 노래마다 어울리는 목소리와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것이 사랑스럽다. CD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실로 오랜만에 들었다.
앨범소개
전진희 [우리의 사랑은 여름이었지]
혼자라는 사실이 버거울 때가 있다.
그럴 땐 우연히라도 마주치자.
슬픔이 반이 되지 않는다 해도
함께 나누자.
전진희의 두 번째 앨범이 당신의 슬픔에게 말을 건낸다. 여기 쉬어갈 호수가 있다고.
잔잔한 호수는 작은 돌질에도 물결이 일렁인다. 벗어날 수도 없는 그곳에서 심연이 되어간다. 그를 깨운 건 수면 위로 비친 달빛. 한줄기 위로가 기억을 소생시킨다. 편안해지고, 그리워진다. 그 여름날의 온도를 품은 채로 다시, 다가올 당신을 맞이한다.
이걸 보고 어떻게 안사........
달을 보며 돌아가는 길에, 미쳤다미쳤다리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전진희 노래 제목이 '달이 예쁘네'였다. 대화하자는거야 뭐야 대체 정말...ㅎㅎㅎ 사랑을 건져올리는 순간들이 여기저기 둥둥.
둥둥둥근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