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이성의 평행선.
남편이 엄마와 장사를 한다고 하면 꼭 물어보는 말.
"안 싸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싸워요. 엄청 많이.."
남편과 엄마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대학을 서울로 오며 서른이 넘어서까지 죽 혼자 살았던 나는 엄마와 한 달에 한 번 연락을 할까 말까 한 무심한 딸이었다. 결혼을 하며 보험회사를 다니던 엄마의 소개로 보험 설계사가 된 남편은 오히려 나보다 더 자주 엄마와 연락하고 만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특히 첫째 아이를 출산한 후에는 엄마에게 육아를 많이 의존하게 되면서 엄마와는 부쩍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성향은 다르지만 우리 가족들은 모두 여행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같이 갔던 여행지만 열 군데가 넘을 정도. 남편이 우리 부모님을 딱히 불편해하지 않아 참 다행이었다.
그런데 '함께 장사를 한다는 것'은 또 새로운 세계였다.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남편과 감정적인 엄마는 대화가 잘 통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가게 오픈 때부터 2,3호 직영점과 체인화까지 염두에 두었던 남편은 누가 요리를 해도 일정한 맛을 낼 수 있도록 매뉴얼화된 레시피를 요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엄마에겐 '계량 DNA'가 존재하지 않는듯했다. 나름 계량을 한다고 하는데 무언가 남편이 원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았다.
평생 본인의 스타일대로만 요리해왔던 엄마와 맥도날드, 피자헛 같은 프랜차이즈에서 알바를 했던 '매뉴얼'이 없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편.
가게 매출이 떨어지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남편이 해결책을 제시하면 엄마는 현재 본인의 힘듦을 '알아주지' 않고 일을 늘인다며 서운함을 호소했다.
엄마는 매일 아침 7시쯤 가게에 나와서 저녁 8시에 영업 종료 후 마감을 하고 물김치를 담그고 9시가 넘어 귀가를 했다.
그야말로 부서져라 일하는 엄마가 불쌍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뭐라도 해서 가게를 살려야 한다는 남편이 이해되기도 했다.
가족이기에 더 상처받고 서운하고 답답할 때가 있어도 가족과 일하기에 좋았던 순간들도 분명 있었다.
방법은 달라도 각자 치열하게 일했다. 일한 만큼의 보상이 없었던 날에도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우리 가게'니까. 결국은 우리 가족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모두 같았으니까.
가끔은 밉고 이해할 수 없어도 가족이란 어쩔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