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서.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세지 않았다.
요즘은 누가 대놓고 몇 살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지만, 가끔 예의 없는 사람들이 얼굴 들이밀고 물어볼 때도 있긴 하다. 그리고 물어보면 번뜩 내가 몇 살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스물아홉이나, 막 30대가 시작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이 물으면 대충 얼버무리면 되지만, 아이들이 물으면, "응? 엄마 스무 살이야."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단지, 친구 같고 젊은 엄마이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일이 좋은 엄마였다.
아이들의 케어가 필요한 시기에는, 풀근무가 어려워져 파트타임을 종종 했다. 대학 시절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아르바이트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 시간에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나이들어 20대들과 같이 하는 아르바이트는 처음은 긴장이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소꿉놀이 하는 기분으로, 레시피를 외우고 서빙하고 계산하는 게임 같은 현실 느낌이었다. 어느덧 40대가 되고 나서는, 파트타임 면접의 기회가 잘 오지 않았다. 면접을 가도 희망고문만 받고 올 뿐 뽑아줄 생각이 없는 곳이 많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4시간짜리 사무직을 할 기회가 생겼다. 뽑힌 이유는, 나이에 비해 얼굴이 동안이라서......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파트타임을 오래 해서인지 생각보다 20대 친구들과 잘 맞았다. 지나고 보니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다. 성격이 잘 맞아서 서로 필요한 거 있으면 도와주고 대화가 잘 통해서 매일 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만두게 되었다.
이유는 한참 늦은 근로계약서를 쓸 때 발생했다. 공고에 시급은 한 달 이후에 조정가능이라고 되어있었는데, 가능한 건지 물어보니 그런 말 한 적이 없다며 상사는 펄쩍 뛰었다. 흥분하며 문을 꽝하고 나가더니, 다른 직원을 보낸다. 본인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화를 낸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 오늘까지 일할건지 정하라고 한다.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을까? 왜 화내는 것일까? 나이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그만두길 원하는 것 같아서 알겠다고 하고 그날까지만 업무를 하고 나왔다. 당일 통보에 당일퇴사. 처음 겪는 일이었다.
또 하나의 경험을 쌓았다.
근로계약서는 첫 달에, 가능한 첫 주에 작성하자.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에 계약서 작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두 달이 지나있었다. 사실 나도 나이가 많은 상사가 보수적이고 대체로 소통이 어렵다고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계기로 나이는 별개의 문제이고, 사람 본연의 크기라는 것을 새삼 또 깨닫는다. 나이만 먹고 아직 어린이인 내가, 한 걸음 걸어가는 길목에서 그저 가만히 있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 돌멩이가 둥그런지 뾰족한지, 깨진 것인지 미리 알 수 없었다. 그저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그 돌을 건너야 한다. 그렇게 오늘 또 하나의 경험을 쌓는다.
오늘도 나는 어린아이가 맞다.
아직 배울 게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