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밖은 아직 한밤중처럼 깜깜했다.
오늘의 첫 번째 진료환자가 되기 위해 은설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현관문을 나서려 했다.
매일 신고 다니는 단화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은설이 신발장을 열어 새 구두를 꺼내었다.
몇 걸음 걷고 나면 어차피 잡힐 주름이었지만, 은설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을 놀려 구두를 신었다.
‘발 본을 직접 뜬 것도 아닌데 정말 잘 맞네.’
날렵한 구두볼의 가죽이 발에 착착 감기는 듯했다.
제자리걸음을 걸어도 신발이 들뜨거나 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인이 만들었다더니 정말 뭔가 다르긴 다른 것 같아.'
은설은 현관 전신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오늘 입은 의상과 신발의 매칭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벨벳으로 된 고급스러운 외피에 과하지 않은 리본장식이 올라간 구두는 겨울 외투나 정장 어느 것과도 잘 어울릴 듯했다.
데일리슈즈로 신기엔 아까웠지만 그래도 될 만큼 발이 편하고 가벼워 은설은 구두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구두 샀네?”
은설을 배웅하러 나온 준수가 대번에 새 구두를 알아보았다.
“아직 안 잤어?”
“응. 물 한 잔 마시고 자려고. 좀 전까지 이 대리하고 계속 통화했어. 뭐 잘 안 되는 게 있대서.”
“거긴 아직도 퇴근 못했나 보네.”
“나도 잠깐 눈 좀 붙였다가 다시 나가야지.”
“몇 시쯤? 공강이면 모닝콜 걸어줄 수 있어요.”
“그럼 10시쯤에 좀 부탁해요.”
“쉬는 시간에 걸면 되겠다. 알겠어요.”
“구두 이쁘네.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치. 준수 씨 취향대로 사면 구두 신고 갈 데가 파티밖에 없을 걸?”
“그니까. 혼자 사러 가길 잘한 거지. 얼마나 좋아요. 은설 씨 마음에 쏙 드는 거 골라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현준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은설은 그저 잠자코만 있었다.
무표정히 집을 나서려는 은설이 마음에 걸렸는지, 준수가 은설의 등 뒤에 대고 서둘러 말을 뱉었다.
"며칠만 기다려 봐요. 신랑이 고른 근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택배로 올 테니까."
"엥?"
은설에게서 반응이 오자 준수가 한껏 의기양양해진 목소리가 되어 말을 이었다.
"잠도 못 자고 일하는 바쁜 와중에도 내가 짬짬이 알아보고 고르고 골라서 산 거니, 아마 은설 씨 마음에도 쏙 들 거야."
"뭔데요?"
현관문을 나서던 은설이 궁금했는지 뒤를 돌아 준수에게 물었다.
"글쎄? 뭘까? 며칠만 더 궁금한 채로 지내요. 헤헤. 크리스마스는 좀 남았지만 배송 오면 내가 특별히 열어볼 수 있도록 해줄게. 그때까지만 참아요."
"뭐야. 뭔데 그래?"
"얼른 가. 병원 늦으면 안 된다며. 은설 씨가 나가야 나도 자러 들어가지."
1분 전, 자신이 은설을 불러 세웠던 것을 잊기라도 한 듯, 준수가 다시 은설의 등을 현관문 밖으로 떠밀었다.
첫 진료 환자의 또각거리는 발걸음소리로 현준은 은설이 새 구두를 신고 왔음을 확신했다.
역시나 정간호사 뒤를 따라 들어서는 은설을 보며 현준이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
은설이 수줍게 웃으며 환자용 진료의자에 앉았다.
“발목은?”
“굽이 있는 구두를 신을 수 있을 만큼은 괜찮아졌어. 구두가 아주 편하고 잘 맞아서 그런가 걸을 때도 문제없네.”
“다행이네.”
차트를 다시 한번 훑어보며 현준이 잠깐의 텀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은설도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었고, 곧 세 번째 인공수정을 위한 진료가 시작되었다.
“둘째 날이지?”
“응.”
“컨디션은 어때? 많이 회복이 되었어?”
“응. 쉬는 동안은. 다시 시작하려니까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또 가득 쌓이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씁쓸한 웃음을 섞어하는 은설의 말에 현준도 안쓰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쪽 진료실에서의 진료까지 마친 뒤 현준이 세 번째 인공수정 시술의 진행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사제를 다시 바꿀 거야. 용량도 좀 올리고.”
“응. 용량을 올리면 좀 더 힘이 들겠지?”
“아무래도. 약제가 첫 번째 시술 때 썼던 것과 같으니까 무난히 지나가길 바라 봐야지.”
"이번엔 후회가 남지 않게 진짜 많이 노력해 보려고. 아파도 괜찮으니 잘 되기만 했으면 좋겠어."
은설이 혼잣말처럼 마음속 바람을 웅얼거렸다.
"노력은 의사가 해야지. 잘 돼도, 잘 안 돼도 다 내 탓이니까 넌 앞선 걱정만 접어 둬."
자칫 자책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은설의 다짐을 현준이 자신의 몫으로 끌어안았다.
진료를 마친 은설은 자연스레 정간호사의 뒤를 따라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그거 저 주세요. 저 혼자 가도 돼요.”
정간호사가 웃으며 은설에게 처방안내문을 건넸다.
이제는 굳이 정간호사의 안내가 없어도 될 만큼 병원 안의 동선에 익숙해진 은설이었다.
주사실의 간호사들도 자가주사법에 대한 설명을 생략했다.
“아시죠?”
“배꼽 아래 좌우 5cm 정도 되는 위치에. 뱃살을 꼬집듯이 해서 넉넉히 잡고. 바늘을 찌를 땐 직각으로. 이틀에 한 번씩. 양쪽 번갈아가며 주사, 맞죠?”
“오. 정확해요. 그래도 혹시 궁금한 점 생기시면 주사실로 전화해 주시고요.”
“네.”
은설이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대답했다.
아버님의 사주풀이대로라면 이번엔 정말 되어야만 했다.
아기를 가질 운 때의 마지막 남은 한 달 동안 진행되는 시술이었으므로.
되기만 한다면 아버님에게 어설픈 사주풀이를 가르쳐 준 그 문화센터 사주강사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신점보다 더 정확한 사주풀이라며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고 다닐 용의가 있었다.
되기만 한다면.
“요새 왜 이렇게 밥을 못 먹어?”
깨작거리듯 젓가락질을 해 대는 은설을 보며 김 선생이 물었다.
“못 먹는 게 아니고, 안 먹느라 그러는 거예요.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대서요.”
그제야 은설이 골라낸 것들이 햄과 맛살이라는 것을 알아본 김 선생이 담담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은설에게 물었다.
“시술 또 들어갔댔지? 시험관? 아니면 인공수정 한 번 더?”
“인공수정 3차요.”
“에휴, 힘들 때네. 햄 골라내는 거 보니 또 옛날 생각나고 그러네.”
“저 지금 오바하고 있는 건가요, 샘?”
“내 마음 편해지라고 하는 행동에 오바가 어딨어. 골라내는 게 더 스트레스면 먹는 거고, 입에다가 넣는 게 더 스트레스면 골라내는 거고 그러는 거지, 이때는.”
“그렇게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샘. 요즘은 깨진 보도블록도 밟기 싫어요. 부정 탈까 봐.”
“적당히 해. 그건 좀 오바 맞아.”
“말하지 말 걸.”
“아냐. 밟지 마라. 나도 안 밟으련다. 응원하는 차원에서.”
“이러다 나중에 굿판이라도 벌이는 거 아닐까요, 저?”
“난 했어. 정확히는 울 엄마가 했지만.”
“정말요?”
“응.”
“효과 있었어요?”
“그거 하고 2년 넘게 지난 다음에 첫째 가졌는데. 그럼 효과가 있다고 해야 하는 거야, 없다고 해야 하는 거야?”
“하하, 그러게요.”
“나도 한창 임신 안 되어서 시술받고 그랬을 때, 지금 생각하면 참 말도 안 되는 거에 집착하고 그랬어.”
“샘은 어떤 거요?”
“유턴. 집에 갈 때 유턴해야 했는데, 그냥 싫었어. 좀 더 돌거나 말거나 곧 죽어도 피턴만 했어. 그냥 그 유턴 신호에 화풀이를 한 거지, 뭐.”
은설은 자신과 다를 바 없었다는 김 선생의 과거 이야기에 조금 위로를 받았다.
“뭐가 됐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 샘. 그래야 후회도 미련도 안 남아.”
무심히 하얀 밥을 입에 떠 넣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김 선생의 목소리에선 꽤나 진한 진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김 선생의 조언대로 은설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