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오래된 구두(4)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썸만 4개월을 탔었어, 남편 하고. 소개팅 치고는 길었지. 근데 그러는 동안 남편이랑 내가 죽이 꽤 잘 맞는 편이라는 걸 알게 됐어. 이렇게 편안히 평생 친구로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더라고.”

“그게 사랑은 아니잖아. 안 그래?”

현준이 안타까운 소리로 물었다.

“그땐, 사랑은 어차피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상관없었어."

은설의 말에 현준도 자신의 결혼을 떠올렸다.

자신도 분명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미주와 결혼을 또 이혼을 했었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어. 지금은 이유도 잘 생각 안나는 별 것 아닌 걸로 싸움을 한 번 했는데, 이 사람하고는 화해를 할 수가 있더라고."

"화해?"

"응. 이게 되게 중요한 거거든. 그전에 만났던 사람들하고는 화해라는 게 없었어. 한 번만 싸워도 견디질 못하고 헤어져버렸으니까. 근데 이 사람 하곤 그게 되는 거야, 화해가. 그래서 결심했지. 결혼하기로.”

“꽤나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었네.”

“하하, 수지도 그렇게 얘기했었어. 경제력만 보고 결혼하는 것보다 더 독하게 현실적이라고.”

“후회한 적은 없어?”

현준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선 은설이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어라 한마디를 꺼내려는 듯 은설이 입술을 들썩일 때, 한 무리의 손님들이 왁자하게 카페 안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연달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중년의 남자들도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술이 오른 사람들의 메뉴 취합하는 소리, 여느 해보다 일렀던 송년 모임에 대해 장단을 따지며 토론하는 소리들로 고요하던 카페 안이 시장통처럼 북적였다.

“우린 그만 가자”

은설이 벗어두었던 외투를 살포시 들어 올리며 현준을 재촉했다.




“구두.”

“뭐?”

“새 구두가 갖고 싶다고.”

갓 구워낸 토스트에 버터와 잼을 번갈아 발라 준수에게 건네며 은설이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를 꺼냈다.

“구두는 사주기 싫은뎅.”

준수가 장난스레 은설의 요구를 거절했다.

“왜? 앞으로 선물은 상대방이 원하는 걸로 사주자며. 자기가 먼저 그러자 해놓고는!”

은설이 뾰루퉁히 볼멘소리를 했다.

“은설 씨는 신발 사주기도 애매하잖아. 맞는 사이즈 찾기가 쉽나, 어디.”

“같이 가서 신어보고 사주면 되지.”

“바빠. 같이 종일 돌아다닐 시간 내기 어려운 거 알면서. 몇 주째 토요일에도 출근하고 있는 거 안 보여? 봐, 피부 칙칙해진 거. 아, 이 피곤에 찌든 얼굴.”

준수가 잼 바르던 숟가락을 한번 쑥 빨아먹고는 숟가락 궁둥이에 얼굴을 비춰 보며 말했다.

“내 꺼 아직 안 발랐는데.”

“아, 미안. 그렇게 돌아다닌다고 딱 맞는 신발을 찾는단 보장도 없잖아, 솔직히.”

준수가 하나도 안 미안한 목소리로 미안하단 소리를 하며 은설과 신발을 고르러 다니기 싫은 이유를 덧붙였다.

“치.”

은설이 단단히 삐친 내색을 하자 준수가 대안이라도 내놓아보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냥 맞춰 신지 그래?”

“비싸잖아, 맞춤 구두는. 잘만 걸리면 세일하는 것들 중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그 '잘 걸리는 순간'이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젠데? 나랑 결혼한 이후에도 있었어?”

“······.”

은설이 잠시 말을 잃었다.

답할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은설이, 지기 싫던 차에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쳐들며 말했다.

“준수 씨랑 연애하는 일 년 동안 몰아 샀던 거 여태 신었지. 지금까진 적극적으로 막 꼭 사고 그럴 필요가 없었어.”

“은설 씨 신발 궁한 거 나도 알지만 그래도 그건 마누라가 알아서 사도록 해요.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되는 걸로 다시 말해주라."

살짝 고민하는가 싶더니 준수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은설에게 물었다.

"노트북 어때? 학교 꺼 말고 개인 노트북 하나 갖고 싶어 했잖아.”

“그냥 구두 사주는 게 더 싸게 먹힐 텐데.”

“30만 원 중반 정도면 괜찮은 거 살 수 있어. 어차피 자기는 게임을 안 하니까 그래픽카드 좋은 거 필요 없고. 소리는 무조건 음소거시켜 놓잖아.”

“그래도 비싸네. 아껴야 잘 산다며, 이 사람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노트북 사주는 걸로 내년 화이트데이, 생일,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까지 퉁 치자. 어때, 신랑 생각이? 아주 실용적이지?”

“헐.”

“걱정 말아요. 그래도 기념일 날 조각케이크랑 꽃 한 송이 정도는 사들고 올 테니.”




은설은 결국 구두를 사주겠노라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나도 받아야 되는 거잖아, 크리스마스 선물. 난 뭐 고르지?”

“고르지 마요. 어차피 내가 갖고 싶은 거도 못 받는데 나도 그냥 내 마음대로 골라서 줄 거야.”

“은설 씨가 고른 것들 중에 플스 5가 있길 기대해 볼게요. 그거라면 후년 크리스마스까지도 선물을 퉁쳐줄 수 있어.”

“바라는 게 너무 큰데?”

“그럼 중고 게임 몇 장. 돈으로 주면, 사는 건 내가 알아서 할게.”

“나도 게임은 사주기 싫어요. 다른 걸로 골라보도록 해요.”

“쳇, 어쩔 수 없군. 그럼 좀 더 생각해 볼 테니 미리 사두지 말아요. 며칠 안에 알려주도록 하겠어.”

“몰라. 오늘 막 아무거나 살 거야.”

은설의 으름장을 눈곱만큼도 믿지 않는 준수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설도 들고 있던 빵을 내리고 준수를 쫓아갔다.

토요일 아침 느긋한 출근을 하는 준수의 어깨를 털어주며 은설은 퇴근 시간이 어찌 되는 지를 물었다.

“늦게 출근하니까 퇴근도 늦으려나?”

“왜?”

“그냥.”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을 거야. 오래간만에 분위기 좋은데 좀 갈까?”

“어디?”

“요 앞에 파스타집 새로 생겼던데. 오다가다 보니까 가성비가 썩 좋아 보이더라고. 한 그릇에 만원이 안 되는데도 해산물을 꽤 넣던데?”

“알겠어요. 그럼 나 저녁밥 안 하고 기다린다.”

“응. 혹시 더 늦어지면 전화할게.”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애쓰네 울 신랑. 쉬엄쉬엄 빨리 하고 집에 와용.”

“하하, 쉬엄쉬엄 어떻게 빨리해.”

아직은 신혼 티가 남아있는 부부의 평범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며, 은설은 준수를 기분 좋게 배웅하려 애썼다.




준수가 나가고 난 뒤, 은설은 먹다 남은 빵과 커피를 쟁반에 옮겨 담고 볕이 드는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12월로 접어들었지만, 창가의 볕은 아직 따듯하고 좋았다.

은설이 창을 여니 따뜻한 볕과는 정반대의 감각을 자극하는 겨울바람이 훅하고 집안으로 들왔다.

“공기가 나쁘지 않네, 오늘. 아, 집에서도 선크림을 발라야 한다던데.”

혼잣말을 그렇게 뱉으면서도 은설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얼굴과 양손, 그리고 양발을 온전히 다 볕 아래 내어 놓은 채 온기를 즐겼다.

딩동.

“뭐지? 올 사람이 없는데. 준수 씨가 뭐 샀나?”

예상대로 택배기사가 방문한 것이 맞았지만, 수령인은 준수가 아닌 은설이었다.

“뭐지? 뭘 산 적이 없는데. 어라? 이거 현준이가 보낸 거잖아?”

투박한 택배 상자를 여니 그 안에서 고급스러운 수제화 상자가 다시 나왔다.

발이 편하기로 유명한 수제화 전문점의 로고가 은설의 눈에 들어왔다.

“이거 되게 비싼······. 가만 얘가 내 발 사이즈를 어떻게 알고?”

은설의 머릿속에 지난 주말에 벌어졌던 일련의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말도 안 돼.”

설마 하는 마음에 열어본 현준의 카드에는 역시나 은설이 예측했던 내용이 쓰여있었다.

[코트 세탁 하려고 보니, 마침 아주 잘 그려진 신발 본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의뢰해 봤는데, 구두 장인께서 해주시더라고. 잘 맞길 바라. -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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