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하얗게 불태운 날들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은설의 피나는 노력을 가장 먼저 체감한 것은 준수였다.

“히익, 오늘 우리 뭐 샀길래 돈이 이렇게나 많이 나온 거지? 카트 안에 별로 들은 것도 없어 보였는데? 뭐야, 죄다 유기농이잖아.”

바쁜 시즌을 마치고 몇 주만에 은설과 함께 마트 나들이를 나온 준수가 계산서를 재차 살피며 말했다.

은설이 눈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당연한 것을 뭘 놀라고 그러냐는 듯 준수의 말을 받았다.

“유기농 야채는 일반 야채보다 별로 그렇게 안 비싸. 일이 천 원 더 붙는 정도? 아까 고기를 한우로 골라서 그래.”

“한우 담았어? 우리가 언제부터 한우 먹고살았다고.”

“이달부터. 이제 한우만 먹을 거야, 나.”

“이 사람아, 엄밀히 따지면 살코기 빡빡한 호주산 청정우가 영양면에서는 훨씬 더 낫다고. 한우는 너무 기름져. 맛있기는 해도 건강한 고기는 아니라니까.”

“그래도 한우 먹을래. 비싼 고기 먹고 힘 낼 거야. 마누라가 한우 먹는 게 그렇게 아까워?”

뽀루퉁해진 은설의 얼굴에 장난기가 별로 없다는 것을 파악한 준수가 한 수 물러나 은설의 비위를 살폈다.

“알았어요. 그럼 구울 때 나도 꼭 한 점 나눠 줘.”

“고기는 당연히 반띵이지. 쪼끔 밖에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나만 맛있고 좋은 거 먹는 건 안 될 말이지.”

발끈한 것이 조금 미안했는지 은설이 부부지간의 의리를 운운하며 준수를 위하는 말을 했다.

“이제는 야채랑 과일도 꼭 베이킹소다로 닦아서 먹을 거예요. 잔류 농약 없애는 데에 효과가 좋대."

"요새 저농약 써서 흐르는 물에 10초 이상만 씻으면 다 깨끗해진다고 방송에 나오드만."

"······. TV나 휴대전화도 많이 안 볼 거예요. 특히 저녁부터 밤 사이에. 너무 늦게까지 보면 그게 숙면을 방해한다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건. 근데 은설 씨 검색포털 끊을 수 있겠어? 리빙 관련 블로그 들여다보는 게 요즘 취미이자 낙 아니었나?”

“취미는 바꾸면 돼요. 할 수 있어. 그것들 다 끊고 이제 잠도 매일 푹 많이씩 잘 거야.”




은설은 정말로 시계그림 생활계획표처럼 움직였다.

6시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고, 7시에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배주사를 놓거나, 병원으로 출발을 하거나, 질정을 넣었다.

기말고사와 수행평가 점수 입력, 학교생활기록부 기록 같은 학기말 업무가 한창 바쁜 시즌이었지만, 야근만은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애를 썼다.

모두가 들떠 있는 크리스마스이브에도, 근처 카페라도 가자는 준수의 제안을 거절하고 ‘10시 취침’을 고수했다.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하루 두 번까지만, 커피 대신 속이 따뜻해지는 생강차를 마셨다.

꿀에 재워둔 생강을 우려낸 생강차는 칼로리가 높았고, 살이 찌면 먹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에 섭취 횟수 제한만큼은 철저히 지키려 애를 썼다.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집안에서도 옷을 두 겹씩 껴 입었고, 수면양말은 제2의 피부라도 되는 양 벗는 일이 없었다.

“안 답답해? 은설 씨, 그러다가 오히려 없던 병도 도질 거 같아. 좋아하지도 않는 생강차는 왜 맨날 마셔?”

독하게 룰을 지키는 은설을 보며 준수가 혀를 내둘렀다.

준수가 그러거나 말거나 은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 닦는 이들이 수련을 하듯 정해 놓은 루틴 안에서만 움직이려 애썼다.

혹시라도 몸이 피로해질까 봐 약속하나 잡지 않고 연말연시를 보내는 은설을 보며 준수도 더 이상은 타박하지 않고 은설의 노력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띵동.

“아후.”

엄격히 자리 잡은 생활리듬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아 임신테스트기조차 하지 않은 은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병원에선 은설이 가장 두려워하던 메시지를 보내왔다.


[호르몬 수치 0.5로 임신이 아닙니다.]




은설은 준수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태블릿의 케이스를 열고 있었다.

키보드가 달린 케이스가 제법 묵직하게 은설의 은설의 손에 잡혔고, 은설이 케이스를 젖혀 노트북의 모양새를 만든 뒤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그것을 놓았다.

“응? 왜 안 되지?”

아무리 눌러도 반응하지 않는 키보드의 키를 신경질적으로 툭툭 눌러대는 은설을 본 준수가 다가와 케이스 측면에 달려 있는 전원버튼을 제쳤다.

“에이, 바보냄시이.”

준수가 장난스레 자신의 코 앞을 부채질하며 은설을 놀렸다.

은설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티를 내며 준수를 한 번 째려보곤 말없이 인터넷창을 열었다.

“그렇게 인터넷만 검색할 거면 뭐 하러 키보드 전원은 켜고 그래요. 배터리 아깝게.”

살짝 삐친 것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은설의 기분을 확인하려 슬쩍 말을 건다는 것이 그만 실수가 되고 말았다.

“별 걸 다 타박을 하고 난리야. 왜! 어떻게 쓰든 내 맘이지. 키보드 켜든 말든 배터리가 빨리 닳든 말든 준수 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잔소리할 거면 사주질 말든가.”

은설이 야속하리만치 따갑게 준수에게 쏘아붙였다.

당신이야말로 별 것 아닌 걸로 왜 그렇게 화를 내냐며 대거리를 하려다가, 준수가 숨을 한번 고르며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하아, 이제 어떡하지.”

돌아서는 준수를 보며 은설의 입에서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것은 이 말이었지만, 은설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것은 준수가 아니었다.

은설은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거친 광야에 되똑하니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화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동전을 모두 쏟아붓고도 인형을 뽑지 못한 사람처럼 황망히 서서 은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기만 했다.

현준이 근무를 한다는 토요일이었고, 생리 이틀째 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은설은 병원에 가지 않았다.

다음 주면 설 연휴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아버님이 말했던 아기가 생길 운이 깃든 시기도 끝이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떻게든 그 기간 안에 승부를 보려 미친 사람이 내달리듯 진행했던 세 번의 인공수정은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돌팔이······.”

은설이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정확히 방향을 잡지 않은 욕 한 마디를 허공에 내뱉었다.




현준은 세 번째 인공수정 후에도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하면 시험관아기 시술을 진행해 보자며 제안을 했었다.

세 번째 시술을 하며 들였던 노력이 만만치 않았던 터라 은설은 현준의 제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험관아기 시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기가 생길 것이라던 아버님의 사주풀이가 한몫을 하기도 했거니와, 시험관아기 시술에 대해선 준수와도 심사숙고를 해보겠노라 약속했던 터였다.

은설은 시험관아기 시술이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앞선 고민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괜한 스트레스 때문에 인공수정 시술을 한 것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현준의 시험관아기 시술 제안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하던 은설이 준수가 켜주었던 키보드 케이스의 전원을 도로 내리고, 태블릿 화면을 터치해 검색창을 열었다.

액정화면에 뜬 키보드 그림을, 은설은 네 손가락만을 사용하여 한 자 한 자 조심스레 찍어 눌렀다.

[시험관아기 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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