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사흘쯤 지나 원래대로라면 하루 세 번 질정을 넣었을 시기가 되니, 그렇게 지내는 것보다는 한결 편안한 일상이 그런대로 즐길 만했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고, 단풍도 하늘도 더없이 예쁜 날들이었다.
걷기 좋은 날들이었고, 하릴없던 걸음에 조금씩 리듬이 실렸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니 수지와 형석의 결혼식이 생각났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여겨볼만한 이유를 겨우 찾았어. 나 모레 니 결혼식 간다. 그래도 되지?]
[그럼! 나야 고맙지. 말 못 하고 있었는데 먼저 와주겠다 해서 진짜 고맙지!!!]
수지가 은설의 기대 이상으로 반가워해 주었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인생의 법칙이 떠올랐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의 경중을 비교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거나 수지의 결혼식은 은설이 보고 싶어 했던 것이 맞았으므로.
은설은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해 화장을 하고 머리에 컬을 넣었다.
그리고 일부러 몸에 꼭 맞아 불편한 원피스를 입고, 제일 높은 하이힐을 신었다.
또 버스와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는 수고를 감수하고서 ‘소요시간 최단경로’대로 대중교통을 옮겨 탔다.
이식을 했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일부러 찾아 하면, 문득문득 욱하고 치솟아 오르는 마음이 그래도 좀 누그러졌다.
“뭐야, 왜 이렇게 이뻐.”
은설이 신부 대기실에 앉은 수지를 보고 짓궂게 축하인사를 했다.
“이쁘냐? 다행이다. 나 푸석푸석하지 않아, 정말?”
“이뻐, 애기 생기면 이뻐진다는 말 정말 맞는 말인가 보다 싶게. 피부도 뽀얗고, 화장도 잘 먹었어. 배도 솔직히 별로 티 안 나. 부뜰이는 섭섭할지 모르겠다만.”
“오늘은 좀 섭섭해도 돼. 엄마가 주인공인 날이야. 진짜 괜찮니?”
“응. 진짜.”
“수지야”
대기실 입구에서 한 무리의 여자들이 수지의 이름을 불렀다.
“어머!”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던 수지의 친구들이 소식을 전해 듣고 온 모양이었다.
둘셋씩 짝을 지어 온 사람들 중엔 이전 직장 동료도 있고, 대학 동창도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들 중엔 같은 중학교 출신인지 은설도 얼핏 아는 얼굴이 있었다.
은설은 새로 온 친구들에게 수지의 곁을 내주고, 결혼식이 열릴 홀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결혼식과 식사가 동시에 진행되는지 홀 안에는 둥그렇고 커다란 식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찍 왔네.”
익숙한 목소리가 은설의 귀뒷머리에 울렸다.
“어. 왔어?”
은설이 시큰둥히 현준에게 인사했다.
“혼자 왔어?”
현준이 은설의 옆에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응. 남편 출장 중이잖아. 알고 지내는 중학교 동창 셋 중에 둘이 하는 결혼이라서 너 말곤 다른 친구 없는 거 알면서 뭘 묻고 그래.”
“아, 나도 혼자 있을 거 같아. 중학교 동창 중엔 나 밖에 못 왔어.”
은설은 형석의 친구들이 왁자한 소리를 내며 여럿 모여 있는 쪽을 훑었다.
“혼자 밥 먹기 뻘쭘하겠네.”
은설이 혼잣말처럼 읊조린 말을 귀신처럼 알아듣고 현준이 냉큼 대답했다.
“응.”
“그럼 같이 먹든가.”
은설이 또 시큰둥히 혼잣말처럼 말을 흘렸다.
그러고 나서 은설은 또 한참을 말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형석과 수지의 웨딩촬영슬라이드만 바라보았다.
은설의 눈치를 살피던 현준이 눈치와 용기가 뒤섞인 목소리로 은설에게 물었다.
“괜찮아?”
“뭐가?”
“그냥, 뭐. 기분이나 컨디션이나······. 그런 거.”
“괜찮아. 나쁘게 지내봐야 별 거 있니. 적당히 화 낼만큼 화내다가 마음 추스르고 있는 중이야.”
기가 꺾인 듯 들리는 현준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은설이 무심하고 담담히 자신의 상태를 전했다.
곧 형석과 수지의 식이 진행되었다.
주례 없이 진행된 식은 깔끔하고 재미있었다.
성혼선언문을 낭독하고 잘 살아보겠다는 형석과 수지의 다짐 위로 조촐히 모인 하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피로연을 겸한 자리가 꽤 길게 이어졌고, 홀로 와서 자리를 빛내주었던 은설과 현준은 적당한 시점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와줘서 진짜 고마워.”
수지가 근간에 보였던 미소 중 가장 아름답게 웃음을 지으며 은설과 현준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야, 둘이서 밥이라도 한 끼 사 먹고 들어 가.”
피로연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못내 미안했는지 형석이 봉투 하나를 현준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이거 뭐냐.”
“뭐긴 뭐야, 새끼야. 내 정성이지.”
“얼마 들었어?”
은설이 현준의 손에 쥐어져 있는 봉투를 빼꼼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응?”
“천박한 호기심이 발동했어.”
화가 걷힌 은설의 목소리에 용기를 얻은 현준이 빙그레 웃으며 은설에게 말했다.
“십만 원.”
“히익. 요즘은 결혼식 때 친구들한테 이런 것도 하니?”
“요즘이 아니라 옛날식 같은데. 대학 때 까마득한 선배 결혼식 가서 몇 번 이렇게 쥐어주는 봉투로 놀았던 기억이 있어.”
까또.
현준과 은설의 메신저가 동시에 울렸다.
[사이좋게 놀아라.]
형석이 보낸 메시지였다.
“니가 말했니? 아니면 수지가 말했나? 아, 내가 너무 속상해서 수지한테 하소연을 좀 하긴 했어.”
“아. 그럼 수지가 말했나 보네.”
“싸운 건 아닌데, 우리가. 그치?”
“아, 응.”
“가자. 돈까지 줬는데. 놀자, 그냥.”
은설이 종일 들려주었던 무덤덤한 목소리로 현준을 이끌었다.
터덜거리는 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은설과 현준은 현준의 차가 서 있는 곳으로 갔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은설과 현준은 서로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중임을 알았다.
“뭐 할래?”
“글쎄. 넌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라······. 딱히 뭐를 막 하면서 놀고 싶단 생각을 할 나이는 아니라. 아!”
퍼뜩 생각이 난 듯 은설이 활짝 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아니야.”
“뭔데 그래?”
“있긴 있는데. 호불호가 좀 갈리는 곳이라서 말이야.”
“호인지 불호인지는 들어봐야 알지. 어디가 가고 싶은 건데?”
“놀이공원.”
“이런 것만 세 개 째인데······.”
“야간개장 때 들어와서 가장 먼저 가장 많이 타야 하는 놀이기구들이야. 시간 더 지나면 탑승이 마감될 수도 있다고.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도록 해.”
“이거 다음부턴 드롭이나 샷, 스윙, 뭐 이런 단어 안 붙은 걸로 좀 타면 안 될까?”
“생각은 해 볼게. 근데 이런 거 타면 스트레스 풀리지 않아? 안 그래?”
“난 안 그래.”
“난 너무너무 정말 많이 그래. ‘만약에 임신한 상태이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최근 3년 정도는 한 번도 못 탔었어. 나 오늘 진짜 오래간만에 소원풀이 하는 거야.”
은설이 기분 좋은 흥분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았어. 타고 싶은 만큼 많이 타. 협조할게.”
현준도 덩달아 웃으며 은설의 흥에 추임새를 넣었다.
은설은 360도를 몇 바퀴나 돌고, 위로 휘둘렸다 거꾸로 꽂히기를 몇 번이나 더 당하고 나서야 성에 찬 듯 현준에게 잠시 쉬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잘 타지도 못하는 놀이기구에 연달아 함께 오르느라 현준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제야 현준의 상태가 눈에 들어온 은설은 현준에게 조금 미안했다.
한편으론 대상이 분명치 않았던 복수심이 차츰 누그러지며 통쾌한 기분도 들었다.
“괴롭히니 이제 좀 속이 시원하니?”
현준도 은설의 그런 속내를 느꼈는지 장난 반 진담 반의 질문을 했다.
“응. 고생했어. 화받이 해주느라.”
“풀려서 다행이다.”
현준의 말에 은설이 쓸쓸히 웃었고, 현준은 그런 은설을 보며 가슴 왼쪽 언저리에서 통증을 느꼈다.
은설은 마지막 퍼레이드와 레이저쇼가 끝날 때까지 놀이공원에 머물고 싶어 했다.
“여기가 내 현실이었으면 좋겠네.”
밝게 웃으며 하는 말속에서도 현준은 은설의 슬픔을 캐치했다.
그리고 해결해 줄 수 있을 듯해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처음으로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끝까지 밀고 나가기만 한다면 해결해내지 못할 난임은 없는 것처럼 으스대며 의사노릇을 해왔지만, 아끼는 사람의 고통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졌다.
은설이 겪고 있는 고통이 현준으로 하여금 ‘어째서 처음부터 한 번에 단박에 해내지 못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결국 ‘아이를 만들어 내는 일’은 역시나 신의 영역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귀결되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난임전문의인 현준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번엔 면역글로불린 주사제도 처방을 했어요.”
이식을 마친 현준이 은설에게 추가로 있을 처방을 안내했다.
“수액 맞을 때 그것도 맞는 거죠?”
“네. 일시적으로 면역을 떨어뜨려서 모체에서 배아를 거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주사제예요.”
“들어 본 적 있어요.”
현준의 설명에 은설이 누운 채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5일 배양 배아가 착상률이 조금 더 높아요. 이번엔 잘 될 거라고 같이 믿어 봅시다.”
"저도 느낌이 그래요, 선생님. 어젯밤에 꿈을 아주 멋진 걸로 꿨거든요."
은설이 한껏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현준에게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