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상상 졸업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잉?”

기범이의 전화였다.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고, 담임이었던 은설이 생각이 나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늦은 오전이었지만 아직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잠이 덜 깬 상태였던 은설은 목소리를 여러 번 가다듬은 다음에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기범아.]

[쌤! 저 졸업했어요!]

[그래, 축하해. 무사히 졸업해 줘서 고맙다.]

[쌤 덕분이에요. 참, 저 대학도 가요.]

[오, 그렇게 결정했구나! 고민하느라 고생 많았어.]

[그래서 이제 서울에서 못 놀아요.]

[주말에 올라와서 친구들이랑 놀면 되지.]

[스승의 날 때는 선생님 만나러 올게요.]

[선생님 올해도 휴직이야. 만나려면 우리 동네로 찾아와야 해.]

[정말요? 그럼 쌤이 밥도 차려주고 그러시는 거예요?]

[집으로 놀러 오라고는 안 했어. 그치만 생각은 해볼 게. 무슨 과로 진학했어?]

[연극영화과요.]

[오오, 적성에 잘 맞을 거 같은데? 기범이 싸인 미리 싸인 받아둬야겠네.]

[쌤, 사실 저 작년에 오디션 붙어서 소속사도 있어요.]

[정말? 어디?]


‘어디?’라고 묻는 은설의 목소리가 급작스레 진지해졌다.


[MBW요.]

[정말?]


기범이의 입에서 꽤 크고 유명한 곳의 이름이 나왔고, 은설이 놀라움과 안심이 섞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정말’을 외쳤다.


[진짜예요.]

[······.]

[쌤? 전화 끊긴 건가?]

[아냐. 잠깐 내가 기범이 학교생활기록부에 뭐라고 써놨었나 생각해 보느라 그랬어.]

[크크큭. 안 그래도 저도 불안해서 확인해 봤어요. 고등학교 올라와서 하도 사고를 많이 쳐가지고. 3년 치 다 확인해 봤는데 다행히 이상한 내용은 없어요.]

[그래. 혹시 기자한테 전화 오면 ‘우리 기범이는 말썽쟁이긴 했어도 심성은 참 착한 아이였어요.’라고 꼭 얘기해 줄게.]

[고마워요, 쌤.]

[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아니, 그거 말고요. 2학년 때요. 제가 사고 많이 쳐서 쌤도 엄청 고생하셨는데 저 안 미워하신 거요.]

[사고 찐하게 치면 가끔은 좀 미웠어. 근데 거의 대부분의 날들은 착하고 재밌는 학생이었어, 너.]


칭찬이 낯선 기범이가 쑥스러운 지 말을 돌렸다.


[쌤 저 나중에 성공하면 텔레비전에서 꼭 쌤 찾을게요.]

[성공하기 전이라도 괜찮으니 종종 소식 전해줘.]

[그럼 연락 끊겼던 척하고 텔레비전에서 샘 찾을게요.]

[그래라. 그 장단은 맞춰줄 수 있을 거 같다.]

[쌤, 또 연락드릴게요. 저 이제 밥 먹으러 가요.]

[응. 맛있는 거 먹어.]


스무 살의 일상이 얼마나 설레고 바쁜 지를 기억하는 은설은 또 연락하겠다는 기범의 말을 백 퍼센트 믿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의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느껴졌으므로 은설은 그것으로 기범을 돌보았던 시간들을 보상받는 듯했다.

기범이가

졸업을

했다.

“아우, 뿌듯해. 이 맛에 교사하지.”

은설은 문득 기범이의 졸업이 부러워졌다.

‘나도 무사히 졸업하고 싶네.’




12주 차까지 임신을 유지하면 난임센터에서의 모든 난임치료가 끝이 난다.

사람들은 이것을 ‘졸업’이라고 불렀다.

졸업을 하려면 앞으로 7주를 더 버텨내야 했고, 그것은 매주 병원에 갈 때마다 시험을 치르듯 보아야 하는 7번의 초음파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현준이를 볼 날이 7번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잖아.”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던 은설은 머리를 한 번 세차게 흔들고는 도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는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을 가리려 축 늘어뜨렸던 손을 들어 이마 위에 올렸다.

기범이와의 통화로 깰 대로 깨어 버린 잠은 아무리 빛을 가려도 다시 오지 않았다.

은설은 이미 12주 차의 진료를 시뮬레이션하는 중이었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를 써도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는 듯 머릿속의 상황이 그렇게 굴러갔다.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현준을 만나는.

쌍둥이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단 뜻으로 담당의인 현준에게 선물을 건네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어쩐지 어색했다.

현준과 자신 사이를 이해하려면 환자와 의사 사이를 넘어선 다른 단어가 필요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내내 무슨 사이로 지냈던 걸까?”

은설은 현준과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단어들을 떠올렸다.

중학교 동창?

옛 친구?

아니면 어릴 적 첫사랑?

"이게 궁금한 게 아니잖아, 이은설."

진짜 고민의 실체를 직시하려면 스스로에게 좀 더 솔직히 질문할 필요가 있었다.

‘현준이 얼굴 계속 보면서 살아가도 될까? 아니 아니. 이제 더는 만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현준은 아주아주 분명한 은설의 첫사랑이었다.

친구라는 명목을 대충 걸어두고, 어쭙잖이 만남을 이어가는 것은 현준에게도 준수에게도 예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준의 애틋한 첫사랑으로 오롯하게 남는 방법이라고 은설은 생각했다.

찬찬히, 현준과의 마지막 만남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은설의 가슴에 내려앉고 있었다.




“울렁거려.”

은설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진지한 생각을 너무 오래 해서 체했나? 아직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순간적으로 입안에 시큼한 침이 돌았다.

은설은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화장실로 냅다 달렸다.

“우웩!”

들은 게 없는 속은 요란한 소리만을 올려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을 더 웩웩거리고 나서야 은설의 속이 겨우 진정되었다.

“헉. 이것이 말로만 듣던 헛구역질인 건가?”

괴로움과 흥미로움이 뒤죽박죽 된 표정으로 은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머, 나 왜 이렇게 꺼치르르 하니?”

닦이는 것이 아닌 줄은 알지만 얼굴빛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려 은설이 세수를 했다.

빈 속을 몇 번이나 올린 탓인지 , 세수를 하고 머리를 다시 빗어도 은설의 모습은 초췌했다.

그리고 곧 땅밑으로 꺼져버릴 듯이 몸이 무거웠다.

“아, 뭐야. 방금 구역질했는데, 배고파.”

토악질을 한 바로 뒤인데도 입이 궁금했다.

뭐라도 입에 넣어야만 속이 진정된 것만 같아서 은설은 주방을 뒤졌다.

“웩. 뭐가 상했나? 뭐 때문에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방금 전, 냉장고를 열었을 때는 외려 괜찮았다.

그런데 변변히 들은 것도 없는 팬트리 장을 열었을 때는 다시 토악질이 날 만큼 역한 냄새가 밀려나왔다.

“웩. 이거네, 범인이. 우욱. 썩은 감기약 냄새 같아.”

은설이 코를 막고서 먹다 남은 크렌베리 파우치의 위치를 쓰레기통으로 안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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