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네 쌍둥이 가능성도 있겠는데요?"
"정말요?"
"현재는요. 여기 이게 제일 나중에 성숙된 난포. 그리고 그 옆에 하나. 반대쪽 난소에 또 비슷한 크기 둘이요.”
현준이 초음파 사진 위에 연필로 아주 살짝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네 쌍둥이는 저도 좀 부담스러운데.”
무슨 상상에 빠졌는지 은설이 눈빛을 흐린 채로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선 앞선 걱정을 해댔다.
“왜요?”
“형제, 자매가 넷 이상일 경우에 대한 경험치가 없어요. 미지의 상황이에요, 그건.”
“삼 형제인가 보죠?”
“삼 남매요. 언니, 오빠, 저.”
“임신이 되더라도 단태아일 확률이 90% 이상이니 너무 걱정은 말아요.”
"좀 전에는 네 쌍둥이라고 하시더니."
"가능성에 대한 얘기였죠. 어쨌거나 난포가 네 개가 자랐으니까."
"치이."
은설이 '치-'소리를 길게 빼며 섭섭한 티를 냈다. 그리곤 뾰로통해진 목소리로 아쉬울 것 없다는 듯이 현준에게 대거리 아닌 대거리를 했다.
“사실 배란통이 너무 심해서 쌍둥이 생각은 진작에 접었어요. 쪼끄만 세포 세 개 더 나오게 하는 것도 이렇게 아픈데 쌍둥이 출산은 엄두가 안 나요”
“많이 불편해요?”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는 아닌 거죠?”
“네 그 정도까지는······.”
“그럼 될 수 있으면 견디는 쪽으로 해보고, 정 힘들면 아세트아미노펜 계열 진통제를 드세요. 집에 상비약으로 있죠?”
“아! 네. 있어요, 그건. 클로미핀 먹고도 이 정도인데, 나중에 혹시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하게 되면 이것보다 훨씬 더 심하겠죠?”
“그렇죠. 아무래도. 훨씬 더 고용량의 약을 쓰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네요.”
“그전에 좋은 결과 있도록 같이 노력해 봅시다.”
같이 노력하자는 말로 은설을 위로했지만, 자연 임신을 보조해 주는 수준에서의 치료는 현준의 노력보다 운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눈에 봐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은설을 보며 현준은 안타까웠다. 다른 환자들에게 외쳐주던 파이팅이 은설에게만큼은 쉽사리 나오지가 않았다. 은설은 원인불명의 난임 환자이다. 지금의 남편이 아닌 자신과의 사이에서라면 이런 고생 없이도 아이를 만들 수 있었을 거라고 현준은 생각했다. 그때 그렇게 연락이 끊어지지 않았더라면, 아니 5년만 더 일찍 재회했더라면 지금쯤 세 살짜리 아이 하나를 두고 둘째를 언제쯤 가지면 좋을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딱히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도 현준은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따악.
“어머, 현준아! 피!”
부러진 연필의 날카로운 단면이 현준의 손가락에 상처를 내었다. 은설이 핸드백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재빠르게 현준의 손을 감쌌다.
“악.”
“아파? 가시라도 박혔나?”
은설이 현준의 상처에서 손을 살짝 떼니 피가 다시 울컥 솟았다.
“엄마야!”
“악”
잠깐 사이 눈썰미로 현준의 상처를 대강 짐작한 정간호사가 재빨리 안쪽 진료실로 들어갔다.
“많이 아파? 손가락 부러진 거 아닌가.”
“아니야. 네가 너무 세게 잡아서 아픈 거야.”
“지혈해야지.”
“그 정도로 세게 잡지 않아도 돼.”
“그래?”
은설이 현준의 상처에서 손을 뗄지 말지를 고민하는 사이 정간호사가 소독약과 거즈를 챙겨 왔다.
“선생님, 아침부터 이게 웬일이래요.”
“그러게요. 이은설 씨 이제 좀 놔주세요”
“아! 네, 선생님.”
은설이 현준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던 손수건에서 손을 떼었다. 피로 얼룩진 손수건을 들추고, 그제야 현준은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살폈다.
“어머, 어떡해. 피 좀 봐.”
지켜보고 있던 은설이 사색이 된 사이, 현준과 정간호사는 태연하고 재빠르게 상처를 소독했다.
“되게 깊은 상처는 아닌 거 같은데요.”
“네. 그냥 긁힌 정도예요. 거즈 좀 주세요.”
현준과 정간호사가 손발을 맞추니 30초도 안된 사이에 현준의 상처 치료가 완료되었다.
“환자 앞에 두고 소란을 떨었네요. 미안해요, 이은설 씨.”
현준이 매무새를 정리하며 은설에게 정식으로 사과하는 말을 했다.
“아녜요. 미안은 무슨. 근데 선생님 힘 엄청 세 신가 봐요. 연필이 다 부러지다니. 조심하셔야겠어요. 손을 아껴야죠, 의사 선생님인데.”
은설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현준을 자분자분 다그쳤고, 현준은 싫은 내색 없이 은설의 짧은 잔소리를 들었다.
“오늘 진료는 제가 이은설 씨한테 혼나는 걸로 끝이 났네요.”
“선생님도 저 혼내시잖아요.”
“제가요?”
“쌍둥이 바란다고 뭐라 하셨던 거 생각 안 나세요?”
“아···”
다음번 진료 때는 선생님이 싫어하는 쌍둥이 소식을 가지고 오겠다며 으름장을 놓으면서 은설이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은설이 나가고 나서, 정간호사는 바로 다음번 환자를 들이지 않고 현준에게로 갔다.
“선생님 손가락 괜찮으세요? 잠깐 진료 멈출까요?”
“아녜요. 충분히 처치했어요.”
“저······, 선생님?”
“네?”
“근데 아까 이은설 환자가 선생님 이름 부르지 않았어요?”
“에이, 설마.”
“아까 ‘현준아’하고 선생님 이름 부른 것 제가 똑똑히 들었는데?”
“환자가 의사 이름을 그렇게 막······, 그렇게 부르고······, 그럴 리가요. 하하.”
“이상하다. 분명히 들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간호사에게 결국 현준은 은설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에이, 선생님. 그게 뭐가 비밀거리라고.”
정간호사가 통 크게 웃으며 재밌어했다.
“진료실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나시다니.”
“진짜 진료 다 보고 나서 알았어요.”
“미리 알았으면 뭐 어떤가요.”
“불필요한 소문에 휘말리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걱정 붙들어 매 두세요. 선생님이 불편해하시니 저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렵니다.”
“고마워요.”
“아우, 근데 우리 쌤 너무 귀여우시다.”
“네?”
“중학교 때 여자친구 만났다고 남들 보는 앞에서 내외를 다 하시고. 호호호”
현준은 정간호사가 말한 ‘여자친구’가 친구의 성별만을 말한 것인지, 연인 사이였던 것을 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렇다고 정확히 무얼 뜻하고 ‘여자친구’라는 말을 한 것이냐며 캐묻기도 민망하여 현준은 더 이상 말을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