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무욕의 현자처럼(2)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오래간만에 시키는 야식에 들뜬 준수가 거실을 서성이며 주문전화를 했다.

그동안 은설은 소파 깊숙이 몸을 뉘이며 ‘무욕의 현자’에 대해 생각했다.

‘현자타임하고 비슷한 상태인 건가, 내가?’




언젠가 준수가 설명을 해준 적이 있었다.

불같이 활활 타올랐던 사랑 뒤에 필연적으로 뒤따라 오는 무욕의 시간.

은설은 그것을 '절대고독의 시간'이라 했고, 준수는 '현자타임'이라고 했다.

관계 뒤의 여운을 나긋한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로 이어가고 싶은 은설과는 달리 준수는 늘 10분 안에 곯아떨어져 버리곤 했다.

그나마 그 10분도 잠들지 않으려는 노력에 노력을 더한 끝에 겨우 버텨낸 것이었다.

신혼생활이 백일 언저리를 채워갈 무렵 , 은설은 소주와 고기 한 판을 사이에 두고서 '현자타임'에 대한 불만을 준수에게 진지하게 토로한 적이 있었다.

“원래 그래. 순간적으로 잠이 막 쏟아진다고.”

“영화에선 주인공들이 막 밤새도록 불타던데.”

“SF영화에서 그래? 남자주인공이 사이보그였어?”

“아니. 크크크큭. SF영화래. 아 웃겨.”

“진짜 영혼에서까지 피지컬을 박박 긁어가지고 한순간에 쏟아붓는 거라니까. 그러고 나면 뇌가 알아서 좀 자라고 신호를 보내는 거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이론인 거예요?”

“몰라요.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공감하는 바이지. 한 30분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쉬고만 싶어. 세상만사 다 부질없게 느껴지고. 이 시간을 우리는 현자타임이라고 부르지.”

“준수씨네 동네에서만 쓰는 용어 아냐?”

“여자들이 생리를 매직이라고 부르는 거랑 비슷할걸. 그것도 전국적인 용어 아닌가?”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암튼 난 그 시간이 엄청 섭섭해. 절대고독이라는 감정이 뭔지 그때 알았다니까. 진짜 씹다 버려진 껌이 된 기분이야.”

'버려진 껌'이라는 은설의 말에 머쓱해진 준수가 은설을 좀 더 이해시킬 있는 설명을 하려 애를 썼다.

“그 시간을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는데. 그냥 뭐랄까. 모든 욕구가 다 사라진 시간이랄까. 있다면 오직 수면욕뿐?”

“그 말은 나에 대한 욕구도 사라진단 말이잖아. 사랑이고 뭐고, 마누라고 자시고 간에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다. 딱 그 말이잖아.”

“자기는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고이 넣어두지. 30분 있다가 꺼내보려고.”

“넣어 두지 마. 꺼내 놔.”

“노력은 해볼게요.”




그렇게 말하고도 준수는 여전히 현자타임엔 쪽잠을 잤다.

준수는 요즘 은설의 상태가 딱 현자타임 중의 자신과 같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은설도 준수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은설 스스로 느끼기에도 준수와 관계를 갖는 일에 대한 욕구가 부쩍 사라진 상태였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관계를 갖고는 있지만 말 그대로 숙제하듯 해치우는 날이 잦았다.

최근 몇 달은 임신이 될 확률이 높은 주간과 현준이 지정한 숙제 날짜에 맞춰 한 달이면 일주일 상간으로 몰아치듯 해댔다.

'내가 변한 게 맞긴 맞지.'

본격적으로 임신을 준비하던 초창기에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신혼부부의 관계 횟수를 들먹이며 더 많이 사랑을 나누지 못해 불만인 양 이야기하던 은설이었다.

그러나 신혼이 거의 다 지나간 탓인지, 혹은 임신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꾸준히 지속적으로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인지 요즘은 그다지 흥미로울 것도 궁금한 것도 없었다.

'더 하고 싶은 것도, 더 해볼 것도 없었긴 하지.'

준수가 우려했던 대로 준수와 사랑을 나누는 일이 그저 말 그대로의 ‘숙제’가 된 것만 같았다.

준수에겐 미안 하지만,

은설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혹시 현준이 때문일까?’

은설은 잠시 스스로를 의심해 보았다.

그리고 자신만 아는 죄책감을 무릅써가며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의 외설스런 상상을 시작했다.

[집에 데려다준댔잖아!]

일단은 현준에게 앙탈을 부리면서도 음탕한 눈빛을 흘리는 내 모습부터.

[아직도 그렇게 순진한 척 하기야? 애초에 차를 타지 말았어야지, 그럼.]

늑대 같은 웃음을 지으며 현준이 스포츠카를 고속도로로 올리는 거지.

동해쯤?

그래, 그쯤 갔다 치자.

뷰가 탁 트인 멋들어진 스위트룸.

아냐.

좀 더 자극적으로 가보자.

고속도로 갓길.

차 안?

아냐.

갓길은 위험해서 집중이 안 될 거 같아.

한적한 숲 속?

모기는···

모기가 다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상상 속인데.

[이은설. 우리 솔직해지자.]

[뭘? 웁!]

현준이가 날 덮치는 거야.

아니, 내가 덮칠까?

[은설ㅇ.. 웁!]

[유부녀를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이쯤은 각오해야지!]

‘아. 유치해. 3류 드라마도 이보단 낫겠네. 다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어.’

상상 속에서 은설은 현준의 입술을 깨물었다.

현준이 은설의 목덜미를 핥으며 점점 더 아래로 아래로······

페이드 아웃.




‘응? 다시’

은설의 젖가슴께를 파고드는 현준의 얼굴이······

페이드 아웃.



‘뭐야. 다시!’

현준의 벨트를 풀어헤치며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은설의 오른손이······

페이드 아웃.




“상상하기도 귀찮은 거야?”

14살 목화솜처럼 뽀송뽀송하던 시절의 추억을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탓도 있긴 했다.

하지만 준수가 아닌 현준과의 외설스런 상상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은설은 몸도 마음도 좀처럼 동하지가 않았다.

“진짜로 지친 건가?”

은설이 그대로 소파 위에 몸을 떨구었다.

몸을 모로 세워 누운 은설의 시야에 배달온 야식을 신나게 받아 들고 들어오는 준수가 들어왔다.

“나한테 뭐라고 했어?”

준수가 소반 위에 족발꾸러미를 풀러 놓으며 정수리에 입이 달린 사람처럼 은설을 향해 말했다.

“아니. 그냥 혼잣말이 좀 나왔어.”

“신랑 옆에 두고 왜 혼잣말을 하고 그래. 어서 이리 와 앉아요.”

나무젓가락을 비벼대며 준수는 근간에 본 것 중에 가장 환한 웃음을 족발에게 지어 보이고 있었다.

“먼저 먹어요. 난 좀 더 누워있고 싶네.”

은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금식에 들어간 사람처럼 맑은 눈빛으로 족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먹다 발동 걸리면 은설 씨 것 안 남길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준수 씨 혼자 다 먹어도 돼."

아무것도 욕심부리지 않은 한 달이 또 지났다.

클로미핀은 하룻저녁의 복시만을 선사하고 얌전히 제 역할을 해냈다.

은설이 유일하게 부리고 있는 과배란 욕심은 제법 그럴듯한 4개의 난자로 넉넉히 채워졌지만,

거의 모든 욕구를 차단하다시피 해가며 집중한 단 하나의 욕망이었던 임신은.

이 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62. 무욕의 현자처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