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올해는 추석이 참 이르지? 덥다 더워.”
이런저런 선물꾸러미까지 짊어진 준수가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지하철역 계단을 올랐다.
준수보다 한 두 계단 위를 걷던 은설이 준수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어머니 화장품세트 들어 있는 쇼핑백 하나 나 줘요.”
“아냐 5분만 걸으면 집인데 뭐. 끝까지 내가 다 들고 생색낼 거야. 아, 왜 우리 집 쪽 출구엔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거야!”
준수가 버거운 숨을 쉭쉭 내뱉으면서도 짐을 나누어 드는 것을 굳이 거부했다.
힘들어하고는 있지만 오래간만에 본가로 복귀한 준수의 목소리 톤이 밝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얼굴은 싱글싱글 웃고 있네. 그렇게 좋으면서 왜 안 간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영수 새끼 보기 싫어서.”
“아직 마음이 안 풀린 거야?”
“영원히 안 풀 거야.”
“거짓말.”
“진짠지 거짓말인지 두고 봐요, 한번.”
“그러지 마요. 지금 미운 거 애써 풀라고는 안 할게. 근데 일부러 오래 미워하려고 하진 마요.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최고야.”
“마음 가는 대로 영원히 미워할 거야.”
“그럼 그러든가.”
그러라는 은설의 말에 준수가 고개를 돌려 은설을 바라봤다.
빈정대는 것이 아니었다.
평온하기만 한 은설의 표정에 흔들리는 쪽은 오히려 준수였다.
준수가 미운 7살처럼 위악을 떨었다.
“그 새끼 이번 명절에 집에 오지 말라 그러라고 할 거야. 얼굴 보면 한 대 칠 거 같아.”
쇼핑백 두 개를 겹쳐 쥔 오른손으로 '휙휙'하며 잽을 날리는 시늉을 하다가 준수가 그만 쇼핑백 모서리로 은설의 눈가를 쳤다.
“악!”
“히익!”
은설은 일부러 더 괴로운 내색을 하며 길에 주저앉았다.
“마누라, 미안해요.”
그제야 제 모습으로 돌아온 준수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은설의 얼굴을 살폈다.
“마누라 손 좀······. 손 좀 치워봐요.”
“건들지 마. 아파.”
“눈 맞았어?”
“아슬아슬하게 비꼈어.”
“다행이다, 눈 안 맞아서.”
“아우, 아파!”
“미안해요.”
“적당히 좀 하지.”
“쏘리.”
“집에 가서 부모님 앞에서도 이럴 거야? 그러기만 해! 지금 것까지 합해서 나도 확!”
“알았어요. 안 그럴게.”
그제야 은설이 앉은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명절 앞두고 부모님 마음 불편하게 하지 마요.”
“몰라, 상황 봐서. 나는 불효자식이니까 너무 기대는 마요. 나도 마음 불편한데 애써 내려온 거라고.”
“에휴, 마음 불편하게 만든 내 죄가 크다 커.”
“누가 은설 씨 탓 이래? 영수 탓이라니까. 그리고 애는 뭐 혼자 만드나. 셋이 만들지.”
“셋?”
은설은 현준을 떠올렸다.
난임 치료 과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준수 입장에선 병원을 계속 다니고 있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을 의사의 탓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제대로 만나 진료를 받아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준수에게 현준에 대한 불신부터 쌓이는 것은 아닌지 슬금슬금 걱정이 차올랐다.
“응. 셋이지. 나, 은설 씨, 삼신할머니.”
“아. 아아~ 삼신할머니이!”
“울 엄마는 아직도 자식들 생일 때마다 밥하고 미역국 떠놓고 삼신할머니한테 기도할걸?”
“10살 넘으면 칠성신한테 빌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 몰라. 엄마가 알아서 빌고 있겠지.”
“대학교 2학년 때 구비답사 가서 처음으로 칠성당을 봤는데. 그때 참, 우리 조 구성원이 어땠는 줄 알아? 학번으로 잘라서 다 이 씨였는데······.”
적당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꼬리를 돌려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은설이 소싯적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슬그머니 준수의 손에 헐겁게 들려 있는 쇼핑백을 빼내었다.
‘칠성당’에 대해선 아는 바도 관심도 전혀 없었지만, 준수도 은설이 하는 이야기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가며 다시 걸음을 떼었다.
“하이고, 먼 길 오느라 애썼데이.”
양말바람으로 현관 너머까지 나온 시어머니가 은설과 준수의 손에서 짐부터 받아 들었다.
“이기 다 뭐고? 선물 사왔나? 무거운데 그냥 오지.”
“명절에 자식들이 빈손으로 오면 섭섭다 안 카나. 별 거 아이다. 회사에서 선물 나눠준 거 들고 왔다. 진짜 우리 선물은 용돈이지. 은설 씨!”
“네!”
준수의 재촉에 은설이 짐을 풀다 말고 손가방에서 용돈봉투부터 꺼내었다.
“아버님, 어머님 연휴 즐겁게 보내시는데 보태 주세요.”
“하이고, 이런 거 안 줘도 된다. 느그들 대출 갚고 저축하고 그러는데 보태지.”
“매번 드리는 것도 아닌데요, 뭐. 별로 많이도 못 넣었어요. 명절이나 생신 때 겨우 챙겨드리는 건데 받아 주세요.”
때마다 반복하는 멘트였다.
시어머니는 늘 같은 말로 용돈을 사양했고, 은설도 매번 같은 말로 간곡히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 시어머니가 더는 사양을 못하고 미안한 듯 받아 드는 시추에이션.
“뭘 그렇게 복잡게 받노. 고맙데이. 잘 쓰마.”
시아버지가 ‘고맙다’는 한 마디를 시원하게 건네며 용돈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은설은 시아버지의 스타일이 자신과 좀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엄마, 그렇게 받는 거 옛날 방식이다. 그냥 아부지처럼 시원하게 받아라, 마.”
준수가 눈치 없이 시어머니를 타박했다.
“그기 인사로 하는 말이 아이고, 엄마 마음이 진짜로 그렇다.”
시어머니가 속 모르고 떠드는 아들내미에게 섭섭한 듯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설도 시어머니의 말이 100퍼센트 인사치레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늘 자식 걱정을 많이 하는 시어머니는 정말로 준수와 은설의 대출과 저축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 이거······. 받아주세요.”
은설이 웃으며 시어머니를 한번 더 재촉했다.
“응? 아, 그래. 고맙데이.”
시어머니는 그제야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아지매들하고 밥 사 묵고 그럴 때 써라. 자슥이 명절에 용돈 줬다고 자랑도 하고 그래야지.”
준수가 마치 기 백만 원쯤은 되는 돈이라도 봉투에 넣은 것처럼 생색을 냈다.
“많이는 못 넣었어요. 가을에 아주머니들하고 당일치기 나들이 한번 정도 다녀오실 수 있을 거예요.”
“아까워서 우찌 그리 쓰노. 느그 가져갈 오뎅도 사고 반찬도 만들고 그럴 때 쓰께.”
“쓸데없이 뭐 싸줄 생각 마라. 우리 둘 다 바빠서 집에선 자주 해먹지도 않는다. 아부지. 참, 저번에 뭐 고장 났다고 그러지 않아쓰요? 아직 못 고쳤제? 함 봐보자. 우짜다가 또 고장을 냈노.”
퉁명스럽게 말할 때가 많았어도 준수는 살가운 편에 속하는 아들이었다.
간만의 복귀였고, 자주 오지 못하는 본가였다.
머무는 동안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해결해 놓고 갈 생각인지 준수가 이것저것 고장 난 것들부터 찾아댔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내내 했던 걱정과는 달리 여느 명절과 다름없는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명리학 책을 꺼내 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