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무욕의 현자처럼(1)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페마린으로 만들어진 질 좋은 난자는 결국 아기가 되지 못했다.

기대가 크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 또한 작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괜찮을 줄 알았던 마음이 이 달도 어김없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끼며, 은설은 매달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도 좀처럼 무뎌지지 않는 자신의 감정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 난감했다.

“하아···..”

폐포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이 길게 늘어졌고, 입김이 지갑을 꺼내든 은설의 손까지 닿았다.




늦은 장맛비가 쉼 없이 사흘째 내리고 있는 아침은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서늘하고 쓸쓸했다.

현준에게서 다시 처방받은 클로미핀을 지갑 깊숙이 넣고 나서 은설은 따뜻한 차라도 한 잔 사들고 가려다가 이내 발길을 주차장으로 돌렸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데······.”

조회시간을 5분 남기고 도착한 교무실이 시끌벅적했다.

“샘, 샘도 이거 사!”

은설을 보자마자 김 선생이 어서 와서 이것 좀 보라는 손짓을 해댔다.

“뭔데요?”

“에스테틱리더 나이트리페어 에센스. 공구 떴는데 가격 완전 대박이야.”

“아아.”

“얼른 와. 우리 거 한꺼번에 주문 넣을 거야.”

“전 됐어요. 아직 쓰던 게 많이 남아 있어요.”

“쟁여 두지. 한 병 쓰는데 석 달도 채 안 걸리는데.”

“제가 쟁여두고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전 다음에 살게요.”

“그래? 그래 그럼.”

은설의 의중을 파악한 김 선생이 쿨하게 은설을 놓아주었다.

한데 모여 북적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은설은 조금 일찍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도 기범이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탐색 중인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뭐 하니, 니들?”

“기범이 새로 나온 유폰엑스 샀어요.”

“그게 벌써 풀렸어?”

“예약판매 시작하자마자 예약 걸었었어요.”

새로 장만한 휴대전화를 한창 자랑 중이던 기범이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폰 받았을 때 엄청 좋았겠네. 근데 웬만하면 학교엔 그거 들고 오지 마. 내가 무진장 부담스러워. 자 다들 휴대전화 제출 준비! 샘 지나가면 자기 번호칸에 넣어라. 엉뚱한 데 꽂아두기 없기! 기범이는 휴지로 둘둘 말아서 새 폰에 스크래치 날 염려 없도록 만들어서 내고.”

아침마다 수거용 가방을 들고 교실을 순회하며 휴대전화를 걷는 일이 조회 시간 중 가장 큰 일이었다.

스무 대가 넘는 휴대전화를 걷고 나면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무게도 무게지만 다 합하면 기천만원이 훌쩍 넘는 귀중품을 맡아 종일 보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가져오지 않았다느니, 오늘은 안 내면 안되냐느니 하며 매일 아이들과 벌이는 실랑이도 아침부터 은설의 진을 쏙 빼곤 했다.

“샘, 오늘은 저 안 내면 안 돼요? 새 폰이라 제가 보관을 하는 게······.”

“새 폰이니까 더더욱 제출해야지. 내가 이 길로 교무실로 내려가서 캐비닛에 넣고 자물쇠로 잠가 버릴 거야. 분실 걱정 없도록.”

기범이는 고집이 센 편이 아니었다.

입이 석 자 정도 나오긴 했지만 반항기 없는 손동작으로 수거가방 안에 조심스레 자신의 새 폰을 넣으며 한 두 마디 투덜거릴 뿐이었다.


“샘도 폰 좀 바꾸세요. 샘 꺼 저희 초등학생 때 나온 거던데. 샘이 폰을 바꿔보셔야 우리 마음을 이해하실 텐데.”

“응. 일리 있는 말이지만 아직 계획이 없어. 고장이 안 났거든.”

“누가 폰을 고장 나서 바꿔요. 약정 끝나면 바꾸지.”

“나. 고장 나야 바꾸는 사람 지금 니 눈앞에 있다.”

“샘 진짜 흥부고집.”

“흥부고집? 옹고집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자린고비라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생각 안 나서 흥부고집이라고 한 거야?”

“아! 자린고비!”

이 정도면 기분 좋게 웃으며 넘겨줄만한 투정이었다.

우울했던 은설의 아침이 외려 기범이와의 실랑이 덕분에 조금 생기를 되찾은 듯했다.

휴대전화 수거용 가방을 교무실 캐비닛 안에 넣고 부랴부랴 1교시 수업을 하러 다시 교무실을 나서려는데 은설의 슬리퍼 바닥이 투둑 하고 두 갈래로 갈라졌다.

“설마 그것도 고쳐 신게?”

은설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김 선생이 은설을 앞지르며 물었다.

“이건 새로 사려고요.”

은설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걸을 때마다 '투덕투덕' 소리가 나는 슬리퍼를 끌면서 복도를 걷는 동안 은설은 한동안 자신이 아무것도 사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마트도 가고, 때마다 선물도 사서 챙기고, 또 생필품을 이것저것 사니까 온전히 ‘내 것’에 해당하는 것은 몇 달째 산 게 없다는 걸 몰랐네.’

난임 병원에 다니느라 드는 비용을 용돈에서 해결하고 있긴 했다.

돈 들어갈 일들이 많아지니 무의식 중에 소비가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줄여가며 돈을 모아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다만, 난임치료에 온 정신을 쏟기 시작한 후로 은설은 부쩍 욕구가 사라지고 있었다.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딱히 필요한 물건도 없었다.

바꿀 때가 지난 것들이 몇 있긴 하지만 조금 더 쓴다고 해서 큰일이 날 것도 아닌데 애써 바꾸는 것도 귀찮았다.

딱 그런 마음.

“그래서 좀 창피했어. 애들한테 뿐만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까지 나를 자린고비로 보고 있는 거 같아서.”

“그럼 뭘 좀 사.”

“필요도 없는 데 뭐 하려고.”

“자린고비 이미지 탈피하려고. 자 이걸로 연습해 봐요.”

야식이 먹고 싶다며 동네 쿠폰북을 뒤적이던 준수가 은설에게 보던 것을 넘겼다.

“준수 씨 먹고 싶은 거 시켜요. 난 뭐 별로 당기는 게 없어. 아무거나 시켜도 군말 없이 먹을 게.”

“그럼 살 안 찌게 족발.”

“안 먹는 게 살은 제일 안 쪄요.”

“배가 출출한데 어떡해, 그럼.”

“가만히 있으면 안 배고파. 저녁도 먹었잖아. 그냥 출출한 기분인 거예요.”

“치, 그럼 아이스크림? 요즘 패밀리사이즈 이상 사면 쿨링팩 공짜로 준다던데.”




“받아 봐야 안 쓴다에 한표. 그냥 필요 없는 짐이 집에 하나 더 늘 뿐일걸요.”

“뭐야, 군말 없이 먹겠다더니.”

“그러게. 쏘리. 근데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건 그래. 우리 마누라 요새 무욕의 현자가 된 거 같아.”

“응? 뭐라고?”

“무욕의 현자. 세상만사 다 부질없다는 걸 깨닫고 아무런 욕구 없이 사는 사람이 된 거 같다고. 법정스님처럼.”

“내 장래희망 중에 하나가 법정스님처럼 사는 거긴 하지만 아직 그 정도 경지까진 못 갔어요. 지금 마음이 족발에 기울었어.”

은설이 반쯤 소파에 누운 자세로 손가락을 까딱이며 족발사진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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