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
저녁식사를 일찍 한 편인데도 동네에는 벌써 어둑하게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추워. 이거 마지막 부분이 샤베트라 그런가 먹으니까 좀 춥다.”
은설이 준수의 폭신한 팔뚝을 꼬옥 껴안았다.
준수가 은설이 낀 팔짱을 풀고 은설의 어깨 위로 자신의 팔을 감았다.
“이게 더 따습지.”
은설이 가만히 준수의 팔뚝 무게를 견뎠다.
“누르지는 마, 준수 씨.”
“왜? 난 편한데. 높이도 딱 좋아.”
“자꾸 누르면 깨문다.”
그래도 준수가 장난을 멈추지 않자 은설이 깨무는 시늉을 하며 준수의 팔을 공격했다.
재빠르게 팔뚝을 피신시키고 은설의 눈치를 살피더니 준수가 코를 찡긋거리며 은설에게 도로 팔뚝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알았어. 안 할게. 안 할게. 다시 이리로 와.”
은설이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준수의 손짓에 순순히 따랐다.
이번엔 확실히 팔뚝이 가벼웠다.
한참이나 동네 산책을 하며 은설과 준수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에서 일어난 우스꽝스러운 사건이라든가, 모두 다 눈치채고 있는 사내 비밀 연애 이야기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을 나누며 둘은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행복하다.”
“은설 씨는 이러고 노는 게 제일 행복해?”
“응! 선선한 바람맞으면서 산책하고 수다 떠는 거. 저녁마다 운동삼아 손잡고 동네 공원 걷는 노부부가 제일 부러워. 그 나이까지 다정히 지내는 거잖아.”
“손 잡고 걸으면 운동은 안 될 텐데.”
“그게 중요한가. 준수 씨는 언제가 제일 행복해?”
“거실에서 은설 씨랑 TV 보면서 수박 잘라먹을 때.”
“오, 생각만 해도 행복한 장면이네.”
“수박이 맛있어야 돼. 그게 젤 중요해.”
“하하, 그러게.”
둘은 또 한참을 웃어댔다.
은설은 마음에 실크 스카프를 두른 듯했다.
가볍고, 보드라우면서도, 따뜻했다.
이러한 감정의 순간을 온전히 공유하고 있는 준수가 유난히 사랑스러워 보이는 밤이었다.
“행복이 참 별 게 아닌데 말이야. 그치, 은설 씨?”
“그러게요. 그르네, 참.”
“아기 없어도 우리 둘이서 이렇게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 얘긴 왜······.”
“은설 씨가 간절히 바라니까 나도 진짜 최선을 다해서 협조할 거긴 하지만, 혹시 인공수정 하는 거 잘 안되더라도. 그래도 괜찮다는 얘기 하는 거야."
"······."
그거랑 우리 행복이랑은 별개니까. 근데 혹시나 시술 결과가 마음에 들게 안 나오면, 은설 씨가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슬퍼하고 그럴까 봐 걱정되어서 그래.”
은설은 준수의 걱정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만큼은 준수를 걱정시키거나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 당연하지. 아기 없어도 우리 둘이는 행복하게 잘 살 거야, 아마. 아무 때나 놀자 하면 같이 놀아주고 먹자 하면 같이 밥 먹어주는 이런 베프가 또 어딨어. 하하.”
‘우리 둘이는 행복’이란 은설의 말에 준수의 자신감이 한껏 치솟았다.
준수가 저도 모르게 현준과 자신을 비교하는 말을 했다.
“아, 이거 의사 이혼남보다 내가 더 나은 인생이구만. 은설 씨 그 중학교 동창 좀 불쌍하다."
"왜?"
"돈 많고 의사면 뭐 해. 이런 여우랑 토끼를 짬뽕한 것 같은 이쁜 마누라가 내 마누란데.”
“뜬금없기는. 근데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해요?”
“몰라요. 그냥 아까 좀 쫄리는 기분이 들었어서 그런가 봐. 어떻게든 막 그 의사친구를 이기고 싶네.”
“나랑 결혼한 게 준수씨니까 준수 씨가 이긴 거라는 거예요, 지금?”
“응. 당연하지. 내가 이긴 거지.”
“치, 그래요. 준수 씨가 이긴 거라고 하고. 탕탕탕! 망치 때렸어!”
“오예!”
철없는 체를 하며 신난다는 시늉을 하고 있는 준수를 보면서 은설은 미안했다.
은설도 알고 있었다.
준수가 현준의 마음을 알아채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하는 은설의 마음 역시 알고 있다는 것을.
‘손대지 마시오.’
오래된 유적 앞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표지판이 은설은 지금 현준과 준수 그리고 자신 앞에 놓여있는 것만 같았다.
아는 체를 하는 순간 꼬이기 시작할 것이 분명한 마음들.
그러니 제발 건드리지 마시오.
현준도, 은설도, 준수도 당장은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며 서로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매듭을 풀어낼 시간을 벌고 있는지도 몰랐다.
‘세상 모든 애정사에 필요한 양념’은 쓴 맛도 나는 것임을 수지는 어째서 알려주지 않을 걸까? 나쁜 기지배.’
은설은 현준에게 진료받을 것을 부추긴 수지를 괜스레 원망했다.
“정간호사, 10분만 휴진할게요. 밖에 안내 좀 부탁해요.”
현준의 말에 정간호사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안쪽 진료실 쪽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나온 사람은 미주였다.
“본가에서 연락받았죠?”
미주가 현준의 책상 앞 환자석에 앉으며 물었다.
“아버님께서 직접 연락하셨어.”
“아빠가?”
“응”
“걱정이 많이 되긴 되나 보네, 울 아빠.”
“하나밖에 없는 딸의 건강 문제인데 당연히······.”
현준의 어쭙잖은 위로에 미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현준이 조금 망설이다가 미주에게 물었다.
“하나 물을 게. 어째서 아버님이 미주를 내게 보내신 거지? 그쪽 병원에도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는 많잖아.”
“못 믿는 거지, 뭐.”
미주가 낮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적이 많잖아요, 아빠가. 소문 나서 좋을 게 없으니까. 최대한 비밀 지켜줄 수 있는 곳으로 보낸 거야."
"······."
"병원 사람 아무도 몰라, 아직. 아, 김명환 센터장님만. 그분은 아버지 최측근이니까. 초진 기록도 남기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어.”
“나는 믿을 수 있으시고?”
“하하, 선배는 증명을 했잖아요. 병원 어느 것에도 욕심이 없는 걸. 나랑 이혼하고 병원 박차고 나왔잖아.”
“그렇네.”
“여기 원장님도 아빠랑 막역한 사이이시니까. 눈에 안 띄게 치료받을 수 있는 믿을 만한 곳을 찾으신 거지, 뭐.”
“······.”
미주가 남들 모르게 현준에게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현준도 잘 알고 있었다.
현준과의 이혼 이후 미주는 그들만의 선 시장에 내놓아진 상태였다.
현준은 지난번 만남에서 미주가 우스개처럼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해 봤자 별 거 없지 않으냐고 물으시니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요. 암튼 그렇게 해서 매물로 나오게 됐어요. 요즘 자금이 좀 달리나 봐, 울 아버지.”
미주는 형석에게 선보러 나갔을 때 어색하지 않게 차이는 법을 물었었다.
형석이 하는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조언을 들으며 시시덕거릴 때만 해도, 그 누구도 미주에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