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
“조직검사를 해봐야겠어.”
현준의 말에 미주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믿을만한 사람인가요?”
“응. 미리 잘 말해두면. 섣부르게 선을 넘는 사람은 아냐.”
“그럼 잘 부탁해요. 계속 이렇게 진료받을 때마다 내쫓을 순 없잖아.”
“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마.”
“아, 그나저나 울 아빠 어쩌나. 계획했던 게 다 어그러져서 노심초사하시겠네. 사실 나 담주에 성진그룹 둘째 아들하고 선보기로 했거든요.”
“그랬어?”
예상 보다 조금 더 빠른 미주의 선 소식에 현준의 미간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거기도 이혼남이래요. 나랑 조건이 잘 맞는 몇 안 되는 재벌가 자제라며 아빠가 굉장히 기대했는데. 근데 뭐 일단은 물 건너 간 걸로."
"······."
"이런 상태에서 함부로 선부터 봤다간 더 큰 문제가 생길 테니 말이에요. 힛.”
미주가 실없이 웃었다.
“아직 몰라. 검사 결과 나와봐야 확실히······.”
“의사끼리 왜 그래요. 다 아는 사이에.”
미주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눙을 쳤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를 하는 미주의 모습이 현준의 눈에 안쓰럽게 박혔다.
“어머, 십 분 지났네. 우리 정간호사님 당황하시면 안 되지. 또 봐요, 선배.”
미주가 생긋 웃으며 총총히 진료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폴리트립 75IU······. ”
은설은 식탁 의자에 앉아 주사가 든 케이스를 들고 30분째 씨름 중이었다.
상자에 적혀 있는 깨알 같은 글씨들을 몇 번이나 정독한 뒤에야 비로소 은설이 주사제의 종이 케이스를 뜯었다.
주사제와 알코올솜을 가지런히 세팅해 놓고 마음을 가다듬는데 막 잠에서 깬 준수가 흐느적거리며 은설에게 다가와 물었다.
“뭐 해?”
“배주사 놓는 날이야.”
느리게 물을 따라 마시던 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컵에 담긴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와!”
“‘와’라니. ‘와’는 무슨.”
주사를 앞에 두고 긴장한 은설이 준수가 내뱉은 감탄사에 짧게 짜증을 냈다.
“다 했어?”
“아니. 이제 하려고.”
“내가 대신 해줄까? 못 하겠으면 신랑이 도와줄게요.”
“내가 할래. 이런 건 초장에 극복을 해야지. 맨날 다른 사람 손 빌릴 수도 없는데.”
준수가 아쉽다는 듯 입을 한 번 쩍 다시며 은설로부터 한 걸음쯤 물러나 있는 곳으로 의자를 빼서 앉았다.
준수와 이야기를 하다가 타이밍을 놓친 손이 은설의 배 위에서 우왕좌왕했다.
“후-.”
은설은 다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알코올솜부터 뜯었다.
“오, 떨려. ”
준수가 옆에서 은설보다 더 호들갑을 떨었다.
준수를 못 본 체하며 은설이 주사제를 들어 바늘이 감싸져 있는 캡을 뜯었다.
“바늘! 오, 생각보다 가늘고 짧네. 많이 아프진 않겠다.”
준수의 짧은 외침에 움찔했던 은설이 준수를 한 번 째려보곤 다시 주사 놓기에 집중했다.
‘배꼽 아래 좌우 5cm 정도 되는 위치면 여기.'
은설이 뱃살을 한 줌 크게 움켜쥐고 꼬집듯 힘껏 눌렀다.
‘직각으로.’
“흐아아아, 들어간 다아!”
“아, 준수 씨! 쫌! 조용히 좀 해!!!”
“미안.”
울컥 화를 내는 은설에게 준수가 급히 사과를 하며 두 걸음 물러났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 중인데 자꾸 신경 쓰이게 그러지 마. 내가 장난하는 거 아니잖아, 지금.”
은설이 정색한 얼굴로 준수를 나무랐다.
찌를 타이밍을 놓친 은설이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 씨. 시간 지났네. 7시 정각에 맞아야 하는데.”
“1~2분은 괜찮아.”
“준수 씨 때문에 시간을 놓친 거잖아요.”
“미안.”
은설이 다시 알코올솜 하나를 새로 뜯었다.
알코올이 빠르게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뱃살을 꼭 움켜잡고, 직각으로, 툭.
어찌나 세게 뱃살을 꼬집었는지 바늘이 들어가는 고통은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직접 주사를 놓아서 그런지 피부를 뚫고 피하지방층 사이로 약이 퍼지는 느낌이 더 생생히 느껴졌다.
“됐다.”
은설이 무심하고 재빠르게 바늘을 빼며 혼잣말을 했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세 번 쳐주었다.
“큰 산 하나 넘었네, 은설 씨.”
“그러게요.”
“주사 놓는 느낌이 어때요?”
“묘해요.”
“무슨 설명이 그래.”
“직접 놔 봐야 알지, 뭐.”
“그래서 말인데, 은설 씨. 다음번 주사는 내가 놔주면 안 돼? 너무. 너무 궁금해. 주사 놓은 기분.”
“그래서 주사 놓는 게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어. 남편이 너무 재밌어해.”
“다행이네. 난소 반응도 괜찮아.”
은설이 배시시 웃었다.
현준은 은설의 기분이라도 좋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포가 7개 정도 성숙 됐어. 인공수정일자는 이틀 뒤 오전 중으로 잡을 게. 난포 터지는 주사는 시간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니까 오늘 밤에 잘 챙기고.”
“네! 선생님.”
현준은 은설이 언제나 새벽 진료를 받으러 와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거의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진료였기 때문에 은설에게는 조금 더 진료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근간의 현준은 진료 시간임에도 평정심이 흔들리는 때가 종종 있었다. 미주가 진료를 받으러 오기로 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현준의 동태를 예민하게 체크하는 정간호사가 대번에 현준의 상태를 알아봤다.
“선생님, 잠깐 쉬실래요?”
“아니. 괜찮아요. 이따 한미주 환자 오면 그때 부탁해요.”
“네.”
미주는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부러 마지막 진료에 맞춰 온 것이 아닐 때는 다른 사람들처럼 접수 순서를 기다렸다가 진료를 받겠다며 과한 배려를 거절했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현준 앞에 앉게 된 미주가 좋은 구경이라도 한 것 마냥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정말 잘 나가는 의사 맞네요. 이 정도로 몰리는 거면 예약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선배한테 내 진료 맡긴 게 잘한 일인 거 같아요.”
“일부러 농담 안 해도 돼.”
“일부러 농담하는 거 아닌데.”
미주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그들끼리만 알아듣는 대화가 이어졌다.
“맞죠?”
“응. 엔도미트리얼이야.”
“그럴 줄 알았다니까. 몇 기에요?”
“초기. 호르몬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거 같아.”
“다행이네. 아빠가 좋아하시겠어요.”
“100% 완치도 가능한 단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호르몬치료 얘기랑 완치 얘기를 같이 하는 건 아니지.”
미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일반 환자처럼 대하지 말아요. 낯간지러.”
미주의 목소리에 조금씩 화가 섞이기 시작했다.
현준은 미주의 반응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믿을만한 전문의를 다시 찾아보는 게 어때?”
“그냥 선배가 해줘요. 안 해줄 거예요?”
“원장님과 상의해 볼게.”
“미리 부탁드려 드려놨어요.”
“응?”
“캔서는 삼촌 전문 분야이고, 어차피 계속 삼촌이 체크를 하실 테니까. 진행은 류현준 선생 통해 하면 안 되냐고.”
“뭐라셔?”
“확답 못 듣고 내려왔어요.”
“······.”
둘 사이에 잠시동안 적막이 흘렀다.
“정하시는 대로 따를게.”
현준이 결심한 듯 먼저 말을 마무리했다.
미주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슬프게 지어 보였다.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현준의 사과에 미주가 갸우뚱했다.
“뭐예요, 왜 그래?”
“그냥 다 미안해.”
“최근에 가장 큰 스트레스 선사한 사람이 본인이라는 거 알아서 자책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맞아.”
“그건 인정. 사과를 받아 줄게요.”
“애써 받아주지 않아도 돼. 좀 더 미안해해야 내 마음이 편하겠어.”
“그럼 안 받아주고.”
“그래. 내가 최선을 다할게. 마음 풀릴 때까지.”
“원망 아주 안 한다고는 말 못 하겠어요. 그렇지만 두고두고 곱씹을 정도로 많이는 안 하고 있으니 치료 진행하면서 다 갚아줘요.”
“그럴게.”
현준을 원망하는 투로 말을 해놓고 선 마음에 걸렸는지 미주가 짧은 넋두리를 했다.
“울 엄마도 자궁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가족력이 없지 않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찾아올 줄 몰랐어. 아닌가? 아, 아니네. 울 엄마도 삼십 대 때 그랬었네.”
"가족력이 있다 해도 치료 결과까지 다 같은 건 아니야."
"알아요. 나도 의사잖아. 상식선의 이야기는 생략해도 돼요."
미주가 날을 세워 현준의 말을 잘랐다.
예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미주의 모습에 현준은 마음이 아팠다.
“그럼.”
짧은 인사를 하고 미주가 현준의 진료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