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남자의 위로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

by 이소정

“주사제가 바뀌었더라고. 이번 건 수입이라 그런가 조금 더 비싸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은설의 목소리엔 어울리지 않는 설렘이 담겨 있었다.

퇴근 후 급한 대로 냉장고 선반 한가운데에 늘어놓았던 주사제를 냉장고 문쪽 수납공간에 차곡차곡 정리하며 말하는 은설의 목소리는 발랄했다.

“나 사실 학교 다닐 때 시험 보고 나서 채점 잘 안 했어. 이미 틀린 거 알아서 뭐 해. 당장 내일 시험 볼 과목 공부가 더 바쁜데 말이야. 그래서 그냥 채점 안 하고 말았단 말이지."

"난 채점했는데."

"지금 딱 그때 마음하고 똑같아. 속상해한다고 내일 시험 더 잘 보는 것도 아니고, 운다고 틀린 게 맞는 걸로 바뀌는 것도 아니니까. ”

“난 채점 하고 집에 가는 내내 시험문제 뭣 같다고 투덜거렸어.”

은설의 말을 들은 건지 아닌지, 준수는 준수대로 자신의 옛날을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그건 은설도 마찬가지였다.

“난 수능 본 날도 채점 안 했어. 다음 날 울음바다 된 교실 분위기 보고 대충 어떻겠다 예상한 다음에 했지. 모의고사보다 왕창 떨어지긴 했는데 다른 애들도 다 비슷한 거 아니까 눈물 안 나더라고.”

본인의 센티한 감정을 잡아누를 생각 말라는 듯 준수가 돌려 말하는 법 없이 은설의 정곡을 찔렀다.

“은설 씨가 이상한 거야. 보통은 그런 식으로 자기감정 누르며 지내지 않아.”

“난 그냥 감정도 효율적으로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야.”

“잘 그러지도 못하면서.”

은설이 냉장고 문을 미쳐 닫지 않은 상태로 준수를 향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나한테 왜 그래?”

“뭘?”

“준수 씨가 더 힘들었어, 내가 더 힘들었어? 앞으로도 준수 씨가 더 힘들겠어, 내가 더 힘들겠어? 어디서 함부로 투정질이야. 내 앞에서 어떻게 준수 씨가 그럴 수 있냐고.”

은설이 냉장고 문을 부서져버리라는 듯 밀어 닫았다.

“뭐 하는 짓이야?”

준수도 목소리를 키웠다.

“니가 한 게 뭐 있다고 내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냐고 그러니까!!!”

은설이 준수에게 ‘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신혼 초 겪었던 몇 번의 다툼으로 준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냉장고 우리 꺼 아닌 거 잊었어? 이거 집주인이 넣어준 옵션이잖아. 고장 나면 물어내야 된다고, 이 사람아.”

준수가 이내 꼬리를 내리고 말문을 돌리려 애썼다.

내가 당신보다 두 살이 더 많네 어쩌네 하며 괜한 시비를 더 걸었다가는 감당하기 버거운 사달이 날 것이 분명했다.




“첫 시술이라 나도 기대를 좀 했나 봐. 내가 좀 센티해지면 나밖에 모르고 그러잖아. 미안해.”

준수가 냉장고 문을 조심히 열고, 닫힌 냉장고 안에서 우당탕 거리며 넘어진 반찬통과 음료수병들을 차분히 정리하며 말했다.

“······.”

은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준수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기보다는 결국은 이성을 놓아버리고 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이 컸다.

‘결국은 ‘아기 못 낳는 여자의 히스테릭한 성질’이라는 비아냥마저 견뎌야 할 행동을 하고야 말았어’

우울감이 급격히 몰려왔다.

엉뚱한 대목에서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고 생각은 했지만 한번 터져 나온 눈물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멈출 줄 모르고 뚝뚝 떨어졌다.

“그래, 눈물이 날 상황이면 시원하게 울어야지, 이 사람아.”

준수의 한 마디가 충동질이 되어 은설이 결국 꺼억꺼억 하며 통곡을 했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거예요, 은설 씨는. 시술도 잘 견뎠고, 지금 이렇게 쌓인 감정 다 터뜨리고 털어내는 것도 잘하는 거야. 어때요? 화내고, 성질도 막 부리고, 엉엉 우니까 기분이 한결 나아지지 않아?”

“응. 그래도 내 억눌린 감정을 터뜨려주려고 일부러 성질 건드린 거란 허튼소리는 하지 말도록 해요.”

“넴.”

준수가 다시 얌전히 꼬리를 내렸다.

“이러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자, 이거. 예전에 말했던······.”

미주가 들어오란 말을 하지 않아 현준은 빼꼼히 열린 미주의 오피스텔 현관문 안으로 영화티켓을 내밀었다.

“아니 이걸 왜 미리······. 가서 뽑으면 되지.”

“눈앞에 내밀어야 같이 가줄 것 같아서 극장 들렀다 왔어.”

“안 하던 행동을 하고 그래요, 사람이.”

“가자. 안 하던 행동 하느라 나 지금 진땀이 다 나고 있어.”

미주가 마지못해 가는 거라는 듯 편한 차림에 가벼운 손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현준을 따라나섰다.

“영화 뭐예요?”

“오늘 개봉한 거야. 잘은 몰라. 미주가 확실하게 안 봤을 만한 걸 찾느라 개봉일만 확인하고 예매했어. 제목 보니 장르가 의학드라마 쪽 일 것 같던데.”

미주가 현준에게서 영화표를 받아 들어 유심히 살폈다.

“제트바이러스. 첨 들어보는 제목인데.”

휴대전화를 꺼내어 검색을 시작한 미주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좀비 나오는 영화잖아요. 나 공포물 딱 질색인데.”

“아, 그래? 의학 드라마가 아녔어?”

"이렇게 허술한 사람을 뭐가 좋다고 쫓아다녔나 몰라."

미주가 혼잣말처럼 자신의 과거를 두고 자책 아닌 자책을 했다.

내내 툴툴거리면서도 미주는 공짜 영화 관람에 대한 답례라며 현준에게 팝콘과 음료를 샀다.

“많이 먹어요. 난 안 먹어.”

“왜? 아······.”

“신경 쓰고 잘해주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이 까먹으면 어떡해요. 원래 살이 잘 붙는 타입인데 파루틸을 복용하니 당연히 식단조절 해야죠.”

“그러게.”




조금 늦게 들어간 극장 안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아직 본편이 시작하지는 않아서 미주와 현준이 조심조심 사람들의 다리를 헤치며 현준이 예약한 가운뎃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세 개 중에 뭐가 우리 자리예요? 표 다시 확인해 볼래요?”

“세 개 다 우리 자리야.”

“응?”

현준이 으쓱해진 어깨에 한번 더 힘을 주면서도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주 불편할까 봐. 끝에 한 자리는 비워두고 여기에 앉아.”

“뭐야, 선배. 책 보고 데이트하는 법 공부한 사람처럼? 그 책에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여자랑 둘이 영화볼 때는 꼭 세 자리 예매하라고?”

미주의 놀림에 현준의 얼굴이 금방 달아올랐다.

“미주 편하라고 그런 거야”

“그럼 네 장을 샀어야죠. 양쪽을 다 비워야 편하지. 선배는 저쪽 끝자리에 않고, 지금 선배자리엔 팝콘 놓으면 딱이겠네. 물론 지금은 내가 안 먹지만.”

미주가 짓궂게 웃으며 현준을 놀렸다.

“어? 한다!”

미주가 금세 자세를 고쳐 앉고 영화에 집중할 채비를 했다.

그리고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현준에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선배. 잘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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