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익숙하지만 처음 뵙겠습니다.(2)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은설이 자신의 학술논문을 언급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미주는 살짝 당황을 했다.

“아, 은설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야.”

깜박 놓친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는 듯 현준이 은설의 직업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은설이 이미 늘어져라 의학박사 한미주에 대한 칭찬과 존경의 말을 해대었으니, 미주 입장에선 은설에게 함부로 하기가 무척이나 애매해졌다.

어쩌면 은설은 자신이 내뿜고 있는 적대감을 본능적으로 느꼈을지도 몰랐다.

그걸 막아 내기 위한 선제공격으로 미주의 학술논문에 대해 언급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교만하지 않은 말투와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톤을 창과 방패처럼 쓰는 사람은 미주도 처음이었다.

적절한 수준의 칭찬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보가 섞인 어법에선 사람이라는 존재들이 지닌 지닌 백만 가지 성격을 모두 한 번씩은 다루어 보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 났다.




미주는 은설이 만만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다.

“선배 하곤 어떻게 다시 만나시게 된 거예요? 전부터 궁금했어요.”

미주가 담백하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 제가 다니고 있던 난임병원 주치의 선생님이 그만두시고 현준이가 새 주치의로 왔어요. 진료받고 나서 보니 현준이더라고요."

"아."

"실력이 좋다기에 민망함 무릅쓰고 치료받기로 하면서 나중엔 형석이라는 중학교 때 친구도 찾게 되고 뭐 그렇게 됐어요.”

“형석 씨도 만나셨어요?”

“아, 형석이도 아시겠구나. 네, 몇 달 전에요.”

형석까지 은설을 만났다 하니 미주는 어쩐지 천군만마를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은설은 여전히 방긋 웃고 있었고, 그런 은설을 보고 있자니 미주는 점점 힘이 풀렸다.




은설은 동그라미 같은 사람이었다.

언젠가 현준이 했던 이야기 속의 어여쁜 소공녀 느낌은 아니었지만, 도자기 같은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보기 좋게 살집이 오른 통통한 얼굴은 선하고 단아했다.

유행이 좀 지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도 촌스럽다기보단 수수해 보였고, 그만큼 자아내는 분위기가 편안한 사람이었다.

겸손하지만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아닌 말투에선 속내의 깊이감이 느껴졌다.

은설보다 무엇 하나 빠지는 조건이 없는 미주였지만, 미주에겐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은설의 면면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이 현준이 자신을 떠나려 했던 이유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저런 모습은 무엇을 어떻게 연습해야만 갖게 되는 것일까.’

서글픈 질투심이 출렁이며 일었다.




“얼마 전에 인공수정 2차까지 실패하고 현준이 충고대로 시술은 쉬고 있는 중이에요. 남편이 의사 친구 말 잘 들으라고 항상 성화를 해서. 남편이 요즘 바빠서 저랑 못 놀아준다니까 현준이가 위로 차원에서 같이 밥 먹어준다기에 쫓아 나왔는데 이렇게 평소 멋지다고 생각했던 박사님도 만나 뵙고 운이 좋네요, 하하.”

TMI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발동이 걸린 입에선 쉴 새 없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은설은 오랜만에 자신의 오금 위 허벅지 살을 꼬집어 댔다.

‘전부인이야. 나나 쟤나 다를 바가 없다고, 멍충아.’

스스로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나니 그제야 쿵쾅거리던 마음이 좀 가라앉는 듯했다.




5분 전, 난데없는 미주의 등장에 바람난 현장을 목격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댔다.

미주의 아우라에선 적대감이 끓어 넘치는 것이 한눈에도 보였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라도 할까 봐 염려한 은설의 입이 쉴 새 없이 미주에 대한 칭찬을 나불댔다.

수업은 무슨.

천박한 호기심으로 검색해 본 ‘한미주’ 연관기사 찾기의 말미에 얻어걸린 학술지 기사가 이렇게 써 먹히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와중에도 자존심은 접고 싶지 않아, 일부러 너그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릇이 깊고 교양이 넘치는 사람인 체를 했다.

미주에게 그럴듯해 보일 수 있는 부분은 그것뿐이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다른 사람에겐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가장 힘들죠, 다스리기가.”

‘응?’

은설이 미소 짓고 있느라 흐려진 시야를 동그랗게 넓혀 미주를 바라보았다.

인공수정 시술이 2차까지 실패를 했다는 은설을 위로해주려 한 말이 분명했지만, 미주의 눈빛은 고해성사를 앞둔 소녀처럼 자기 자신 안으로 천착해가고 있었다.

미주가 현준의 전부 인 이고, 기사를 통해 여러 번 접한 사람이라 익숙하긴 했지만, 처음 본 사이에 속내 깊이 숨겨둔 사연을 캐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은설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며 묻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두려 애썼다.




마침 미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레스토랑 안에 들어와 있어. 창가 자리야, 찾기 쉬워.”

전화를 끊은 미주가 현준에게 말했다.

“혜진이요. 이리로 올 거예요. 잠깐 인사할래요?”

“그러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작고 까무잡잡한 여자가 한 명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

경쾌하게 발을 놀려 뜀을 뛰듯 달려온 여자가 망설임 없이 옆자리 빈 테이블의 의자 하나를 끌어와 합석을 했다.

“오랜만이에요. 일행 분이 내가 모르는 분이시네! 안녕하세요? 현준선배 대학 후배예요. 와, 선배 엄청 잘 지내고 있나 봐요? 얼굴이 더 반드르르 해졌네.”

혜진의 부담스러운 붙임성에 현준이 ‘내가 너에게 이렇게까지 반가운 존재일 줄 몰랐다.’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에이, 절친 전남편이 뭐가 이뻐서 반가워요. 류인기 교수님이랑 장한숙 교수님 다시 만나 뵙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 이러지. 그렇게 따뜻한 분들 밑에서 어떻게 선배 같은 얼음 덩어리 아들내미가 나왔나 몰라.”

“요즘 선배 별명 빙봇 아니야. 아무도 그렇게 안 부른대. 친절하고 따뜻한 의사 선생님으로 컨셉 바꿨어, 얼마 전부터.”

미주가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아프리카에서 니가 우리 부모님께 잘해드렸단 이야기 전해 들었어. 고맙다.”

“잘해드리긴요. 맨난 밥 얻어먹으러 들락날락거렸던 걸, 뭐.”

“두 분 다 잘 계시지?”

“네. 현지인처럼 잘 계세요. 그러니 오래 더 머물 계획 세우고 계시죠.”

“아버님, 어머님께 신경 좀 더 써요. 혜진이랑 나보다도 더 못해, 아들이.”




한동안 은설을 뺀 채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말하고 있는 사람의 입만 쫓아가며 시선을 돌리던 은설이 포기한 듯 먹다 만 파스타에 다시 포크를 꽂았다.

이내 상황을 파악한 현준이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미주랑 혜진이도 식사해야지? 우린 이제 거의 다 먹어서 식사를 같이 하는 건 좀 무리 같고.”

“어머 그렇네. 식사 마무리 하기 전에 우리가 들이닥친 거죠? 다 안 드신 것 같은데 파스타가 완전 우동이 됐네요. 미안해서 어째.”

혜진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에요. 거의 다 먹어가던 중이었어요.”

그제야 은설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우린 테이블 옮길게요. 편하게 자리 마무리해요, 선배. 은설 씨 만나서 반가웠어요. 선배한테 맛있는 후식도 사달라고 하세요.”

미주가 너그럽고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은설에게 인사했다.

가벼운 목례로 미주와 혜진을 레스토랑의 반대편 테이블로 보낸 뒤 은설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86. 익숙하지만 처음 뵙겠습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