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저 여자, 너도 아는 사람이야?”
자리를 옮기면서 혜진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낮춰 미주에게 물었다.
“응. 이야기만 들었던 사람이야. 본 건 처음이고. 선배 중학교 동창.”
“느낌 쎄 하던데. 선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냐?”
“선배한테 난임치료받는 친구야.”
“아, 그래? 그럼 남편하고 사이가 나쁜 여잔 아니란 소리네. 선배는 유부녀를 왜 만나고 다니는 거지?”
“······.”
미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게' 하며 맞장구를 치면 현준을 천하의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대화가 이어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친구니까 만날 수도 있지.’하며 두둔하기엔 미주의 감정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좀 전에 일부러 그 여자 살짝 소외감 좀 느끼게 해 줬는데 나 잘못한 거 아니지? 니 표정이 썩 반가운 얼굴은 아니길래 오지랖 좀 떨었어.”
미주가 혜진을 향해 씨익 하며 웃어 보였다.
“미안, 당황했지?”
현준이 예측하지 못했던 미주와의 만남에 대해 사과했다.
“아냐, 한미주 씨에 대한 궁금증도 풀리고, 의사들이 봉사활동 나가면 무얼 하며 지내는 지도 듣고 나름 재밌었어. 나 군대 얘기 듣는 것도 재미나하는 스타일이거든.”
은설이 가벼운 농담을 하며 현준의 미안함을 달래었다.
“나가자. 한미주 씨는 너에게 얻어먹으라고 했지만, 후식은 내가 살게.”
은설과 현준이 곧바로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아직 11월이었지만 거리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휘황하게 꾸며져 있었다.
“좀 걸을까? 오래간만에 예쁜 조명 장식들 보니까 좋네.”
흥이 났는지 은설이 구름 위를 걷는 사람처럼 사뿐히 걸음을 옮겼고, 현준은 가만히 은설의 옆을 걸었다.
현준의 시야에 옛 동네의 도서관 옆 가로수길이 오버랩되었다.
은설과 함께 걷던 그 시절이.
‘맞아. 이런 느낌이었어.’
그립고 그리워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잊을 수 없었던 은설의 느낌.
사라진 블록을 찾아 아귀가 꼭 맞는 자리에 끼워 넣은 것 같은 충만함이 현준의 가슴속을 꽉 채웠다.
미주에게선 은설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모습이 보였었다.
그래서 미주에게서도 온 세상을 내 것으로 가득 채운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다.
반드시 그 느낌을 느껴야만 사랑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랑을 하지 않았으므로.
온 세상이 내 것인 것만 같은 이 충만함을 그녀에게선 느끼지 못했으므로.
'사랑해, 좋아해, 미안해, 고마워는 떠오르는 순간 입 밖으로 꺼낼 것'
그래야만 가장 순수하고 오롯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라던 은설의 말이 현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현준은 열네 살의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은설의 충고를 성실히 따르기로 결심했다.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킨 뒤 낮고 중후한 목소리로 은설을 부르면서.
“은설아.”
“응? 아악!!”
대답과 비명이 동시에 은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휘청.
“어엇! 조심해!”
“어머, 어떡해!”
우당탕 털썩.
상황은 이러했다.
하필이면 붐비는 주말 번화가 길바닥에 자그마한 규모의 미장공사가 진행된 모양이었다.
공사한 자리를 아무렇게나 덮어 놓은 나무판이 인파의 발걸음을 견디다 못해 한쪽으로 밀려버렸고 하필이면 은설의 걸음 앞에 그것이 있었다.
현준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버린 은설이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은설의 작은 발이 나무판이 아닌 틈으로 빠져 꾸덕꾸덕 말라가는 시멘트 바닥을 찍어 눌렀다.
놀란 은설이 발목을 비틀어 발을 빼내려 했다.
다급히 흔들어 댄 탓에 신발은 발과 함께 무사히 시멘트 덫을 빠져나왔지만 땅을 딛고 있던 나머지 한 발이 반동을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은설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고, 현준이 몸을 낮춰 쓰러지려는 은설의 허리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그러느라 현준의 기다란 트렌치코트 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그리고 허공을 휘젓고 있던 은설의 시멘트 범벅 구두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그 위에 안착했다.
“어머, 어떡해!”
놀란 은설이 트렌치코트 자락을 밟고 있는 발을 들어 올리려다가 외려 깽깽이 발로 현준의 트렌치코트 자락을 짓이고 말았다.
은설의 발아래 상황을 모르고 있던 현준은 현준대로 은설을 안은 채 상체를 일으키려 하다가 목덜미 째로 바닥에 매다 꽂히는 듯한 압력을 받고 말았다.
옷자락을 통해 전달되는 은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현준의 어깨가 결국 주인의 뜻에 반해 수직하강을 했고, 이번엔 현준이 균형을 잃었다.
우당탕 털썩.
어떻게든 피해보려 했지만 결국 현준과 은설의 몸이 뒤엉킨 채로 쓰러지고 말았다.
번화가 한복판에서.
“은설아, 괜찮아?”
현준이 은설의 상태를 살폈다.
“도망가자. 챙피하다.”
머리카락이 거꾸로 다 뒤집어진 은설이 부끄러운 듯 현준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며 말했다.
현준이 두말없이 은설의 손을 잡아 냅다 일으켜 세우곤 그대로 내달렸다.
대로변에서 두어 개의 골목을 더 들어오니 주택가가 나왔다.
현준은 이미 이곳의 지리를 알고 있는 듯했다.
거침없이 찾아 들어간 골목 끝이 놀이터가 있는 작은 광장과 연결되었다.
“와, 이런 데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이 동네서 술 마시고 배회하다가.”
“너도 그럴 때가 있어?”
은설이 ‘풉’하고 웃으며 현준에게 물었다.
“주로 형석이 녀석 하고. 그 자식하고 마시면 끝이 거의 늘 그래. 걔 주사가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거라서. 여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
현준이 은설을 벤치에 앉혀 놓고 광장 한편에 나란히 붙어있는 편의점과 약국을 차례로 들렀다.
은설은 코트 옷깃을 세워 점점 차가워지는 바람을 막으며 그런 현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뛰는 자세는 나이를 먹어도 안 바뀌는구나. 저기서 키를 한 30센티 정도만 떼어내면 영락없는 열네 살 류현준이네.”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전의 귀여운 구석이 하나쯤은 남아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저 모습일 줄이야.'
캥거루처럼 겅중겅중 뜀을 뛰며 현준이 은설에게로 달려왔다.
“이거 먼저 받아.”
현준이 내민 편의점 비닐봉지 안에 따끈한 캔커피 네 개와 스타킹이 들어 있었다.
“두 개는 코트 주머니에 넣고 두 개는 손에 쥐고 있어. 추워. 스타킹은···잘 몰라서 그냥 제일 두꺼워 보이는 걸로 골랐어.”
“스타킹은 왜?”
“여기.”
현준의 손끝이 은설의 무릎을 가리켰다.
“어머! 아, 따가워!”
상처를 보고 나서야 아픔을 느꼈는지 은설이 울상을 하며 상처에 손부채질을 해댔다.
“창피함 때문에 아픈 줄도 모르고 냅다 뛰었다는 건 근육이나 인대손상은 없었단 얘기니까,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응. 근데 아무래도 발목이 비끗한 것 같아.”
은설이 시멘트가 잔뜩 묻은 상태에서 굽까지 부러져버린 왼쪽 구두를 보여주었다.
“아까 우지끈 소리가 그럼? 아, 이런. 미안.”
"뼈가 아니라 구두굽이니까 다행이지. 심한 것 같지는 않아. 괜찮아."
괜찮다는 은설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현준이 무릎을 꿇고 앉아 은설의 상처 여기저기를 살폈다.
“부어오른 정도가 미미한 걸 보니 발목 부상이 심한 편은 아닌 듯 해."
"응. 그건 나도 느낌으로 알겠어. 약간 욱신거리는 것 빼곤 괜찮거든."
"응급실로 달려갈 필요는 없어 보이고, 그리고······."
현준이 머뭇거리듯 말을 이었다.
"저기, 이거. 내가 좀 더 찢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