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오래된 구두(2)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응?"

현준의 입에서 나온 당황스러운 단어에 은설이 놀라 되물었다.

“여기, 드레싱 좀 해야 해서.”

“아아아. 드레싱! 으응.”

은설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현준의 손을 허락했다.

현준이 은설의 스타킹에 구멍 난 부분을 양 손끝으로 잡고 섬세하게 틈을 벌렸다.

아주 작게 '보오옥'하는 소리를 내며 스타킹의 올이 풀려나갔고, 조금 더 넓어진 구멍 사이로 제법 넓은 상처부위가 드러났다.

현준이 제 손부터 먼저 소독액 샤워를 시켰다.

“다리를 약간 이렇게. 응, 그럼 되겠어.”

은설의 다리를 닭싸움 자세로 만든 현준이, 피와 이물질이 다른 곳으로 튀지 않도록 조심스레 상처 위에 정제수를 부었다.

“앗, 따가워.”

은설이 우는 소리를 냈지만, 현준은 이번만큼은 봐줄 수 없다는 듯이 큰오빠 같은 근엄한 표정을 하며 엄살을 받아주지 않았다.

“한 번 더 따가워야 돼.”

현준이 거즈에 소독액을 묻혀 상처를 톡톡 두드릴 때마다 은설이 눈을 질끈질끈 감았다.

“이게 이것만 붙이면 돼.”

현준이 메디폼 한 장을 몽땅 떼어 은설의 상처에 척하고 붙였다.

“이거 집에선 진짜 딱 상처부위만큼만 잘라서 아껴 쓰는데.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붙여주는 건데도 되게 아깝고 막 그러네.”

“나도 잘라서 써. 지금은 가위가 없으니까 할 수 없이 그냥 붙인 거야.”

“아, 그래.”

멋쩍어하는 은설을 보며 현준이 픽하고 웃었다.

“이제 스타킹만 갈아 신으면 되겠다. 어느 쪽이었더라. 아! 저기 있네. 공공화장실. 저기서 바꿔 신으면 될 거야. 제법 깨끗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화장실이야.”

“넌 정말 이 동네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구나.”

은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랍다는 제스처를 했다.

“다 형석이 녀석 때문이라니까. 그나저나 걸을 수 있겠어?”

“응, 굽이 부러져서 균형이 안 맞아 그렇지, 살살 걸을 만은 해. 못 걸을 정도는 아냐.”

"발목은?"

"아, 맞다. 발목! 까먹은 걸 보니 괜찮나 봐."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줄게.”

현준이 은설을 번쩍 들어 안았다.

"엄마야!"




은설을 공공 화장실 앞에 데려다 놓은 현준이 다시 약국을 향해 뛰었다.

스타킹을 갈아 신은 은설이 화장실 앞에 다시금 나왔을 때는 현준의 손에 발목보호대가 들려 있었다.

“그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고마워. 근데 신발이 이래서 발목보호대를 해도 똑바로는 못 걸을 거 같아.”

은설이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굽이 부러진 구두를 들어 보였다.

“아······.”

현준이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택가 한 복판에 신발을 파는 상점이 있을 리 만무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슬리퍼는 좀 춥겠지?"

"아마도?"

"영화에서 처럼 바꿔 신어 주면 좋겠지만, 니 구두엔 내 발가락도 다 안 들어갈 것 같아서.”

현준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하하, 그러게 11월 말이라 구두 벗어주고 넌 맨발로 걸으랄 수도 없네. 흐음. 잠깐만.”

은설이 들고 있던 굽 나간 구두를 다시 발에 끼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광장 둘레를 드문 드문 감싸고 있는 대리석 화단을 향해 절룩거리며 걸어간 은설이 멀쩡한 쪽 구두를 벗어서 야무지게 손에 쥐곤 냅다 굽을 내리쳤다.

두세 번을 내리쳐도 굽은 좀처럼 부러지지 않았다.

은설의 의도를 알아차린 현준이 다가와 은설의 손에서 구두를 낚아채더니 쑤욱하고 굽을 뽑아버렸다.

“와, 힘 왜 이렇게 쎄?”

“안 쎄. 니가 내리쳐서 절반은 분리해 놨었어.”

굽이 빠진 자리를 바닥에 톡톡 내리쳐 못자리를 정리한 현준이 꿇어앉은 그대로 은설의 발을 잡아끌어 구두를 신겼다.

“자, 들어 봐.”

“어맛!”

살짝 균형을 잃은 은설이 현준의 머리와 어깨를 잡았다.

“정수리는 놔주라.”

“하하, 미안해.”

굽을 모두 부러뜨린 구두를 신고 은설은 한결 사뿐한 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번화가 쪽으로 다시 나가면 새 구두 살 수 있을 거야.”

“오늘 꼭 안 사도 돼. 걸을 만 해.”

“괜찮겠어?”

“걸을 때 느낌이 꽤 재밌어. 차 마시러 가자. 캔 커피가 미지근해졌어. 몸 좀 녹였다가 집에 가자."

은설이 현준의 팔짱을 낚아챘다.

"오늘 내내 고마웠으니까 차는 내가 살게. 비싼 크리스마스에디션 특별 메뉴로다가 골라 보도록 해.”

난임에 대한 고민을 제외한 채로 만난 은설은 현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밝고 명랑했다.

현준은 그 옛날 자신이 은설에게 고백했던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처음 받아본 고백이라며 좋아라 웃던 그 소녀의 모습이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 된 은설의 모습 위로 떠올랐다.

낭랑하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은설이 못내 아쉬운 듯 구두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아끼던 구두였는데, 좀 아깝게 되긴 했어. 거의 10년 가까이 신었으니 보내줄 때도 되긴 했지만 말이야.”

“그렇게 오래된 구두야? 그 정도로는 안 보이던데.”

“아껴 신었어. 발에 맞는 구두가 별로 없거든. 220 사이즈는 작고 225 사이즈는 커서 막 벗겨지고 그래. 그래서 거의 메리제인, 그러니까······.”

은설이 손등 위로 선을 그으며 말을 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발등 위로 스트랩이 지나가는 구두를 신는데, 이건 스트랩 없이도 잘 맞았거든.”

“많이 아끼던 게 망가진 거구나.”

“괜찮아. 때마침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으니, 남편한테 구두를 선물해 달라고 졸라보려고.”

은설이 활짝 웃으며 현준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현준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사이에 두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다정히 웃는.

은설과 그리고 은설의 남편.

현준은 사진을 오리듯 머릿속 장면에서 은설만을 잘라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 떠올려 거실 한편에 형형색색의 조명이 반짝이는 커다란 트리장식을 세우고, 식탁에는 푸짐한 크리스마스 만찬을 차렸다.

빨강과 초록의 양초와 호랑가시나무로 만든 리스로 장식한 홈바엔 반 병쯤 남아 있는 달달한 와인병.

잔은 약간의 안주와 함께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을 테고,

창가엔 사뿐히 내려앉은 눈발이 조금 쌓여 있어도 예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미리 잘라둔 은설의 모습을 거실 소파 위로 살포시 옮겨 두었다.

은설이 든 선물 상자는 어느새 현준이 마련한 작은 케이스로 교체되어 있었다.

14살의 현준이 하루에도 몇 번씩 꿈꾸었던 어느 날에 훨씬 더 구체적인 오브제들이 섞여서 다시 한번 현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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