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조리원에서 아이를 낳고 처음 안았을 때,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 아이가 정말 내 뱃속에 있던 아이란 말인가. 내가 정말 이 아이를 앞으로 키워야하며. 이 아이를 책임져야한다는 말인가. 두 손에 아이를 받쳐 들고 한동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앞으로 아이에게 펼쳐질 인생을 상상해보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머리로 결정하고 아이를 낳기로 한 순간, 이런 두려움을 예상치 못했다. 분명히 임신은 축복이며, 출산을 통해 나는 큰 선물을 받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왜 아무도 이런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배신감이 밀려왔다.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던 산후조리원 첫날밤이었다. 그렇다. 내가 내린 결정에 따라 실제로 내가 겪게 될 일은 상상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그림이었을 때가 많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아이가 마냥 예쁘지 않았다. 가끔은 정말 외면하거나 심하게는 버리고 싶었고. 짐스럽고 미울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아이에게 내가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얼마나 쩔쩔 매면서 키웠는지 모른다. 힘든 내 마음과는 반대로 아이에게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한 것이다.
이제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서 희생을 하는 이야기를 단순히 미화해서 보지 않게 되었다. 사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헌신에는 다른 종류의 자기애가 깔려있다는 것을 안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부모이고 엄마가 되고 싶은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사람은 사랑을 하는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대상은 거울이고 타자일 뿐이다.
삼십대 중반,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부모보다 자식이 더 아이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순간에도 아이들이 나에게 보여준 사랑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에게는 의무와 책임이 많을 뿐, 알고 보면 그 사랑이 생각보다 깊지 않을 수 있다고. 그 사랑이라는 것이 바뀌지 않는 순수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이가 부모에게 가지는 마음에 있을 것 같았다.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맑은 아이의 얼굴을 보며 내 아이는 나를 완벽하게 사랑해 라는 결론에 이르러 잠시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이런 생각이 자기기만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어렸을 때는 상상해보니 나는 그렇게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나에게 절대적이었던 존재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에 가까웠다. 그것은 나약한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복종과도 닮아있다. 아이들 앞에서 엄마인 나는 어떻게 보면 그런 식의 만족감을 사랑으로 느끼며 자존감을 채웠는지도 모른다.
자식은 부모에게 어쩔 수 없이 복종한다. 때론 납득하지 못하고 동의할 수 없는 일까지도. 그런 복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지는 시기가 사춘기며, 이후 자신의 힘을 키워 독립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자식이 부모에게 가진 사랑도 완벽하게 미화된 관점에서는 볼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제일 진하고 높은 곳에 있는 사랑이 부모자식 간의 사랑인 것 같다. 내가 원해서 고른 사람과 반쪽의 유전자를 나누어 가진, 가장 나와 닮은 나. 내가 키우고 나를 갈아서 만든 아이는 그야말로 거울처럼 나의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자신을 대입시키는 곳에서 발생된다고 믿는다. 자식은 가장 나이기에 가장 사랑한다.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거나, 자식이 더 부모를 사랑하는 결론은 애초부터 틀린 질문이었던 것 같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처럼. 사람은 가장 ‘나’인 존재들을 사랑한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의 ‘나’를 발견하며 사랑을 이어간다. 그 끈으로 영원히 부정하거나 미워할 수 없는 내가 상대안에 DNA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에 거꾸로 사랑할 수 밖에 없다고. 삼십대 중반의 내 머리로는 이정도의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