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영화를 본다.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백만 달러의 사랑' 제목도 줄거리도 모두 다르지만 나에겐 모두 같은 오드리 헵번 영화다. 왜냐면 내가 오드리 헵번을 보기 위해 고르는 영화이니까. 평소의 영화 취향은 아니지만 추억이 필요할 때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처럼, 명랑이 필요할 때 오드리 헵번 영화를 본다. 본 것도 또 본다. 그러면 그녀는 군더더기 없는 헵번 룩으로, 특유의 꿈꾸는 눈빛으로, 까치발 같은 사뿐한 몸짓으로, 가냘프지만 당당하고 당당하지만 허술한 웃음으로 나를 헤벌쭉 웃게 한다.
화니 페이스 (Funny Face,1957)
감독 :스텐리 도넌
출연 : 오드리 헵번, 프레드 아스테어
뮤지컬을 영화로 옮긴 '퍼니 페이스'는 서점에서 일하는 패션 문외한 조(오드리 헵번)가 새로운 얼굴을 찾고 있던 유명 패션잡지 여사장과 사진작가에게 발탁되어 하루아침에 모델로 성공하고 사랑도 이루는 진부한 신데렐라 영화다. 로맨스 상대인 사진작가 (오드리 헵번과 무려 30살 차이 나는 뮤지컬 배우)에게 설렘이나 감정 이입은 거의 불가능하다. 줄거리는 빤하고 남주인공은 아무리 춤을 잘추고 뮤지컬계의 대배우라고 해도 무대가 아닌 영화주인공으로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그것 빼고 다 좋다. 로맨스 영화에서 로맨스 빼고 다 좋다는 게 무슨 악담인가 싶겠지만 영화를 로맨스가 아닌 패션 영화로 보면 아무 불만이 없다. 게다가 오드리 헵번 영화니까 오드리 헵번이 다 하는 영화다. 1950년대 영화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원색의 파노라마와 지방시의 패션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오드리 헵번을 볼 수 있다.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드리 헵번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입고 나오는 50년대 절도 있고 우아한 패션 스타일에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핑크, 그린, 레드, 강렬한 원색의 오드리 헵번이 아니고 블랙의 오드리 헵번이다. 장식 없는 블랙 스웨터에 블랙 팬츠 블랙 슈즈를 신고 무대가 아닌 카페에서 세상 신나는 표정으로, 정신 쏙 빠지게 막춤을 추는 장면이다. 막춤을 추는데 선이 살아있다. 놀랍도록 춤을 잘 춘다. 나중에 오드리 헵번이 실제로 발레 전공자였다는 것을 알고 그 놀라움은 조금 반감되었으나 다시 봐도 역시 명장면이다.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웃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오드리 헵번 -
나는 나를 웃게 하는 오드리 헵번이 좋다. 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히 오드리 헵번을 사랑한다. 그런데 세간의 소식에 의하면 그녀의 삶은 스크린 밖에서도 아름다웠다지 않은가. 유명 배우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삶과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알 필요도 없지만, 암이 온몸에 퍼진 것도 모르고 마지막까지 힘을 쏟은 일이 소말리아 아이들을 위한 구호였다는 것. 아프리카에서의 시간을 헌신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를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