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언어의 길을 달리다

사라진 기술보다 오래 남는 말

by 온기록 Warmnote

어렸을 때 중국어를 처음 배울 무렵, '火車(화차)'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뜻은 기차, 우리가 잘 아는 철도 위를 달리는 열차다. 그런데 왜 하필 '불(火)'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을까. '불의 수레'라는 이름은 왠지 낯설고 거친 인상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기차(汽車)'라는 단어를 쓴다. 증기(汽)에서 유래한 말이지만, 지금은 그 어원이 뚜렷이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전차(電車)'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방식이 이름에 그대로 담겨있다.


같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세 나라의 단어는 서로 다르다. 다만 단지 발음이 다르다는 수준이 아니라,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사물을 인식했는지가 다르다. 단어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이름을 붙이는 방식에는 각각의 사회가 기술을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사용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하나의 단어를 따라가다 보면, 언어 너머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기술이 언어를 만든다


기차는 산업화 시대의 상징이었다. 엔진 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증기기관차는, 그 자체로 기술의 진보를 드러내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이 거대한 물체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했고, 각자의 언어로 '기차'라는 새로운 문명을 설명하려 했다.


중국에서는 이 낯선 탈것을 '火車(화차)'라 불렀다. 석탄을 태워 불을 일으키고, 그 열로 증기를 만들어 달리는 차. 불이라는 단어는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인상을 남긴 요소였을 것이다. 기계의 원리보다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에 가까웠다.


한국어의 '기차(汽車)'는 증기(汽)를 중심으로 이름 붙였다. 이 역시 초창기 증기기관차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본에서도 한때 '汽車(기차)'라는 표현이 쓰였고, 이후 전기식 열차가 등장하면서 '電車(전차)'라는 말이 보편화됐다.


각 나라가 만든 명칭은 그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본 기차의 형태와 원리를 반영하고 있다. 불과 증기, 그리고 전기. 그 시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언어로 굳어졌다. 단어는 과거의 흔적을 담은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 나라, 세 방식의 이름 짓기


같은 기차를 두고, 한국과 중국, 일본은 각기 다른 이름을 붙였다. 세 나라 모두 '차(車)'를 공통으로 쓰지만, 그 앞에 붙는 단어는 서로 다르고, 그 안에 담긴 관점 역시 제각각이다.


중국어 '火車(화차)'는 불의 수레다. 불을 태워 달리는 거대한 기계, 그 강렬한 인상을 단어로 옮겼다. 눈에 보이는 동력의 형태, 즉 불과 연기가 이름의 중심에 있다. 기술의 구조보다는 시각적 인상을 중심에 둔 명칭이다.


반면 한국어 '기차(汽車)'는 증기(汽)라는 비교적 기술적 원리를 담고 있다. 마치 '이 물체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를 짚어주는 설명 같기도 하다. 이후 '전철(電鐵)'이나 '열차(列車)' 같은 말들이 등장하면서, 기차를 부르는 표현은 기술 방식이나 운행 체계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게 되었다.


일본은 이 두 흐름을 모두 보여준다. 초기에 증기기관차를 '기차(汽車)'라 불렀다가, 전기식 열차가 도입되자 '電車(전차)'라는 표현이 더 자주 쓰이게 됐다. 기술 변화에 따라 단어도 유연하게 바뀌어간 것이다.


세 나라는 모두 한자를 쓰지만, 같은 문물 앞에서 주목한 지점은 달랐다. 단어를 선택하는 방식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세계와 사물을 읽어내는 태도의 차이를 드러낸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고, 이름은 그 그릇에 담긴 첫 번째 표현이다.


언어는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


하나의 물체를 가리키는 말이 다르다는 것은, 각기 다른 시선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세 나라가 붙인 이름은 그 차이를 언어로 옮긴 결과다.


'火車(화차)'라는 단어는 눈에 보이는 특징에서 출발한 표현이다. 불, 연기, 속도.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 기계적 힘을 단어에 그대로 담았다. '기차(汽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에 주목한 표현이며, 증기라는 단어는 그 작동 방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전철(電鐵)'이나 '電車(전차)'처럼, 일본과 한국에서 쓰이는 표현들에는 기술적 분류와 체계가 강조된다.


이름은 단순한 지칭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는 이름이며, 언어 사용자들의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우리는 '기차'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를 떠올린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말이 '불'과 함께 기억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기'와 연결된다. 단어는 보이는 세계를 묘사하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인식의 틀을 만든다. 그 틀 속에서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다시 말로 표현한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그 이름으로


기차는 더 이상 불을 태우고 증기를 이용해 달리지 않는다. 증기기관은 박물관에 남고, 철도 위를 달리는 열차는 이제 전기로 조용히 움직인다. 기술은 바뀌었지만, 단어는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그 이동수단을 '기차'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火車(화차)'라 부르며, 일본에서는 '電車(전차)'라고 부른다. 단어 하나가 하나의 풍경을 떠오르게 하고, 오래전 누군가의 시선을 지금 여기에 다시 불러온다.


기술은 사라지고, 시대는 변한다. 그러나 이름은 남는다. 우리가 지금 무심코 부르는 그 이름 속에는, 한 시대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말로 붙잡아 두려 했던 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도 우리 곁에 머물러, 사라진 기술보다 오래,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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