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여행'에서 '읽는 여행'으로의 변화
해외여행을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풍경을 본다. 누군가는 건축물을 보고, 누군가는 바다나 하늘을 찍는다. 하지만 나는 길을 걷다가 멈춰 서서 간판을 읽는다.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거리에 걸린 광고 문구를 소리 내어 읽는다. 내 여행은 '보는 여행'이라기보다 '읽는 여행'에 가깝다.
많은 이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간판이나 메뉴판도, 나에게는 그 나라의 언어로 펼쳐진 풍경처럼 느껴진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런 말투를 쓰는구나", "왜 이런 단어를 골랐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어떤 간판은 웃기고, 어떤 간판은 무심하고, 어떤 간판은 따뜻하다. 그런 느낌은 말의 선택에서 온다. 같은 "환영합니다"라는 말도, 어떤 나라에서는 귀엽게 다가오고, 어떤 나라에서는 형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길 위의 문장을 읽다 보면, 그 나라의 말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여행지의 간판을 읽는다. 말보다 먼저 다가오는 말투를 듣기 위해.
간판을 보다 보면, 그 사회가 무엇에 힘을 쏟고 있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어느 거리는 온통 병원 간판이고, 또 어떤 거리는 카페나 식당 간판이 끝없이 이어진다. 비슷한 간판이 이어지는 풍경을 따라 걷다 보면, 거리 전체가 그 도시의 일상처럼 느껴진다.
특히 눈에 띄는 건 학원 간판이다. 대만을 여행하던 중, 길을 걷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한 학원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成績就是實力。 選補習班比較成績永遠最重要。"
(성적이 곧 실력이다. 학원을 고를 땐 성적 비교가 가장 중요하다.)
단호하고 직접적인 문구였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학원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공간인지 선명하게 보인다. 간판을 보면, 그 사회가 교육을 대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읽힌다.
거리의 메뉴판도 마찬가지다. 식당 앞 메뉴판을 보면,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즐겨 먹는지, 아침, 점심, 저녁 중 어떤 식사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침 전문 식당에는 토스트나 죽, 햄버거 같은 간단한 메뉴가 걸려 있고, 점심 식당에는 덮밥이나 국수처럼 포만감 있는 음식이 주를 이룬다. 메뉴판은 단순히 음식의 목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작은 창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로, 한국의 거리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간판들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특히 학원 간판은 거리 곳곳을 조용히 점령하고 있었다. 과목 이름만 단정하게 적힌 간판이 반복되고, 건물 외벽마다 비슷한 글씨체와 색상의 간판들이 층층이 붙어 있다. 하나하나 따로 보면 별 감흥이 없지만, 그것들이 이어질 때 풍경이 달라진다. 그 도시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 안에서 아이들이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메뉴판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김치찌개, 제육덮밥, 돈가스, 국밥. 눈에 익은 메뉴들이지만, 이게 '익숙한 음식'이라기보다는 '이 거리 사람들이 가장 자주 먹는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그저 풍경의 일부였던 한 줄의 글자, 한 장의 메뉴판이, 이제는 일상의 한 부분처럼 다가온다.
익숙한 거리도, 한번 낯선 눈으로 보고 나면 다시는 예전처럼 보이지 않는다. 읽는 눈이 생기고 나면, 일상은 더 이상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배경이 아니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쳐 왔는지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