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겠구나

수영장에서 별이 번쩍 보일 만큼 맞고서도 기분 좋게 나올 수 있었던 이유

by 변덕여왕

수영장 25미터 레인을 자유형으로 갔다가 배영으로 돌아오길 여러 번 반복하면 스트레스가 빠져나간 만큼 몸이 가벼워진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일이 흔하지 않던 시절 은행에서 근무하며 각종 세금 고지서에 도장을 꽝꽝 찍어댔던 후유증으로 내 어깨는 조금만 무거운 걸 들어도 밤 새 쑤셔댈 만큼 많이 약해졌다.

어깨와 아픈 무릎 때문에 계속 고생하다가 수영을 배운 지 2년쯤 돼간다.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따르느라 4개월 정도를 쉬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수영장을 다니고 있다.

월 수 금요일엔 아쿠아로빅 프로그램 사이에 자유 수영 시간이 잠깐 끼어 있어서 수영장 레인이나 샤워실이 북적거리지만 화요일, 목요일은 대체적으로 한산한 편이다. 목요일 자유수영 시간에 가급적 수영하는 인원이 적은 레인을 골라서 천천히 왕복하던 중에 갑자기 눈앞에 별이 번쩍 보이더니 평소 내 목소리 같지 않은 톤으로 "악"소리가 절로 나왔다. 할머니 한 분이 천천히 수영하고 계시던 레인이라 나도 보조를 맞춰서 느릿느릿 배영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누군가 내 물안경을 힘을 실어 강타했다. 넓지 않은 레인에서 여러 사람이 수영하다 보면 서로 의도치 않게 맞거나 때리는 일이 종종 있다. 손톱으로 할큄을 당한 적도 있지만 불러 세워 따지는 일은 거의 없다. 수영하다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서로 조심하고 배려하면서 지나치지만 이번의 충격은 그 강도가 달랐다. 정말 별이 보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느낄 만큼 많이 아팠다. 바로 서서 수경을 벗으니 아주머니 한 분이 멋쩍게 서 계셨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너무 아프니 살짝 멍한 상태가 돼서 상대방 얼굴을 확인 못 하고 그냥 지나가시라 하고 레일 출발점으로 돌아갔다.

배영 하느라 얼굴이 물 위로 노출된 상태였는데 수경을 제대로 맞아서 콧대가 너무 아팠다. 정신을 좀 차리고 누구한테 맞은 건지 얼굴이나 제대로 확인하려고 찾아보니 원래부터 계시던 할머니만 보이고 그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라고 불릴 정도의 나이가 아니라는 것만 생각나고 얼굴이 기억 안 나는 상황이라서 갑갑했다. 제대로 때려놓고 나간 건지 다른 레인으로 옮겨간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혼자 우왕좌왕하다가 밖으로 나가서 샤워실로 갔다.

샤워하는 내내 고통과 함께 괘씸하다는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퍽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맞았는데 그 정도면 상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나라면 다시 괜찮은지 확인하고 이상이 있으면 수영장을 통해서든 직접이든 연락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을 텐데 뒷감당 안 하려고 도망간 것 같아서 너무너무 화가 났다. 대충 씻고 탈의실로 나왔는데 욱신거림이 더 심해지고 콧대 부분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물안경 테두리가 실리콘이라서 웬만하면 충격을 흡수해줄 텐데 그 범위를 뛰어넘은 건 발로 찍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 레인 가운데로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좀 아프게 부딪힐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배영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어서 레인 왼쪽에 바짝 붙어서 오고 있었는데 약속된 범위를 벗어나서 마음대로 수영하다가 나를 발로 때려놓고 도망갔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고통보다 더 커져갔다. 항상 수영강사가 레인 주변을 관찰하는데 왜 역방향이나 진로방해를 제대로 제지하지 못하는지 항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 누군가 많이 아프냐고 말을 걸었다.

얼굴은 기억 못 하지만 콧대를 감싸고 나도 모르게 아프다는 말을 내뱉은 걸 알아보고 말을 건넨 걸 보니 그 아주머니였다. 너무 아프다고 발로 찍으신 거냐고 물어봤지만 내심 그 아주머니 실수로 발로 찍은 게 맞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발이 아니라 눈 감고 접영 하다가 손으로 내리친 건데 본인은 감각이 없어서 몰랐다고 했다.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몰랐다면 어찌 본인도 가다가 멈칫 멈춰 섰겠는가? 그리고 왜 서로 조심하면서 수영을 해야지 눈을 감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아주머니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수영장을 오랜만에 왔는데 하면서 힘이 점점 빠져 저절로 눈이 감겼다고 얘기했다. 그냥 넘어가기엔 그 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서 수영장 측에 얘기하겠다고 했다. 그제야 아주머니가 빨개진 내 콧대를 자세히 보더니 수영장에서 도움 줄 일은 없을 거라고 둘이 해결하자고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혹시 모르니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자 연락처를 알려주는데 이번엔 정말 미안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정도로 아플 줄은 정말 몰랐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주머니가 아무래도 내일이면 멍이 들 것 같다며 병원엘 가자고 한다.

"수영하다 보면 저도 피해를 줄 수 있어서 어느 정도의 부딪힘은 그냥 넘어가는데 이번엔 너무 많이 아프네요."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상대방의 진심으로 미안한 듯한 태도에 마음은 많이 누그러졌다. 콧대가 여전히 욱신거리긴 했지만 분명히 발로 찍힌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으로 퍽 친 거라고 하니 실금 간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등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아무래도 수경을 맞아서 눈이 걱정된다고 아프면 꼭 연락 달라고 재차 당부를 하니 마음이 완전히 풀어져버렸다. 당황스럽다 화나고 분노했던 마음은 온 데 간데없고 운동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이 바로 말로 나왔다. "번호를 주셨지만 따로 연락드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수영하다 보면 저도 이런 피해를 줄 수 있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가 재차 내 상태를 걱정하며 연락 달라며 돌아가신 후 거울을 보니 좀 빨갛긴 하지만 괜찮은 듯도 하다. 혹시나 진단이 나올 정도의 부상이라도 내 선에서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언제 어떤 피해를 줄지 모르는데 상대방의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마음을 알았으니 병원에 다니는 수고로움과 비용 정도는 감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늦은 밤 콧대를 눌러보니 살짝 아프긴 하지만 화났던 마음이 풀어진 것처럼 고통도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혹시 몰라 찜질을 열심히 한 덕분인 것 같다. 만일 아주머니가 끝까지 모르쇠로 나갔거나 내가 상대방을 알게 돼서 하소연했을 때 엄살로 치부해버렸으면 오늘 하루가 많이 시끄럽고 바빴을 것이다. "많이 아플지 몰랐어요. 미안해요."라는 말 한마디가 일상의 평화를 지키게 해 줬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살아갈수록 정말 중요한 태도임을 새기게 된다.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종종 실수나 잘못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때의 대처가 어떠했느냐에 따라 감정싸움이 얹어져서 더 불쾌하고 힘든 결과가 될 수도 있고 서로 양해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게 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불황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만만치 않은 요즘 예상치 못 했던 싸움까지 덤으로 업고 가면 삶은 더 팍팍해진다. 먼저 좋은 말로 시작하면 서로 간의 배려가 좀 더 쉬워진다. 나이 들수록 말을 예쁘게 해야 생각과 태도가 같이 예뻐진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병원은 안 가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상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손해 볼 수 있는 것도 억울하게만 생각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 조금 대견한 하루였다.



작가의 이전글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