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치없이 밥을 천천히 먹는 사람이 아니에요.

by 변덕여왕

"얼른 나와서 밥 먹어"라고 소리침과 동시에 남편과 딸의 밥과 국을 담고 그들이 앉으면 내 밥그릇을 챙긴다. 자식과 남편에게 대단히 희생하는 주부가 아니면서도 식탁을 차릴 때는 자연스레 내 순서가 뒤로 밀린다. 아마도 가장을 먼저 대접했던 집안, 사회적 분위기가 익숙해져서 또 공부한다고 고생하는 딸이 조금이라도 빨리 밥을 먹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일 것이다.

그날은 반찬이 조금 부실했다. 남편은 국이 없으면 밥을 잘 못 넘겨서 대부분 국이나 찌개를 상에 올리는데 국 끓일 재료도 마땅히 없었고 무엇보다 새 반찬을 하는 게 좀 귀찮은 날이었다. 국 없이 꾸역꾸역 밥을 넘기는 남편을 보니 내 목이 메이는 것 같아서 밥을 먹다 말고 달걀국을 급하게 끓였다. 국을 잘 안 먹는 딸도 먹고 싶다고 하길래 국 두 그릇을 만들어 내놓았다. 이미 밥 먹는 리듬이 깨졌지만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기에 다시 식탁에 앉았는데 다 먹고 난 딸이 일어서며 내게 한 마디를 했다. "엄마, 밥을 왜 그렇게 천천히 먹어. 아직도 다 못 먹었네."

이런! 달걀국 끓인다고 부산스럽게 움직인 건 까맣게 잊었나 보다. 먹다 말고 국을 끓인 나의 노고를 딸에게 일깨워주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음과 동시에 15년전 쯤 시가 식구들과의 저녁 밥상이 생각났다.

시부모님과 함께 시가 쪽 친척들이랑 저녁을 먹는 자리였는데 시부모님의 막내 아들과 결혼한 나는 서열이 꼴찌였다. 밥을 먹다가 반찬을 보충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밥 먹는 중이라고 버티고 앉아 있기엔 내 마음이 불편해서 여러 번 움직이며 더 필요한 반찬들과 물을 내왔다. 당연히 내 밥 먹는 속도는 느려져서 모두 숟가락을 놓았을 때도 밥이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마저 먹고 있는 내게 시가 친척은 한 마디를 했다.

"밥을 굉장히 늦게 먹는구나."

우라질! 내가 몇 번이나 밥 먹다 말고 잔심부름을 했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지. 서럽고 어이없었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그때 목소리를 못 낸 것이 약한 체기마냥 얹혀졌다. 그리고 결혼 생활을 하며 이런 저런 이유로 쌓여온 감정의 체기들은 가끔씩 속 불편할 때 나오는 헛트림처럼 다양한 기억들로 새어 나왔다. 늦게 먹는다고 한 소리 들었던 그 밥상 앞에서의 기억은 거의 잊고 살았지만 1,2년에 한번씩 아무 연결고리 없이도 불쑥 튀어나왔다.

그날 딸 아이가 아무런 악의 없이 한 말에 바로 그날의 기억이 소환됐다. 어쩌면 그분도 별 의미없이 한 말인데 내가 오랜 세월 서운해 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이상하다. 키 170cm에 임신 중일 때 빼고는 몸무게가 항상 50kg대 초반이었고 심지어 40kg후반대까지 빠져서 골룸 같다는 얘길 들은 적도 있지만 시어머니는 늘 내 옷 사이즈가 77인 줄 아신다. 큰 사이즈의 바지를 입어 보라고 건네시길래 입은 후에 크다고 보여 드렸지만 여전히 내 옷 사이즈는 줄어들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볼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필터가 장착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필터를 장착하고 곡해해서 듣고 보는 것일까?


솔직히 나는 내가 가진 역량이나 배경에 비해 더 많은 것을 받고 누리며 살아왔다. 결혼 전 어린 마음에 내가 좀 잘났나? 하는 자아도취도 있었고 예쁘고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주변 사람들도 꽤 있었다. 시부모님도 주변에서 듣거나 드라마에서 접하던 며느리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었고 지금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사위는 위에서 모셔 오고 며느리는 아래에서 데려 오면 좋다는데 말 그대로 딱 맞게 들여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건 너무 큰 상처였다. 부모님이 보기에 당신 아들보다 한참 모자란 사람이라는 걸 여과없이 드러내시는 데서부터 내 체기는 차곡차곡 얹혀져 갔다. 맨질맨질 빛나는 그릇인 줄 알았던 내가 찌그러진 양푼 냄비가 돼가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밥을 늦게 먹는다는 한 마디가 가슴에 더 박히고 오랜 세월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떠올랐다. 이젠 오해를 내려놓고 그날의 기억을 지워야겠다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면 참 좋겠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은 참 요상하다. 같은 말을 들었음에도 딸이 하는 말과 시가 친척이 하는 말은 결이 완전 다르다. 그래도 생각 없이 던진 딸의 얘기에 그때의 감정이 많이 옅어진 듯하다. 안 좋은 기억은 내게 득 될 일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잊기는 참 힘들다. 그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그때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 냈으니 다시 넣어두고 나를 괴롭히는 어리석은 일은 말아야겠다.

마음 한 번 바꾸면 마음이 덜 시끄러워진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참 어렵다. 이제 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필터를 조금씩 벗겨내며 살아야겠다고 다짐 해보지만 아마 여전히 "내가 결혼을 왜 했을까 돈이나 벌면서 편하게 살 걸"하는 푸념은 놓지 못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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