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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롭게 Jul 01. 2021

임금님 귀는 당나기 귀라고 소리쳐

대나무 숲을 찾아서

개별상담과 부부상담을 몇 차례 번갈아 진행했다. 상담사가 내게 남편과의 개별상담에 대해 언급하진 않았다. 그 부분이 좋았다. 뭐 당연히 내 개별 상담 땐 내게만 집중하는 게 맞는 거겠지만 말이다. 개별상담 중 유독 눈물을 많이 쏟았던 상담이 있었다. 바로 인형에 나 자신과 나와 가까운 이들을 각각 의인화시켜 그들과 나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상담 때였다. 








그날은 방에 들어서니 다양한 종류의 인형들이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상담사는 나와 가장 닮은 것 같은 인형을 골라보라고 했다. 이어서 부모님, 형제, 배우자, 딸, 절친까지 비슷해 보이는 인형들을 차례대로 집어 상담사와 내 사이에 있는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엔 뭔가 이 상황이 웃겼다. 그런데 막상 인형들을 쭈욱 둘러보니 내 사람들의 얼굴이 포개어져 보이는 듯했다.


그 상담은 인형놀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부모님한테 상처 받은 일이 있다면, 나를 나타내는 인형을 통해 표현한다. 그럼 상담사가 부모님 인형이 할 대사를 내게 알려준다. 난 그 대사를 부모님 인형을 통해 앵무새처럼 똑같이 대답한다. 그 대답을 듣고 있는 내 인형을 바라본다. 내 인형을 통해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상담사는 맨 처음에 가장 힘겨울 것 같은 인형을 맨 마지막 순서로 하자고 했다. 난 그 얘길 듣고 언니 인형을 제일 끝에다 놨다. 다른 인형들과의 대화가 무난히 지나가고, 마침내 언니 인형과 내 인형이 나란히 마주 봤다. 벌써부터 가슴 정중앙이 저릿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우물쭈물했다. 부모님도, 남편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내뱉어야 할지 막막했다.   








언니의 첫 가출을 기억한다. 언니가 중학교 2학년,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부모님은 일하러 나가시고 집에 안 계셨다. 안방 창문에는 돼지저금통 세 마리가 놓여있었다. 한 놈은 100원, 그 옆엔 500원, 마지막 돼지는 무려 1000원짜리 지폐가 들어있는 저금통이었다. 언니는 자연스레 1000원 지폐가 들어있는 저금통의 배를 갈랐다. 난 그 앞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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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회상에 잠겼던 나는 결심한 듯 내 인형을 째려봤다. 그래, 언제까지 내 가슴속에만 품은 채 끙끙댈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 지를 수 있는 대나무 숲이 지금 내 앞에 펼쳐져있는데 말이야. 상담사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언니... 난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내가 언니를 뜯어말릴 수 있었다면, 지금 언니는 조금이라도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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