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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롭게 Jun 10. 2021

출산 후 맨발로 쫓겨났던 그날 ②

한 사람은 존재하기로, 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로

그날은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날이기도 하다. 여든 중반이 다 되도록 정정하신 분이었는데 돌연 쓰러지셨다. 요양원에서 5년 넘게 인사불성 상태로 계시다 끝내 세상을 등지셨다. 엄마는 내 산후조리를 위해 우리 집에 머물고 계시다가 비보를 전해 듣고 그날 밤 급히 시골로 내려가신 거였다. 그때 남편과 내가 거주하던 곳은 공간이 매우 협소했고, 남편은 산후조리 기간 동안 나의 부모님 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손가락은 여전히 문 틈 사이에 껴 있었다. 난 절규했다. 내가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던 대상은 내 목숨을 위협하는 적군이었다. 어느 순간 바닥에 던져진 내 휴대폰이 보였다. 그걸 집어 들고 복도식 아파트의 계단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었다. 앞뒤 분간이 되지 않았고 드문드문 내 맨발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은 무용지물이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이런 사고 자체도 불가능했다.


옆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복도식 아파트였다. 이웃 중 한 분이 현관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뭔가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듯했으나 고개를 들진 못했다. 이내 탁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절망에 허우적거리게 만든 걸까. 분노에 잠식당한 내 감정은 바짝 메말라 쩍쩍 갈라졌다. 그냥 지쳤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다. 이 순간을 끝내고 싶었다. 유일한 해결책인 것 같았다.




  


아마 그때의 너도




응!? 걔가?!?




대학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동창생 중 한 명이 자살했다고 건너 건너 들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였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가끔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착했다. 밝았다. 반 아이들과 두루두루 지내는 편이었다. 아무튼 자살이라는 단어와 쉽사리 연결이 되는 친구는 아니었다. 당시 동창생들에게 그 친구의 자살은 굉장히 충격적인 소식이었고 많은 이들이 장례식에 갔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어떤 친분이 있어서 조의를 표하기 위해 갔다기보단 너무 믿기지가 않아서 사실 확인 차 갔던 게 컸다. 그 친구를 아는 내 고등학교 절친과 함께 가면서 온갖 추측들을 늘어놨다. 하지만 장례식장에 도착해 그 친구의 어머님을 마주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머님의 무거운 비통이 절절하게 전해져 우리의 경솔했던 발걸음을 일순 죄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몸속엔 위가 있다. 배가 고프면 음식물을 섭취하고 부르면 그만 먹고 주기적으로 비워낸다. 나와 그 친구의 감정의 위는 배고픔을 넘은 기아 상태였다. 둘 다 감정의 아사 직전에서 갈림길에 섰고 한 사람은 존재하기로, 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로 했다. 그뿐이다. 단지 누가 더 희망을 품고 삶의 의지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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