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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같은 그릇이 없는 살림살이

적어도 그릇을 마음대로 고르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오늘 밤 9시 30분 스키폴 공항에서 귀국비행기를 탄다. 인천공항에는 내일 16시 30분 도착한다. 길지 않고 짧지도 않은 기간 많이 보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스케줄러의 치밀한 계획 덕분이다. 스케줄러가 짠 오늘 일정은 짐 싸고 동네 공터에서 열리는 시장구경, 동네 인근 수로 산책이다.

짐을 꾸리는데 트렁크가 너무 헐렁해 트렁크 내 물건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것 같다. 물건에 대한 욕심이 줄어들었으니 다행이다. 생각해 보니 여행지에서 구입한 것이 없다. 예전 같았으면 그리스에서 가죽으로 만든 빈티지스타일 보스턴백 하나정도 구입했을법한데 이번여행에서는 여행지 이름이 새겨진 자석스티커 하나 산 것이 없고 그리스 올리브오일 몇 병만 구입했다. 트렁크는 비우고 따뜻한 마음과 아름다운 추억만 가득 채워가려 한다.


아침식사는 어제 구입한 깜빠뉴와 과일, 커피다. 마트에서 구워파는 빵인데도 맛있다. 제과점에는 달디 단 케이크가 많다. 마트에서 구워파는 크로와상도 한국 프랜차이즈 제과점 수준은 된다. 좋아하는 식빵과 깜빠뉴가 크고 맛도 좋고 염도도 낮은 것 같다. 가격은 4~5천 원으로 식빵과 깜빠뉴 크기가 한국의 두 배이며 먹은 후 속도 편하다. 시장구경하러 동네 장터에 왔다. 규모는 크지 않다. 치즈, 과일, 옷, 통닭, 하링샌드위치 등을 판다. 포도, 미니양배추 등 간단한 장을 봤다. 오늘은 스케줄러가 부모에게 요리솜씨를 선보일 예정이다.

집 주변 수로에도 유람선이 다니고 휴일이라 크고 작은 개인보트들도 많이 다닌다. 수로 주변 단독주택들은 규모도 있고 부촌인지 보트파킹 건물이 딸려있다. 마당 넓은 집은 골프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마당이 넓다. 정문은 도로 쪽이지만 우리가 산책하고 있는 뒷문 쪽은 폭이 좁은 수로가 지난다. 뒷문에는 자동으로 전개되는 다리가 있어 좁은 수로를 건널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Teds Bistro'라는 식당에 들러 가벼운 점심으로 와플 포테이토를 먹었다. 와플 포테이토는 와플문양의 벌집처럼 만든 감자를 튀긴 것으로 바삭하니 맛있다. 아내는 토마토주스를 좋아한다. 토마토주스를 주문했더니 ‘BIG TOM'이라는 spiced tomato mix를 갖고 왔다. 토마토주스이기는 한데 토마토케첩 맛과 흡사하며 게다가 짜고 시다. 암스테르담에서 경험해 봤기에 반품했다.

오늘도 날이 좋아 어느 곳을 바라봐도 경치 좋은 날이다. 내부보다 야외테이블에 손님이 많이 앉았다.

buitenplaats(시골 저택이란 뜻)라고 하는 고풍스러운 저택이 있다. 뮤지엄이 아니고 갤러리로 유화와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작품마다 가격이 매겨져 있으며 중형 유화 만유로, 소형은 오천유로정도 한다. 갤러리 분위기는 매우 고급스럽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게 옷을 차려입은 귀부인과 신사들이 많다. 높지 않은 구두, 모직 롱코트에 하얀 햇을 쓴 여인은 엘리자베스여왕이 젊었을 때 모습과 비슷하게 기품이 느껴진다. 나같이 청바지를 입었거나 젊은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 크레타 Rogdia라는 곳의 높은 산장, 멀리 Agia 해안 절벽과 에게해가 바라다 보이는 저택에 묵었을 때 일반인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일반인과 다르게 사는듯하다.


스케줄러가 저녁을 준비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저녁을 제공하므로 채식위주로 저녁을 준비했단다. 막내가 덜렁거리며 허술한 것 같아도 꼼꼼한 아버지를 뛰어넘으려 한다. 이번 여행일정을 계획하고 준비한 것을 보면 꼼꼼하고 디테일이 있다.

하얀 아스파라거스, 방울양배추, 대파 비슷하게 생긴 ‘릭’이란 것으로 가벼운 저녁을 준비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식탁 위에 같은 접시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긴 수납장에 있는 그릇들도 모양이 비슷하면 색상이 다르거나 색상이 비슷하면 생김새가 달랐다. 암스테르담 핸드메이드 매장에서 그릇 4개를 구입했을 때도 모양과 생김새가 제각각이었다.


객관식 세대이며 획일과 표준의 시대를 살아온 부모세대가 볼 때는 식탁 위가 무질서하다. 하지만 아이는 이곳에서 적어도 그릇을 마음대로 고르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모양과 문양이 같은 식기세트가 있는 집에서 자란 막내가 네덜란드에서 씩씩하고도 자유롭게 잘 살고 있어 다행이다.

기온이 조금 떨어지자 롱패딩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속에 핫팬티에 후드집업을 입고 다니는 막내가 있었다. 여기는 제각각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나라이며 주위에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지수가 높은지도 모른다. 막내의 획일화되지 않은 취향과 행동과 생각을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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