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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4. 열하일기(박지원著, 매월당刊, 박지훈옮김)

實學者(실학자)라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 학자보다는 기술자에 가깝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노론 명문가출신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실학자이자 대문장가이다. 탑골공원근방으로 이사 후에는 나이와 신분을 초월해 이서구, 유금,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등과 어울리고 학문적 교류를 했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는 당시 천대받던 서자였으며 박제가는 제자이기도 하다.

박지원은 북학파의 영수로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重商主義(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청나라를 배격하려는 보수파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利用厚生(이용후생)의 實學(실학)을 강조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개국을 했는데 보수파는 왜 청나라를 배격하려 했을까? 역사공부 기억이 가물가물해 역사를 더듬어 봤다.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조선이 청나라를 배격하려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조선의 국가통치이념은 명나라 때 받아들인 유교였으며, 당시 여진족은 변방의 미개부족이었다. 小中華(소중화)를 자부하던 조선은 미개인의 나라인 청나라와는 문화적으로도 맞지 않았다.

조선은 명나라(1368~1644)로부터 유교와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았다. 명과 청(후금, 여진족의 나라)이 공존하던 시기 조선은 主和論(주화론: 청과 화친을 맺어야 한다), 主戰論(주전론: 명나라와의 의리가 있으므로 청과 전쟁해야 한다)으로 혼란스러웠다. 광해군은 主和論을 주장했으나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강조하며 主戰論을 택했다. 이 결과 병자호란(1637.01.03~1637.02.24)으로 이어졌다.


연암은 3000리 1200km, 한양에서 1780년 5월 25일 출발 10월 27일 5개월 만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북중국과 남만주일대의 문인과 명사들과의 교류,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3년에 걸쳐 소상하게 기록한 것이 총 36권의 열하일기다.

필기구가 붓밖에 없을 시기에 매일매일 여정을 기록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예리한 관찰력과 눈썰미가 더욱 놀랍다. 實學者(실학자)라 그런지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 학자보다는 기술자에 가깝다.


1780년 7월 5일

주인이 방고래를 열어놓고 가래로 재를 긁어모으고 있어 구들 모양을 대략 엿볼 수 있었다. 한자 높이 남짓 구들바닥을 쌓아 반반하게 만든 다음 부순 벽돌을 바둑돌 놓듯 굄돌을 놓고 그 위에 벽돌을 깔았다. 벽돌의 두께가 일정해 굄돌로 사용해도 절름발이가 되지 않고 가지런하게 깔아놓으면 틈이 생길 리 없다. 고래의 높이는 겨우 손이 드나들 정도이고 굄돌은 서로 번갈아 들어서 불목이 되어 있다. 불이 불목에 닿으면 마치 빨아들이듯 해서 불꽃은 재를 휘몰아 물목을 메우는 듯 세차게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여러 불목이 서로 잡아당겨 도로 나올 사인 없이 재빠르게 굴뚝을 빠져나간다.

우리가 개자리라 부르는 굴뚝 높이는 한길이 넘는다. 불꽃이 재를 몰고 고래 속에 떨어뜨리기에 3년에 한 번씩은 고랫목을 열고 재를 쳐내야 하고, 부뚜막은 한길이나 땅을 파서 위로 아궁이를 내고 땔나무는 거꾸로 넣는다. 부뚜막옆에는 큰 항아리만큼 땅을 파고 그 위에 돌덮개로 덮어서 봉당바닥과 같은 높이로 한다. 그 움푹 판 곳에서 바람이 일어나 불길을 불목으로 몰아넣기에 연기는 조금도 새지 않는다.

굴뚝은 큰 항아리만큼 땅을 파고 지붕높이만큼 벽돌을 탑처럼 쌓아 올린다. 연기는 항아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서로 잡아당기고 빨아들이는 듯하다. 굴뚝에 틈이 생기면 약한 바람에도 아궁이 불이 꺼지는데 우리나라 온돌이 불을 때도 골고루 덥지 않은 것은 모두 굴뚝의 방식 때문이다. 싸리로 엮은 바구니에 종이를 바르거나 나무통으로 굴뚝을 만들고 틈이 생기면 흙으로 바르지만 연기가 새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바람이 크게 불면 연통이 있으나 마나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집안이 가난해도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겨울이 되면 항상 코 끝에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니 이 구들 놓는 방법을 배워가서 삼동의 그 고생을 면했으면 좋겠다.


중국식 벽돌장판보다 기름종이장판을 바른 조선의 온돌이 좋다는 변계함의 반론에 ‘벽돌 장판이 조선의 온돌보다 못하다는 것은 맞지만 중국의 구들 놓는 방법을 본받아 조선의 온돌 놓는 방법을 개선하고 그 위에 기름종이장판을 바르는 것을 누가 금할 리 있겠는가. 우리나라 온돌 놓는 방법은 여섯 가지 단점이 있으나 개량하려는 사람이 없으므로 내가 연습 삼아 한번 논할 테니 조용히 들어나 보게.’

진흙벽돌 위에 돌을 얹어 구들을 만드는데 돌의 크기와 두께가 일정치 않아 조약돌로 고여놓지만 돌이 타고 흙이 마르면 허물어지는 것이 첫 번째 단점이다. 돌이 울퉁불퉁하여 흙으로 메워 평평하게 하지만 불을 때도 고루 덥지 않은 것이 두 번째 단점이다. 불고래가 높아서 서로 호응하지 못하는 것이 세 번째 단점이고 벽이 성기고 얇아 쉽사리 틈이 생기므로 방안으로 연기가 들어오는 것이 네 번째 단점이다. 불목이 목구멍처럼 되어있지 않아 불이 빨려 들어가지 않고 땔나무 끝에서만 넘실거리는 것이 다섯 번째 단점이다. 방을 말리려면 땔나무 백 단은 들고 열흘 안으로 입주 못하는 것이 여섯 번째 단점이다. 벽돌 수십 개만 깔아놓으면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몇 칸의 온돌이 완성되어 그 위에 누워 잘 수 있으니 얼마나 간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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