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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8. 삶의 실력(1) (최진석著, 위즈덤하우스刊)

이 책은 광주에서 한 장자강의 19강을 정리한 것이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장자’는 언제나, 어느 누가 엮어낸 책을 읽어도 재미있다. 해석하고 엮어낸 사람마다 조금씩 의미를 달리하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장자’와 관련된 책자를 발간한 여러 명의 작가 중 최고를 꼽으라 하면 ‘최진석’ 교수가 아닐까 한다. 노장사상을 전공한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장자사상을 기반으로 개인과 국가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발전해야 할 것인가를 현실과 부합하게 제시해 준다.

이 책은 장자강의를 기반으로 정리한 것이라 重言復言(중언부언)하는듯한 표현이 많다. 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세한 설명으로 의미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잔소리 같지만 친절한 책이다. ‘최진석’ 교수가 기대를 저버린 기억은 없다. 유익하고 재미있다.


들어가며

장자는 현실을 초탈하여 현실과 다른 차원의 특별한 경지를 누리려 한 사상가로 이해되곤 한다. 장자는 기술문명도 부정하고, 더 잘 살아보려고 열심을 내는 적극적인 의지를 인생 하수들이나 갖는 하찮은 태도로 여기며, 문명의 진보를 추구하기보다는 원시적 자연성을 더 지키려 한 사상가로 다뤄지곤 한다.

이런 이해는 세계와 삶에 대한 인식의 넓이나 깊이가 충분하지 않고, 지적으로 게으른 데다가 삶의 투지까지 약해져서, 어쩔 수 없이 삐딱해진 사람들이 갖게 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이해다. 삐딱한 태도로 자신의 비루함을 마치 정의나 순수를 지니는 수난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정당화하며 살 것인지, 그래도 한번 사는 인생, 율동감으로 충만한 실력 있는 삶을 밝고 환하게 살 것인지 정해야 한다. 장자는 실력 없는 삶을 정당화하는 사상가가 아니었다. 내내 실력 있는 삶을 살다 가라고 독려했다.


삶의 목적은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기 삶의 터전을 소홀히 대하고, 자기를 파괴하고, 자기 생존의 질과 양을 줄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장자가 자신의 사상을 논변이 아닌 이야기 형식으로 서술한 것은 이야기의 힘이 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생각의 양과 질을 증가시키는 데는 논변보다 이야기가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약동하는 시절이 있었다. 건국 - 산업화 - 민주화라는 비전을 세우고 하나를 이룬 다음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에는 시작부터 장점과 취약성을 동시에 가진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취약성은 장점이 날아오를 높이를 제한한다. 한국은 장점이 최고로 발휘되어버리고 난 후 한계에 갇혀 취약성이 장점을 누르기 시작한 상황이다.

취약성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유의 종속성이다. 세상의 모든 물건과 제도는 생각이 만든다. 우리 삶을 채우는 물건과 제도 가운데 우리가 먼저 만든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창의적으로 사유한 적이 거의 없음을 뜻한다. 이는 우리 삶을 스스로 생각해서 산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생각의 결과를 따라 살았다는 증거다. 우리 외부에서 한 생각의 결과를 죽어라 따르거나 수용하면서 산 것이다. 우리가 선도국가가 아니라 추격국가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사유의 종속성에서 비롯된 결과다.

선도국에 이르지 않고는 더 자유롭고 더 독립적이고 더 창의적이고 더 풍요롭고 더 안정적 일 수 없다. 한계를 폭파하고 건너가는데 장자가 필요하다.


장자를 펼치자마자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큰 바다부터 만난다. 물고기가 몇천 리나 되는 크기로 성장한 후 구만리를 튀어 올라 한 번의 날갯짓으로 6개월을 나는 붕이라는 새로 변신하더니 남쪽의 이상향을 향해 여정을 튼다. 어떤 한계도 없는 절대자유의 경지다.

사유의 종속성에 빠져 오래 살다 보면, ‘정해진 마음’에 갇혀 마음이 작아진다. 사람이 굵지 못하고 자잘해지며, 자잘한 사람이 일구는 문명의 크기는 한계에 갇혀 팽창하지 못한다. 별을 보고 감탄하거나 별처럼 빛나는 사람에게 박수치는 일로 세월을 보내느라 빛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사유의 종속성에 갇히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기 생각이라 확신하며 산다. 장자의 표현에 의하면 ‘정해진 마음(成心)’에 갇힌 것으로, 마음이 굳어버리면 이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회의 극단적 분열이나 이념갈등은 정해진 마음으로 사는 태도가 만들었다. 정해진 마음을 진리로 확신하기에 아무리 화합과 전진을 말해도 정해진 마음의 한계를 부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사람 취급도 안 하고 자신은 천사고 상대편은 악마다. 한걸음만 물러나도 어리석고 파괴적이란 것을 알지만 우리의 德(덕)은 한걸음에도 인색할 정도로 야박해졌다.


德이 야박해졌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어떻게 살고 갈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이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힘, 자기로 살게 하는 힘이 ‘德’이다. 질문하는 힘도 德에서 나오고 선악을 분별하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힘도 德에서 나온다. 세상의 주인은 대답하는 자가 아니라 질문하는 자이며, 실력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질문하고 건너가는 자라면 삶의 실력은 자로 ‘德’의 발휘일 뿐이다.


자신을 정해진 마음에 가두고 살 일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탐험가로 태어나지만 스스로 가두고, 맥이 빠지고, 야박해지며 자잘해진다. 당신을 잔챙이로 만들고, 꿈꾸지 못하게 억압하고, 불안에 휩싸이게, 이웃을 미워하게, 겁쟁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어려서는 그러지 않았으나 是非善惡(시비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정해진 마음을 꽉 채우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장자는 특히 ‘제물론’에서 시비선악의 판단기준을 무력화하거나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비선악에서 벗어나려면 시비선악보다 한 계단 올라서야만 가능하다. 한계단위애서 시비선악을 지배하는 시선 즉 미학적 시선을 장착해야 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지만 대국적 차원에서 자신의 옳음을 양보하거나, 자신이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 악행을 바로 응징하지 않고 조금 기다려주는 일, 상대의 주장이 그른 줄 알면서도 우선 받아들여 보는 일, 깨달은 자가 깨달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 앞에서 바보처럼 서 있어 주는 일, 부자이면서 가난한 사람 앞에서 배불리 먹지 않는 일 등등은 모두 시비선악 자체가 아니라 미학의 감수성이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 한 단계 도약한다는 말은 진과 선의 차원으로 살던 갊을 미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뜻이다. 장자는 시비선악이 만들어낸 갈등을 풀어헤쳐 평화롭고 생산적인 삶의 풍경을 만들고 싶으면 우선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마치 책받침 두께도 안 되는 얇은 틈새를 천리마가 휙 하고 지나는 것처럼 순간이다.”

삶이 매우 짧아서 금방 죽는다는 사실을 내면화하면 내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나를 궁금해하면서 나를 나이게 하는 힘인 ‘덕’이 두터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누구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등등 나를 궁금해하면서 두터워지는 ‘덕’으로 나는 우주적 팽창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절대 자유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가며

은사님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은사님께서 장자의 ‘인간세’ 편을 들어 말씀하셨다. ‘지식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다.’ ‘인간세’ 편에 ‘잘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잘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로 가라. 의사 집에 환자가 모이는 것이다.’ 이것은 안회가 기억하는 스승 공자의 말이다.

‘인간세’ 편은 안회가 스승의 말씀에 따라 위나라로 가겠다고 스승에게 허락을 청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안회가 보기에 위나라는 무도한 군주로 인해 국민들은 비탄에 빠지고 망하기 일보직전인 나라였다. 공자는 안회가 갖춰야 할 것도 갖추지 못했기에 위나라 군주의 난폭함 따위에 간섭할 겨를이 어디 있냐며 힐난한다. 먼저 자신의 덕을 쌓아야 남을 변화시킬 수 있다며 ‘心齋(심재)하라’고 가르친다.心齋는 마음을 재계하라는 뜻이니 ‘덕을 쌓는다’로 이해할 수 있겠다.


- 이 책은 광주에서 한 장자강의 19강을 정리한 것이다. 따져보니 장자의 10%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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