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하는 것은 꼰대질밖에 없다.
20년 전, 회사 선배 아들이 협력업체 직원으로 입사했다. 다른 협력직원보다 나이가 많아 형뻘이었고, 오지랖 넓은 그가 리더 역할을 했으므로 동료가 잘못해도 그를 야단쳤다. ‘그 정도밖에 못할 거면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그만둬라!’ 가슴을 아프게 하는 한마디였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이라 홧김에 술 먹고 지각하는 등 작은(?) 반항을 해서 또 야단맞고, 동료가 잘못해도 야단맞으니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부동자세로 씩씩대며 분을 삭이지 못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그는 대학전공이 건축 분야라 발전소 정비업무와는 맞지 않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는 성격도 차분해졌다. 또한, 자연스럽게 협력직원들의 리더가 된 그는 최선을 다했고 충분히 역할을 감당했다.
월급은 적고 험한 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협력직원들은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 이직이 잦은 편이었다. 이로 인해 정식직원들이 기술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 악순환이 지속하였으나 몇몇 협력직원들은 성실함으로 그 고비를 넘겼다. 성실한 직원들에게는 또 다른 숙제를 줬다. ‘발전소 밥을 먹고 살기로 했다면 국가기술 자격증을 따야 한다. 이 나이에? 라는 말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젊다.’, ‘맡은 일을 끝내지 못하면 퇴근 못 한다. 개인일정은 회사업무에 맞춰라’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공부 진도를 점검하고 잔소리를 하니 진저리가 났을 듯하다.
이제는 세상이 바꿔 그런 막말을 쏟아내면 직급 갑질에 해당하지만 당시에는 용납되고 묵인되던 시기였다. 영광원자력발전소에서 보낸 6년 동안 그들은 구박을 많이 받았고 칭찬은 기껏해야 ‘수고했다. 퇴근 후 모여라, 저녁 사줄 테니.’ 정도였다.
구박을 잘 버텨낸 협력직원들은 다른 팀 협력직원들과 달랐다. 부지런하며, 열정이 있었고, 업무의 완급을 알아 급한 일이 발생하면 퇴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야간근무를 했다. 다른 팀 주임이나 간부들은 우리팀을 부러워 했고 비법을 알고 싶어 했다. ‘어떻게 전기팀만 가면 애들 눈빛이 달라지는지 몰라. 우리 애들은 어슬렁거리는데 전기팀 애들은 뛰어다니고 눈빛이 살아 있어.’
당시 우리 팀 분위기가 그랬다. 정식직원들도 갖기 어려운 워크맨쉽을 협력직원까지 갖고 있었다. 모든 식구는 일할 때는 열정으로 재미있게, 놀 때는 치열하고 신명 나게 놀았다. 체육대회를 해도 우리 팀보다 두 배나 커다란 팀들이 당해내지 못했다. 현장을 이끄는 주임이 ‘이번 체육대회 목표는 1등이다.’ 한마디만 하면 모든 식구는 술 먹지 않고 경기에 몰두했다. 물론 1등 한 이후의 술집 분위기는 월드컵 우승했을 정도의 열기다.
정식직원들은 신분 구분을 두지 않아 협력직원들도 같은 전기팀 식구라는 인식을 하게 했다. 특히 급여가 적은 협력직원들이 먹는 것에 대해 마음 상하지 않게 배려했다. 늦게까지 일할 때면 저녁 식사를 챙겨줬고 돼지 잡아 체육대회 하는 날에는 남은 고기들은 협력직원들이 먼저 갖고 가게 양보했다. 물론 협력직원들은 금전적으로 기여하지 않았으나 평소에 열심히 일하는 행동으로 대신한 것이다. 정식직원들만 갹출하여 부서비용을 내어 회식하면 미안하다며 협력직원들도 갹출하겠다 했지만, 직원투표에서 부결되었다.
신분 구분 없이 오래 버티고 제 갈 길을 찾아가는 후배들이 대견하다. 협력직원 중 성실함이 돋보였던 또 다른 친구는 직원 공채에 합격하여 정식직원이 되었으며, 구박받던 친구는 민간정비회사의 촉망받는 간부가 되어 보령에서 하동으로 근무지를 옮겨 찾아뵙기 좋다며 연락했다. 아이들은 장성해서 대학생인 50대에 접어드는 중년이 되었다. 근 10년 만에 보는 얼굴이며 휴가 내어 옛날 팀장을 모시겠다고 찾아왔으니 고맙기만 하다.
구박받던 친구가 밥을 사니 미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얼마나 대견한지 모르겠다. 나이 차가 10년 정도이니 형님뻘이라 생각하는데 그들은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한단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그들은 아직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인 20대 후반이나 30살에 불과하고 나는 나이 40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저녁을 공짜로 먹었으니 뭔가 보답을 해야 하는데 역시 내가 잘하는 것은 꼰대질밖에 없다.
‘여러분들은 이제 중견간부, 선배가 되었다. 여러분들이 부정해도 요즘 입사하는 친구들이 보면 당신들은 꼰대들이고 물론 나는 꼰대 조상이 되겠지. 당신들은 중간계층이라 한편으로 처장들을 꼰대라 생각하고 직원들과 같은 부류이며 참신한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처, 실장들은 당신들을 비슷한 연배로 간주하고(억울하겠지만), 후배들은 당신들을 조금 젊은 꼰대로 인식할 뿐이다(이 대목에서는 더욱 억울하겠지만).’
‘후배들에게 대접받지 못한다 해도 당신들은 팀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있으므로 그에 걸맞은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팀장의 성과는 팀원들의 성과를 積分(적분)한 것이므로, 팀원들의 성과를 올리기 위해 뒷바라지해야 하는 것이 팀장의 역할이다.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후배들의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 후배들이 술로 회식하는 것을 싫어하면 꼰대들끼리는 술을 먹더라도 영화 보고 볼링 치러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유의사항이다. 내가 당신들에게 했듯 ‘맡은 일을 끝내지 못하면 퇴근 못 한다. 개인일정은 회사업무에 맞춰라’ 한다면 고발당할 수 있다. 그들은 업무에서 보람과 성취를 느끼지 못한다면 열정이 생기지 않는 세대다. 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보람과 성취를 이야기해주고 맛보게 해야 한다.‘
구박받던 친구들은 20년 전과같이 귀를 쫑긋하며 귀담아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