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외 5명著, 서해문집刊
고미숙(고전인문학자): 청춘으로부터의 해방, 몸으로부터의 자유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수명은 125세예요. 성장기가 25세로 성장세포가 열려있으며 그 이후는 성장하지 않아요. 여기에 곱하기 5를 하면 125세인데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는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00세 인생 앞에서 굉장히 당혹스러워요. 문명적으로 봤을 때 조선시대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때는 125세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의학, 윤리, 사회정치적 책임들이 설정됐는데 우리는 아무 준비도 없이 100세 시대를 살게 되었어요. 게다가 50대에 정년을 맞으니 당혹스러워하는 겁니다.
산업혁명 이후 몇 백 년 동안 우리가 인생을 편향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인간은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돈 쓰다가 50, 60에 정년을 맞이하면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일하다 죽어버리고, 돈 쓰다 죽어버리고, 돈 벌다 죽어버리라는 ‘자본주의의 생로병사관’이었어요. 이 진실을 심각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인류를 배고픔과 전염병에서 구제했고, 여름에는 덥지 않고 겨울에는 춥지 않게 만들었잖아요? 반면 인간 삶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 빈곤해진 거예요.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전신은 빈곤해진다’ 이것이 우주의 대원칙입니다.
그동안 인류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열망해 왔는데, 고령화사회가 정말 좋은 사회일까요? 고령화 문제를 다루는 뉴스를 보면 긍정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광고에서는 100세 인생을 준비하라고 보험에 가입하라는데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서 오래 살라는 건지?
예전에는 환갑이 굉장히 중요했잖아요. 열다섯쯤에 어른이 되어 그걸로 인생의 봄을 마치고, 서른까지 여름, 마흔다섯까지 가을, 그다음 예순까지 겨울로 사는 겁니다. 60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으로 보이지만 생로병사,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거친 존재의 충만함이 있었던 거죠. 이 계절을 모두 겪어야 비로소 인생에 대해 뭔가 아는 사람으로 생각했고 , 그래서 노인문화가 문화 전체를 이끌어간 거예요. 노인이 지도자이자 현자였죠,
봄-여름-가을-겨울은 하루 24시간에도 적용됩니다. 새벽 3시 반이 해가 뜨는 시간으로 하루의 봄이죠. 9시 반까지가 봄이라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요. 오후 3시 반까지가 여름으로 에너지를 펼치고 창조하는 시간입니다. 9시 반까지는 가을로 열매를 거두고, 새벽 3시 반까지는 겨울로 씨앗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만약 하루 종일 해가 떠 있으면? 밤이 되는데도 계속 일을 하면? 미칩니다. 쉬고 자는 게 중요하기에 노동시간을 정했는데 옛날에는 노동하느라 잠을 못 잤어요. 그래서 투쟁해서 노동시간을 줄였는데 지금도 안 자요. 음주가무와 먹방, 포르노, 게임, 쇼핑 드라마 보기 이런 거 하느라 잠을 안 자요. 모두 ‘상품’으로 자본주의는 이 짧은 쉬는 시간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낮에는 노동해서 돈 벌고 밤에는 소비해!라고 명령하죠. 자연의 리듬이 어긋나니 중년 이후 수렴해야 하는 타이밍도 놓칩니다. 그래서 40대 이후 청년기처럼 투자하고 창업하다 망합니다. 계속 청춘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자본주의는 계속 일하라고 말합니다. 화폐 때문입니다. 일과 일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가 필요한 겁니다. 그렇다면 중년 이후 얼마나 있어야 안심이 될까요? 10억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다시 열등한 청춘이 되는 겁니다. 늙고 병들고 노쇠해진다는 것의 축복은 많은 게 필요 없어지는 거예요. 쇼핑도 그렇게 당기지 않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도 없고,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 위험하고요. 양생의 대원칙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小食(소식)’입니다. 사실 많은 돈은 필요치 않아요. 요즘 ‘먹방’이 너무 많아 걱정입니다. TV에서 나오는 대로 다 먹는 것은 담배보다 더 해로워요. 쉬는 시간에도 먹고 사고 소비하게 만드는 것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청춘의 아류로 남게 만드는 겁니다.
2천 년 전 로마 철학자 키케로가 얘기했어요. ‘노년이 됐다는 것은 젊은 날의 충동과 나를 지배하는 야성적인 질풍노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삶에 대한 통찰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철학입니다. 그런데 철학 공부는 혼자 하면 외로워 우정이 필요한 거예요.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혈연적 관계망에서 벗어난 거예요.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자식들은 커서 자기 길을 가고, 나는 그 책임에서 벗어나 비로소 세상에 뚜벅뚜벅 나온 거예요. 온전히 세상과 만나는 일만 남았는데 그런 존재들의 결합이 우정이에요.
철학을 같이 하는 우정을 동양에서는 道伴(도반)이라 합니다. 여기서 배움이 일어나면 사제지간 이죠. 스승이면서 친구 이를 師友(사우)라고 하는데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완성된 관계는 사우관계예요. 스승인데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낼 수 있고 친구인데 스승처럼 존중할 수 있는 관계 이런 관계가 인간이 태어나서 맺을 수 있는 최고의 관계입니다. 부부도 이런 관계가 되지 않으면 황혼에 헤어질 일만 남아서 같이 못 삽니다.
오랜 시간 인류의 문화는 지금과는 다른 마지막 순간을 향유해 왔습니다. 인디언문화를 보면 여성은 폐경 이후에 남성도 환갑 이후에 그 마을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않는 대신 문화를 생산하는 존재가 노인이었고 마을의 운명을 예견하는 것은 할머니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후 노인들은 관리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노동이 가혹해서 워낙 수명이 짧았어요. 그러다 이제 노인이 가치 있는 시대를 맞이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가요. 이 시점에서 노인이 해야 할 일은 직업을 다시 얻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비전과 자기 존재의 근원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장이 열려 네트워크가 활발해지면 노인과 청년이 소통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지혜로운 할머니와 현명한 할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대단한 축복입니까? 아이들의 심리적 불안은 하소연할 조부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없고 엄마에게 이야기해도 소용없으니 정신과를 가는 거죠. 그런데 할머니에게 가서 얘기하면 말하는 순간 치유돼요. 이러한 노년 문화를 회복해야 합니다.
시대의 분위기나 잘못된 문화를 바꾸기 위해 집단 차원에서 뭔가를 해야 하고 정치인이 바꿔주기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내가 바꾸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꾸는 만큼 우주가 바뀝니다. 도전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