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계획을 積分(적분)하면 인생 설계가 되는 것
인생이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끝은 보이지 않고 길을 잃기도 하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기루를 쫓기도 한다. 인생은 사막과 같아 목표를 볼 수가 없고 목적지에 다다랐는지 아닌지도 알 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방향감각이다. 자신을 안내해줄 내부의 나침반을 찾는 것이 중요하며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스티브 도나 휴 著, 김영사 刊) -
청춘은 아름답지만 고달프기도 하다. 고달픈 청춘을 버티는 힘은 패기가 아닐까 한다. 노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툴고 한편으로 무모해 보이기도 하지만 꺾을 수 없을 것 같은 패기는 젊으니까 가능하다. 아직 인생의 목표가 명확히 설정되지 않았기에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는 것은 커다란 도움이 된다. 사막 길을 걸어봐야 하고 캄캄한 숲속도 헤매어 봐야지 방향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 시기에는 설사 모래 수렁에 빠진다 해도 탈출하기 위해 타이어의 바람을 뺄 필요가 없을 듯하다. 경험이 쌓이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타이어의 바람은 저절로 빠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인생의 좌표를 빨리 설정하면 헤매는 시간이 줄어들겠지만 젊은 시절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듯 고생하며 긴 시간을 갖고 시행착오를 반영하여 인생 좌표를 그리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발전소와 회사업무는 목표달성을 위한 계획에 의해 움직인다. 내 자신도 평생을 계획 수립하는 업무를 수행했지만 내 삶의 계획을 설계했던 시기는 무척 늦었다. 내일까지, 다음 달까지 해야 할 업무를 챙기고 돌발적으로 일이 생기는 상황 속에서 동분서주하다 보니 내 삶이 없었고 삶의 발자취를 돌아볼 여유도 갖지 못했다. 해 놓은 것이라고는 모두 회사 관련된 업무와 어떤 계획이든 빠르고 잘 만들어 낸다는 평판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일하는 것과 출근하는 것이 그리 행복하게 느껴졌던 시기도 아니었으며 원래 직장생활은 이런 것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일하는 기계처럼 회사업무만이 인생의 전부라 여겼던 시기가 지나니 내가 가는 방향이 틀린 것 같았다.
내가 밤늦게까지 왜 이러고 있지? 이렇게 사는 것이 내가 원했던 삶이었나? 회사업무를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추구했던 목표가 이것이었나? 나 자신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자 원초적인 부분에까지 다다랐다. 행복은 무엇일까? 내가 좋아하는 일은 어떤 일인가? 출근이 행복해지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한 것인가?
인생의 좌표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40대 초반이었고 많은 질문에 답 해준 것은 책이었다. 책 속에서 수많은 공자와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을 만나고부터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 보이기 시작해 40대 말이 되어서야 어설픈 상태의 인생 설계와 좌표를 그리게 되었다.
후배들에게 인생 설계를 해보라고 권한다. 인생을 微分(미분)하면 청년, 장년, 노년이고 또다시 미분하면 10대, 20대 이를 재차 미분하면 1년 단위, 월 단위가 되므로 월간 업무계획 만들듯 인생 계획을 만들어 봐라. 거꾸로, 만들어진 연간 계획을 積分(적분)하면 인생 설계가 되는 것이니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말이 쉽지 계획 수립에 경험이 많은 사람조차도 인생 설계를 하라하면 막막해한다. 회사 업무계획은 쉽게 수립하면서 왜 본인 자신의 인생 설계를 하라면 막막해하는 것일까? 인생 종착점인 죽기 직전 삶의 목표, 삶의 좌표에 대해 고민한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에서의 목표, 가정에서의 목표들이 설정되면 이것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더 나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내 삶을 건강하게 하며 흔들리지 않는 좌표가 그려지고 방향성이 정립될 것이다.
커다란 운동장이나 넓은 벌판을 걸을 때 목표 지점이 없으면 갈 짓자 걸음을 하게 된다. 기나긴 인생도 마찬가지로 좌표가 없다면 갈팡질팡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인생의 좌표? 목표? 행복과 불행? 우리가 찾으려 하는 많은 것들이 놀랍게도 바로 옆에 있다. 찾으려 했으나 좌표나 목표가 잘못되어 찾지 못했거나 이 세상에 없는 허상만을 쫓았는지 모른다.
성철스님이 1982년 초파일 법회에서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주제로 법어를 말씀하셨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내 삶에 있어 커다란 목표, 행복, 도원경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있다는 말씀이겠지요.
1986년 초파일 법어에서는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모두가 평등하여 낱낱이 장엄합니다. 입은 옷은 각각 달라 천차만별이지만 변함없는 부처님의 모습은 한결같습니다. 당신네의 생신이니 영원히 다하도록 서로 존경하며 서로 축하합니다.”
‘빈부귀천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 삶이든 중요하지 않은 인생이 없으니 서로 존경하고 내 삶을 살아갑시다.’라는 것이 주된 말씀 같다.
내 삶이 흔들릴 때, 무엇이 행복인지 분간되지 않아 밤늦도록 포장마차에서 취해도 보고 인생에 대해 갑론을박했지만 결국 정답은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을 책에서 찾았다. 답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어릴 적 읽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 읽고 행복, 인생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현재도 삶의 좌표를 만들고 수정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사실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표지판 없는 낯선 길을 걷는 것과 같아 내가 생각하고 정의한 ‘행복한 삶’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 정답을 찾아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좋은 아버지’, ‘100억대 부자’가 목표일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태도가 남에게 비춰지고 평가되는 모습이다. 물론 내가 나를 평가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내 인생의 좌표 끝에는 ‘좋은 아버지’가 있다. 몇 번의 경로 수정이 있었지만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좋은 아버지’로 가는 길은 화려하고 거창하지 않을 듯하다. 바른 길을 가려고 노력하고 조그만 행복을 찾으려는 삶을 산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지난주에 이은국교수가 이야기한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 ‘한국인의 일상을 조사한 연구를 보니 하루에서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행위는 먹을 때와 대화할 때 였다.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음식,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