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게, 먼저 복권부터 사게나.’
우스갯소리부터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복권이 당첨되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도 복권에 맞게 해 주세요. 착한 일도 많이 하고 아직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교만하지 않겠습니다.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하나님으로부터 기별이 왔습니다. ‘이보게, 먼저 복권부터 사게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言行一致’는 사람을 평가하는 보편적인 진리이자 가장 큰 덕목입니다. 4글자의 쉽고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진리인데 왜 그럴까요?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실천과 관련해 예전에 소개해 드린 두 개의 글을 가져오겠습니다.
三歲孩兒雖道得 八十老翁行不得(삼세해아수도득 팔십노옹행부득)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비록 세 살 먹은 아이라도 도를 얻을 수 있지만 팔십 된 노인이라도 행하지 않으면 도를 얻기 어렵다.”라는 뜻이다.
고승에게 깨우침을 받기 위해 물어봤다.
“어떤 것이 佛法의 大義입니까?”
“나쁜 일 하지 않고 좋은 일 하는 것이다.”
너무 평범하다. 실망해서 다시 물어봤다.
“그것은 세 살짜리 아이도 알 수 있습니다.”
“三歲孩兒雖道得 八十老翁行不得”
아무리 쉬워도 행함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어찌 세 치 혀의 현란함만으로 얻으려 하는가.
다음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최진석 著, 소나무 刊)’ 에서 프롤로그(저기, 사람이 내게 걸어 들어오네.)가 마음에 듭니다. 저자인 최진석 씨의 지명도가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겠으나 ‘공자 왈 맹자 왈’에 멈추지 않고 현실 속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은 삶에 대해 어떤 자세이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작가 본인이 ‘언행일치’할 것 같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경지 정리가 잘된 땅에서 누구나 심으려고 하는 작물을 심고 남들보다 더 잘 되기만을 바라는 요행심을 갖는 것보다. 측량도 안 된 황량한 들판에 서서 땅과 자신의 관계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고민하는 우직한 자.
자와 컴퍼스로 그려진 설계도에만 의지하는 것보다 집 지을 땅 위에 서서 바람의 소리를 따르며 태양의 길을 살펴 점 몇 개와 말뚝 몇 개로 설계를 마무리할 수 있는 자,
외국 철학자들 이름을 막힘없이 들먹이면서 그 사람들 말을 토씨 하나까지 줄줄 외우는 것보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자기 말을 해보려 몸부림치는 자,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현실에서 이념을 새로 산출해 보려는 자,
이론에 의존해 문제를 풀려 하지 않고 문제 자체에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자,
봄이 왔다고 말하는 대신에 새싹이 움을 틔우는 순간을 직접 경험하려고 아침 문을 여는 자,
들은 말을 여기저기 옮기지 않을 수 있는 자,
옳다고 하더라도 바로 행동하지 않고 조금 더 기다려 볼 수 있는 자,
해야 할 무엇보다 하고 싶은 무엇을 찾는 데 더 집중하는 자,
바로 이런 자들이 “사람”입니다. 이성이 아니라 욕망의 힘이 주도권을 가진 것이지요. 그런 자가 내 작은 정원의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올 때, 저는 비로소 공간에 갇힌 시간이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으며 나지막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기, 사람이 내게 걸어 들어오네.”
정치 이야기 하는 것은 껄끄럽습니다. 지금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정치 이야기가 아닌 언행일치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한때 대통령보다 유명했던 인사가 조국이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즈음 모든 언론이 ‘조로남불’에 대해 기사를 썼다. 법학자답게 ‘법꾸라지’같은 답변으로 요리조리 빠져나갔지만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言行不一致’였다. 그는 입으로 ‘정의’를 외쳤지만, 실제 행동은 ‘정의’가 아니었고, 평등을 외쳤지만, 그의 생은 차별과 특권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잘못된 도덕관을 갖고 있지 않은가 의심됩니다. 법의 취지와 감정이 있음에도 문자 그대로의 해석하여 ‘탈법이 아니라 한다면’, 불리한 사안에 대해서는 ‘모른다.’로 일관한다면 그것이 교수인가? 서울대 교수인가? 지식인의 도덕적 의무인 앙가주망은 팽개쳐진 것인가?
국민이 원했던 것은 ‘사람’이었지 앵무새나 녹음기는 아니었다. 국민은 조국의 탈법(?, 아직 법원 판결 전이니 탈법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국민은 설령 조국이 탈법을 저질렀더라도 진솔한 사과를 했다면 반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 언행 불일치에 실망했다. 조국은 말은 빠르나 행동은 느렸고 늦은 행동조차도 말과 일치하지 않았고 정의를 내세웠으나 정의로운 행동이 뒤따르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는 입으로, 글로 망한 사람이 되었다. 아랫글은 그가 정의를 주장하며 외친 내용이나 읽어보면 그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많아 허탈하기까지 하다.
‘파리가 앞발을 싹싹 비빌 때 이놈이 사과한다고 착각하지 말라. 뭔가를 빨아 먹을 준비를 하는 것이므로 이놈을 때려잡아야 할 때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가가 삶을 결정해 버리는 사회, 끔찍하지 않습니까? 외고와 특성화고는 폐지되어야 한다.’
‘장학금 지급기준은 성적 중심에서 경제상태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수가 정치권과 관계를 맺거나 변신하는 경우에도 지켜야 할 금도가 있고 교수 1명이 국회의원이 되면 4명의 교수가 1년간의 안식년을 반납해야 한다.’
‘휴강과 강사 대체로 피해를 보게 된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맹모삼천지교, 맹모는 실제 거주지를 옮겼으니 위장전입이 아니다. 위장전입은 주소를 옮길 여력이 없는 서민들의 마음을 후벼 파는 소리이다.’
‘대한민국은 어린이들에게 주식, 부동산을 가르친다. 돈이 최고인 대한민국은 동물의 왕국이다.’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말아야 하며, 위대한 사람은 말과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논어에서 언급한 訥言敏行(눌언민행)이란 사자성어는 ‘말은 느려도 실천은 민첩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며, 자신을 성찰하여 말을 신중히 하고 말한 대로 실천하는 군자의 언행에 관한 이야기다.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꿈과 희망은 생각과 말로는 이룰 수 없다. 이루기 위해서는 실천과 때로는 모험을 해야한다. 꾸준하게, 때로는 10년, 20년이 걸릴 수 있는 길을 말 없이 가야 할 수도 있다. 성공이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는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