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2) (마이클 샌델著, 김영사刊)
고등학교 1학년 캘리 스마트는 인기 있는 응원단원이다. 뇌성마비를 앓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지만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2군 경기 때 사이드라인에서 선수들과 관중을 열광케 했지만, 시즌이 끝나며 응원단에서 방출되는 신세가 되었다. 일부 응원단원과 학부모의 촉구로 학교관계자는 켈리에게 다른 응원단원과 마찬가지로 다리 일자로 뻗기와 공중회전 등 엄격한 체조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응원단장 아버지는 캘리의 안전을 위해 응원단 활동 반대의견을 이끌었고 캘리의 어머니는 캘 리가 박수갈채를 받는데 분노해서 반대한다고 생각했다.
캘리 이야기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는 공정성 질문이다. 캘리가 반드시 체조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것은 부당한 요구인가? 응원단의 공중회전은 관중을 흥분시키므로 단원이 되려면 공중회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켈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응원단의 목적과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을 혼동하는 데서 나왔다고 말할 것이다. 응원단의 진짜 목적은 애교심을 높이고 관중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캘리가 휠체어에 앉아 환한 웃음으로 수술을 흔들며 사이드라인 관중석을 들썩거리게 한다면 응원단의 목적을 잘 수행했다고 이야기한다.
두 번째 질문은 분노에 관한 것이다. 응원단장의 아버지는 왜 분노했을까? 캘리가 불편했을까? 캘리가 딸의 자리를 빼앗을까 봐? 딸보다 빛날까 봐? 그것은 아닐 것이다. 내 예감은 이렇다. 그의 분노는 캘리가 자격도 없으면서 영광을 누린다는 생각에서 나왔을지 모른다, 딸의 뛰어난 능력을 보며 느끼는 자부심을 캘리가 조롱한다는 생각이다. 응원단원으로서 뛰어난 기량을 휠체어에서도 발휘할 수 있다면 공중회전과 달리 뻗기를 잘하는 사람에게 따르는 영광의 가치는 다소 떨어지게 마련이다.
캘리가 장애가 있지만, 응원단원으로 필요한 미덕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응원단원이 될 수 있다면 다른 단원이 누리는 영광이 어느 정도 위협받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다른 단원들의 체조 실력은 더 이상 뛰어난 응원기술의 필수요소가 아니며 다만 관중을 들뜨게 하는 볼거리 중 하나일 뿐이다. 응원단장 아버지가 옹졸하기는 해도 문제의 요지만은 정확히 파악한 셈이다. 한때 원래 목적과 그에 수반하는 영광이 분명했던 사회적 행위가 이제 캘리의 출현으로 그 목적과 영광을 새롭게 정의해야 했다. 캘리는 응원단원이 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님을 보여준 셈이다. 응원같은 사회적 행위는 응원만이 아니라특정한 우수성과 모범을 제시하는 목적도 수행한다. 응원단원을 뽑을 때 애교심을 높일 뿐 아니라 학생들이 존경하고 따르고 싶어하는 자질을 살펴본다. 응원단에 속한 학생과 부모들이 캘리의 적격 여부 논란에서 위기감을 느낀 까닭 역시 그와 관련된다. 부모들은 딸들이 갖춘 응원단원의 전통적 미덕이 존중받기 원했던 것이다.
응원단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핵심은 두 가지다.
1.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한다. 권리를 정의하려면 문제가 되는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telos:목적, 목표, 본질)를 이해해야 한다.
2. 정의는 영광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추론하거나 논의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을 이해하는 관건은 그 둘의 무게와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근현대의 정의론은 영광, 미덕, 도덕적 가치문제에서 공정성과 권리를 분리하고자 한다. 여러 목적에 중립적인 원칙을 찾아내,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직접 선택하고 추구하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에 관한 논쟁은 영광, 미덕, 그리고 좋은 삶의 본질에 관한 논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인가? 능력과 자격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는 분배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렸다. 정의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대상과 그것이 할당될 사람’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는 ‘평등한 사람들에게는 평등한 대상들이 할당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려운 질문이 생긴다. 어떤 점에서 평등인가? 답은 우리가 무엇을 분배하는가. 그리고 그와 관련된 미덕은 무엇인가에 달렸다. 이를테면 플루트를 분배한다고 해보자. 누가 최고의 플루트를 가져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최고의 플루트연주자가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정의는 능력에 따라 우수성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된다. 플루트 연주의 경우 능력이란 플루트 연주 실력이다. 만약 정의가 부, 신분, 아름다움, 제비뽑기 같은 기준에 따라 차별 적용된다면 부당한 일이다. 최고의 악기를 최고의 음악가에게 주었으니 최고의 음악을 빚어내는 긍정적 효과도 나타날 테고 모두가 즐거워함으로써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도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유는 이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재화의 목적에서 그 재화의 적절한 분배에 이르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 방식은 목적론적 추론의 예를 보여준다.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하려면 해당 재화의 텔로스, 즉 목적을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목적론적 추론은 정의를 고민하는 방식치고는 낯설지만 분명 일리가 있다. 대학 내 최고 테니스코트 사용권에 대해 가정해보자. 사용료를 비싸게 하여 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줄 수도 있고 노벨상을 받은 거물급 교수에게 우선권을 줄 수도 있다. 노벨상 수상자 둘이 겨우 그물을 넘길 정도의 형편없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이때 대학 테니스부원이 와서 코트를 사용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학자 두 사람을 질이 떨어지는 코트로 옮기도록 하고 이류 선수가 쓰기에는 아까운 그 코트를 테니스부원이 사용하도록 해야 하는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경매에 나왔을 때 어느 부자가 이자크 발만 보다 높은 가격에 낙찰받아 거실에 장식용으로 전시하게 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대학에 입학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대학의 목적, 즉 텔로스란 무엇인가?’ 대학은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존재하므로 학업성취 가능성이 대학입학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대학은 특정 시민의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기에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의 지도자가 될 능력 등을 입학기준에 넣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대학의 텔로스를 가려내는 일은 적절한 입학기준을 결정하는데 필수이다. 이는 대학입학에서 정의의 목적론적 측면을 드러낸다.
요즘에는 분배, 정의를 토론할 때면 주로 소득, 부, 기회의 분배를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분배 정의는 대개 돈이 아닌 공직과 영광의 분배와 관련된 문제였다. 누가 통치권을 쥐어야 하는가? 정치 권력은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해 보인다. 1인 1표 이외의 방법은 차별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배 정의이론들이 차별적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문제는 ‘차별이 정당한가?’이다. 답은 해당 활동의 목적에 달렸다.
그렇다면 정치권리와 권력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기 전 정치의 목적을 물어야 한다. 정치연합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정치공동체마다 고민하는 문제가 다르므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 같다.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플루트의 목적은 연주와 관련이 있고 대학 목적은 교육과 관련이 있다. 정치활동의 목적과 목표도 그렇게 정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정치에 특별하고도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정치는 다만 시민이 지지하는 다양한 목적에 가능성을 열어둘 뿐이다. 그렇기에 선거가 있어 특정 시기에 사람들이 집단으로 어떤 목표를 추구할지 선택하지 않는가? 정치공동체에 미리 특정 목표를 부여한다면 시민들이 결정할 권리를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할 위험도 있다. 정치 텔로스, 즉 목적을 단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마음으로 반영한다. 우리는 정치를 사람들 스스로 목적을 선택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게 정치의 목적은 어느 목적에도 치우치지 않는 권리의 틀을 정하는 게 아니라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
부자들인 자기들이 통치해야 한다며 과두정치를 행하는 독재자들과 자유로운 신분이 시민권과 정치 권력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자들 모두를 비난했다. 정치공동체는 재산을 보호하거나 경제적 풍요를 달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두정치가 들은 틀렸다. 정치공동체가 오직 그런 것이라면 갑부가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정치공동체가 다수에게 주도권을 맡기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자들도 틀렸다. 그는 정치의 목적이 다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다. 국가의 목적은 상호 방위를 위해 동맹군을 파견하거나 경제교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목표는 좋은 삶이며 여러 제도도 그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숭고한 행위인 좋은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과 미덕을 계발하게 만드는 것,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며, 시민 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최고 공직의 영광은 미덕이 가장 뛰어나고 무엇이 공동선인지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라면 흔히 타협, 가식, 부패를 떠올리기에 이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시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보다 더 숭고하고, 정치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와 다르다.
첫째, 폴리스의 법은 우리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고 좋은 인격을 형성하여, 시민의 미덕을 갖추게 한다. 둘째, 시민의 삶은 자칫 휴면상태에 빠지기 쉬운 심사숙고 능력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게 한다. 집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 무대에 올라가 대안을 저울질하고, 우리 생각을 논의하고, 통치하고 통치받을 때만이, 한마디로 시민이 될 때만이 심사숙고에 능숙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