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81. 인간이 그리는 무늬(3)(최진석著, 소나무刊)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 ‘자기의 것’을 하는 사람

by 물가에 앉는 마음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문과와 이과로 나뉘는데 문과 학생은 정치, 경제, 역사를 전공하는 학과로 진학하고 이과 학생은 물리, 수학, 과학을 전공합니다. 이과 학생의 전공에는 사람이 없고 문과 학생의 전공에는 사람이 우글댑니다. 理(리), 옥돌에 새겨진 무늬를 ‘리’라 하는데 옥돌의 무늬는 자연이 그린 것입니다. 文(무늬 문), 옷의 문양을 사람이 그리듯 人文은 사람이 그리는 무늬라는 말입니다.

시대의 구분을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근거는 사람이 생각하는 틀 즉, 세계관입니다.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접어드는 선언은 베이컨이 주장한 ‘아는 것이 힘이다.’ 인간의 힘이 신의 은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했는데 데카르트 이전의 사람들은 인간은 신에 의해 존재한다고 믿었지요. 이처럼 같은 사람들이지만 세계관에 따라 시대가 구분되고 그리는 무늬가 다릅니다. 고대인은 고대식 무늬를 그리고 중세인은 중세의 무늬를 그립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공부하는 학문이 인문학인데 언어의 수사적 기법을 사용하여 감동의 형식으로 무늬의 정체를 알게 해주려는 것이 문학이며, 사건의 시간적인 계기를 재료로 삼아 무늬의 정체를 알게 해주려고 하면 사학이 됩니다. 명증한 범주의 개념들로 세계를 포착하여 그것들의 관계 및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무늬를 알게 해주면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상상력이나 창의성은 이념이나 가치관의 굴레를 벗고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서 스스로 우뚝 섰을 때 움트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자기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는 기존의 이념이나 가치관, 신념이 새로운 것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합니다. 마치 성공한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성공기억인 것처럼 성공기억이 너무 강하면 새로 직면하게 되는 맥락을 보지 못하고 성공했을 때의 맥락으로만 봅니다. 지난 시대의 기억으로 새 시대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지속적인 성공을 하려면 이전의 성공기억을 벗어나 새로운 상황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봐서도 안 됩니다. 오직 텅 빈 마음을 가지고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으로 하여금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게 하는 강제성도 강해집니다. 이념가들이 변화하지 못하다가 실패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창의성은 뭡니까? 이념, 신념, 가치관과 같이 자신을 채우고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던 기존의 굴레를 뚫고 나와 그들을 밟고 우뚝 서거나 그것들을 손안에서 탁구공 다루듯이 가볍게 희롱할 수 있게 된 독립적 주체가 인간이 그려 나가는 무늬의 정체와 방향에 대하여 꿈꿔보다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서보는 일입니다. 창의성을 원하는가? 상상력 갖기를 원하는가? 먼저 자기한테 물어봐야 할 일입니다. 내가 나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을 혹시 나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지식과 가치를 나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에게 심각하게 물어봐야 해요. 자기가 자기로 존재할 때에라야 비로소 인문적 통찰의 첫걸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식과 이념의 지시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압도하고 지배할 수 있어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철학을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 면접할 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을 공부하고자 지원했냐는 것입니다. 어떤 수험생들은 ‘한국사회의 문제가 소통이라 하머마스를 연구해 한국의 소통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고 또 다른 학생은 ‘한국의 도덕질서가 무너졌기에 유가 철학을 공부해 질서를 바로잡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 학생에게 ‘그런 무거운 사명을 누가 학생에게 부여했습니까?’ 되물으면 학생들이 당황합니다. 대답에 ‘자기’가 빠져 있어요. 뜬금없는 사명감만 있을 뿐 ‘자기’ 없이 인생을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한국사회는 걱정하지 마세요. 간곡히 말하건대 제발 그러지 마세요. 자기는 자기 일만 잘 해결하면 돼요. 자기만 잘하면 한국사회는 저절로 잘 되게 되어있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지 않고 왜 스스로를 사명의 완수자가 되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지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어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사회’나 ‘국가’에 양보하면 안 됩니다. 각자 자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튼실한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라야 건강합니다. 사회를 위해 자기 욕망을 소외시키는 개인들의 종합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결국 부조화 스럽고 비틀어집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 ‘자기의 것’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길 수 있으며, 즐겨야 잘 할 수 있지요. 즐겨서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그 잘하는 성취로 한국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어요. 사명감에 짓눌려 일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행복한 개인들로 자라나서, 그런 개인들이 이룬 사회라야 강하고 튼튼하며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도덕이 유지되고 경쟁력을 갖게 됩니다.


어느 날 공대 출신 학생이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지원해서 점잖게 거절해서 빨리 보내려 했습니다. 대학원에 오려면 갖춰야 할 기본지식에 대해서도 어느 하나 대답을 못 했어요. 면접을 마무리하려는 찰나에 습관적으로 물었습니다.

‘무엇을 연구하려고 하는지요?’

‘도가 철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왜요?’

2분 정도 끙끙대며 겨우 한마디 했습니다.

‘저는 도덕경을 읽을 때가 제일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저는 그 순간 ‘아, 나한테 사람이 하나 걸어 들어왔구나!’ 하는 전율을 느꼈어요. 몇 년 동안 기다렸던 대답을 그 학생에게 들을 수 있을지 생각지 못했던 거지요. 사회나 국가를 위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발성으로 비롯된 태도로 공부할 수 있기에 공부하는 것이 행복할 것이고, 행복이 열정을 제공할 것이며, 열정이 창의적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 각자의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인 최진석 교수가 중단의 굵은 글씨로 정리를 잘 해준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제 편지에 대한 댓글 중 비슷한 내용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와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고 희생하는 이타적인 사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제가 아래와 같이 답글을 달았습니다.

정의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실현해야 하는 규범과 가치를 말하는데, 객관적 정의란 인간의 상호관계, 사회적 관계에서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고 주관적 정의는 인간의 성정으로서의 정의를 말합니다. ‘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객관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성정을 말합니다. 본인이 위험하지만, 지하철 플랫폼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는 행위도 사회적 규범과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나, 자아’가 강하게 작용하는 겁니다. 그분도 ‘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579. 인간이 그리는 무늬(2)(최진석著, 소나무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