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 인간이 그리는 무늬(4)(최진석著, 소나무刊)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요?’

by 물가에 앉는 마음

인간은 ‘내가 나인가?’ 하는 질문을 항상 해야 합니다. 삶은 자기가 사는 것이기에 나 아닌 다른 것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항상 자기에게 해야 해요. ‘내가 나인가?’는 ‘나는 내 욕망을 따라 살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욕망’이 부정적 느낌은 우리가 ‘이성’의 신화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의 어원은 계산, 비례, 조화에서 비롯되어 보편성, 객관, 동일성, 질서 등의 개념과 한 식구를 이루면서 서로 긍정하고 친하게 지내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나’에게 있는 개별적 독립성보다는 ‘우리’에게 있는 공통의 성질이 우선권을 갖게 되지요. 그래서 ‘나’는 ‘우리’가 원하는 가치에 도달하려 노력하고, ‘우리’가 원하는 이념에 도달하기 버거워지면 열등감이나 불행한 느낌 속으로 빠져듭니다. ‘우리’ 속에서 ‘내’가 피폐해져 가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에 맞추다가 정작 ‘나’를 잃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나’들의 종합일 뿐이에요.

오직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충동, 힘, 의지 등을 ‘욕망’이라 부르는데, 욕망은 나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의지이며 충동이고 생명력이에요. 욕망이 거세된 인간은 ‘내’가 아닙니다. ‘나’를 ‘우리’에 가두지 마세요. 이제 여러분들에게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 여러분은 지금까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 여러분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바라는 일,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질 때 우리 사회는 건강해집니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샘솟게 되며 더욱 부드러운 사회가 됩니다.


‘버릇없는 요즘 애들’, 기존 또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관습의 틀을 벗어나니 구세대가 신세대를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할 때 출력해서 수정하는 구세대를 보고 신세대는 이해 못 합니다. 인문학을 하는 것은 사실 버릇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익숙한 것, 당연한 것, 정해진 것들에 한번 고개를 쳐들어 보는 일이에요. 왜? 익숙하게 하는 것, 편안하게 하는 것들은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럼 무엇이냐? 관습이거나 이념이거나 가치관이거나 그런 것들입니다.

인문학의 출발은 ‘생각’입니다. 철학의 출발이 믿음의 체계인 신화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철학 즉 인문적 사조가 시작되기 전인 신화의 시대에 인간이 하는 일은 신을 믿는 일이었으나 믿음의 대상에 고개를 쳐들고 인간의 길을 가겠다고 한 것이 철학의 시작입니다. 서양 철학의 시조 탈레스는 ‘이 세계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했는데 이 세계의 근원을 신이라고 믿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는 신의 계시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진 체계의 틀에서 온 것이 아닌 오직 탈레스 본인의 생각이었습니다. 철학은 인간이 신을 벗어난 사건에서 시작되었고 인간의 독립과 관계된 것입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로 중국 최초 철학자 노자, 공자 이전에는 이 세계 모든 일은 하늘이 결정한다고 생각했으나, 노자, 공자는 인간 스스로 삶의 의미와 질서를 인도할 틀을 만들려 노력했고 이것이 ‘도’이며 ‘도’는 믿음의 산물이 아니라 생각의 산물이지요. 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인문학은 출발부터 버릇없는 것이며, 인간들의 ‘생각’은 저항입니다.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요?’ 행복은 ‘우리’가 아닌 ‘내’가 느끼는 것인데 자기가 없기에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집단은 느낌을 갖고 있지 않고 이성이 지배하며 비율과 계산이 지배합니다. 이념, 믿음, 신념은 원심력을 갖고 있어 인간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높은 곳까지 도달하는가? 그럴수록 진짜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누가 저 먼 곳까지 도달하는가? 이러한 사명으로 남기에 맹목적인 광신도가 나옵니다. 그렇게 이념이 높아질수록 자기하고는 거리가 멀어지고 구체적인 삶과 아주 먼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념이나 신념을 기준으로 평가할 때 아름다운 일상은 존재할 수 없어요. 아름다움은 여러 사람이 합의하여 저 위에 걸어 놓은 것이니까요. 이상적인 기준으로 저 멀리 존재하고 있어서 구체적인 현재의 내 아름다움이 도달하기 어려워요. 아니 불가능해요. 이념과 구체적인 일상과의 차이에서 인간이 방황하고 차이가 클수록 불행이 커지며 자존감이 낮아져 자학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갖고 있는 이념과 신념을 보편적, 객관적, 합리적인 것이라고 칭송하며 진리로 확신합니다. 일시적으로 옳고 유용할 수 있으나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다? 아마 거짓말 일 겁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학교는 하나의 이념으로 관리되고 있어요. 하나의 기준을 강조하고 순종이 최고의 덕목입니다. 성적, 공부, 학습, 대학입시를 잘 해내는 기준에 순종하는 겁니다. 이런 내용이 기준이 되고 절대화되어 이를 근거로 학생들은 서열화 됩니다.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는 이 서열화가 학습의 능력뿐 아니라 학생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혈기 방장하고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아이들이 온전히 버티지 못합니다. 아래 서열의 학생일수록 부족한 사람이라 느끼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존엄성을 갖지 못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건 불행입니다.

자기를 믿고 스스로를 긍정해야 합니다. 긍정이란 것은 잘나고 좋은 모습의 나만을 긍정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못나고 추하게 보이는 나 역시 자신입니다. 추하게 보이는 것은 높은 기준에서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당신 책임이 아닙니다. 잘난 나만 받아들이고 못난 나를 외면한다면 자기가 자기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 사랑을 받지 못하는 개가 밖에서도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밖에 내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불행의 시작이죠. 자신에 대한 무한 애정, 무한 신뢰, 그것이 바로 행복의 시작입니다.


장자 逍遙遊(소요유)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惠子(혜자)가 魏王(위왕)에게서 박씨 하나를 얻었는데 열린 박이 너무 커서 물도 담을 수 없고 바가지로 쓸 수가 없었지요. 너무 커서 쓸모없다고 생각한 혜자는 박을 부숴버리고 말지요. 공연히 크기만 하고 쓸데가 없다고 불평하는 혜자에게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큰 박이 있다면 강이나 호수에 띄워 놓고 배처럼 타고 즐기면 될 터인데, 왜 그대는 납작하여 아무 쓸모가 없다고 불평만 하는가?’

그러면서 장자는 혜자를 ‘일정한 틀에 꽉 막혀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확실한 개념을 바탕으로 정확한 지식체계를 세우려 했던 혜시에게 박 이라는 물건은 물을 담거나 바가지로만 쓰일 뿐이죠. 장자가 혜자같이 일반 관념에 포박되어 있었다면 어떠한 창의적 행위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지요. 장자는 일반 관념체계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의 주체적 독립성에 따라 그 사태와 만났기 때문에 그런 창의적 행위가 가능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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