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지점은 어디냐?
독일 철학자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 했습니다. 아테네를 지키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는 지혜와 전쟁을 주관하는데 부엉이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대낮에는 무엇을 하고 있다가 잠잠해지는 황혼녘에 날기 시작할까요? 이것은 지식인의 소극성을 폭로하는 말입니다. 사건이 잠잠해지면 지식인들이 등장하여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분석을 하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들이 소위 지식이고 이론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군사전문가가 연평도 포격을 막지 못했어요. 포격이 끝나고 조용해지자 뉴스에 출연하여 포격의 의도와 사후 전망까지 분석 자료를 내놓았죠. 지혜의 부엉이들이 등장한 거죠. 대부분의 지식은 대낮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건은 흐르지만, 지식은 정지해 있다는 겁니다. 다음에는 다른 내용, 다른 맥락의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정지되어 있는 지식에 갇힌 지식인들은 지식이 제한되고 고정되어 있어 새로운 사건을 만나더라도 새로운 것으로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그만 구멍이 나 있는 대롱으로 세계를 보면서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고 허풍을 떱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세계를 전진시키는데 사실 별 역할을 못 해요.
경부고속도로와 인천공항을 만들 때 반대했던 그 많은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이 지금 어디에 있나요? 세계를 발전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론가들이 아니라 실천가들이고 행동가들입니다. 전문가들이 자기만의 경색된 틀로 실천가와 행동가들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됩니다. 지식으로 무장한 이론가들이 쉽게 지위가 높아져서도 안 됩니다. 전문가들은 실천가와 행동가들에게 사용되고 이용되어야 합니다. 실천가와 행동가들은 사건에 집중해요. 수준 높은 이론가들이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준 높은 행동가, 수준 높은 실천가들이 나오는 겁니다. 세계는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합니다. 그래서 내공 있는 실천가와 행동가들이 역사에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식인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미래지향적으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무엇을 이해하는데 머물러 있는 것이 되어선 안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식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 까지어야 합니다. 아는 것을 근거로 우리에게 아직 열려있지 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한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지식도 예측할 힘을 주지 않는 것이면 모두 가짜입니다. 어떤 지식인도 예측할 능력이 없다면 그가 가진 지식은 모두 허구입니다. 예측한다면 응용할 수 있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공자님도 논어의 자로 편에서 ‘시경에 나오는 시 삼백 수를 모두 외웠다고 하지만 그에게 조그만 정치적 사안을 맡겨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도 혼자 응대할 수 없다면 아무리 시를 많이 외웠다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라고 일갈하셨지요. 개념과 지식과 이론의 노예가 되면 예측할 수 있는 힘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지점은 어디냐? 행복입니다! 갈등 속에 휩싸이지 않게 해줍니다. 더욱 아량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해줍니다. 이념과 가치관과 신념의 체계를 벗어던지고 인문적 통찰의 길로 진입하는 순간 오로지 자기만 우뚝 서 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생명력이 충만한 오로지 자신만의 욕망이 드러납니다. 순수한 자기 욕망이 지식에 매몰되지 않고 그 지식을 닫고 지혜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나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줄 수 있는 의지, 생명력, 동력, 충동입니다.
자유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은 있는데 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할까?
행복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은 있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할까?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방면에서 인문학적 지식을 접촉했음에도 그 인문적 지식이 왜 우리 삶에서는 구체화하지 않을까요?
왜 나는 행복에 대한 지식만 쌓지 정작 내 자신의 행복한 삶을 꿈꾸고 실천하지 못할까?
왜 나는 자유에 대한 지식만 쌓지 정작 내 자유로운 삶을 생각하지 못할까?
왜 나는 행복과 자유를 창조하지 못할까?
인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활동이어야 합니다. 지식을 지혜로 숙성시키거나 자기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유연함, 행복, 창의성 등과 같은 인격적 단계로 밀어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지혜로 넘어가고 경험의 기억이나 지적체계들이 삶에서 활발하게 펼쳐질 수 있는 활동의 힘을 갖춰야 합니다. 이러한 힘을 ‘인문력’이라 표현하면 억지라 할 테니 ‘주체력’정도로 표현하겠습니다.
‘德(덕)’, 봉사, 헌신, 인자, 자애, 이해, 배려, 포용력 등 도덕적 가치들이 연상됩니다. 德의 개념은 주나라 때 만들어졌는데, 하늘의 신인 상제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고 지배받는 은나라를 주나라가 멸망시켰습니다. 망한 은나라나 정복자인 주나라도 인간이 신을 이긴 것이니 당혹스러웠습니다. 주나라가 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 德으로 은나라는 德을 상실했기에 신의 마음이 떠났고, 주나라가 德을 갖고 있기에 신의 뜻이 주나라로 옮겨왔다는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인간은 하늘에 대해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인간이 신에 대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최초로 드러낸 것입니다. 고대에는 통치의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제사로 제사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행사입니다. 제사장들은 음성을 듣기 위해 특별한마음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그런 마음 상태를 준비하기 위해 향이 많이 나는 음식을 삼가고 목욕하며 걸음걸이와 제사 집전 시의 절차 등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禮(예)입니다. 제사장은 禮를 지켜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만들었으며 이때의 정제된 내면 상태를 德이라 합니다.
공자가 말하길 ‘德不孤 必有隣(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德을 가진 사람은 이념과 신념에 부림을 당하지 않고 지식에 조롱당하지 않아요. 감화력이 향기처럼 뿜어져 나와 자발적 동조자를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德이 있으면 원수도 측근으로 만들 수 있는데 이를 카리스마 또는 아우라라고도 표현합니다. 이것이 德의 표현입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남들이 모두 믿고, 무슨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 德의 향기가 발휘하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