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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 인간이 그리는 무늬(6)(최진석著, 소나무刊)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에 속지 마세요.

by 물가에 앉는 마음

무엇을 물었을 때 바로바로 답하는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 하는데, 대답 잘하는 것을 똑똑한 것으로 아는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바보들만 살게 됩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발붙이기 어렵게 되지요.

질문하려면 문제가 있어야 하고 호기심이 있어야 문제가 만들어집니다. 자기가 욕망의 주체로서 작동할 때 호기심이 생기며 그 호기심을 내뱉어 보는 일, 이것이 질문입니다. ‘자기’는 질문할 때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인재들은 질문하지 않고 대답하는 인재로 길러졌습니다. 유명한 사건이 하나 있는데요, 2010년 11월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개최되었고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했습니다. 미국 기자들이 중간선거 참패와 한미FTA에 대해 오바마의 지도력 부재 쪽으로 질문하자 오바마가 한국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줍니다. 세계 최강 미국의 대통령이 특정 국가 기자에게 질문권을 준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한국기자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고 정적만이 흐릅니다. 정적을 깨고 중국 기자가 손을 들자 오바마가 거절하고 다시 한국기자에게 질문권을 주지만 여전히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위 지식인인 기자들까지 질문할 줄 모르고 대답만 할 줄 아는 길러져 호기심과 문제의식이 생기지 않은 것이지요.


한 가지 사례가 더 있습니다. ‘질문도 못 하는 대학생들이 어떻게 자본주의 혁신 이끌겠나?’ 2011년 12월 12일 조선일보 기사 제목입니다. 기사 말미에 폴 베르간 노르웨이 공대 교수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초등학생 시절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시스템을 갖추고 기술적인 배려로 가능해질까요? 토론하는 문화는 억지로 정착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화 속에서 살 학생들을 다르게 배양하여 문화 자체가 그런 식으로 드러나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할 수 있게 한다는 겁니다. 왜 토론이 되지 않을까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할 말이 없을까요?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의식이 없을까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호기심이 없을까요? 욕망이 발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욕망이 발동되지 않을까요?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독립적 주체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움직이기만 하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체가 독립적이지 못하면, 즉 주체가 덕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면 세계를 자신만의 민얼굴로 마주할 힘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키고 아는 것을 바탕으로 모르는 곳으로 건너갈 수 있고요. 자신을 인격적으로 성숙시키고 인문적 통찰과 미학적 승화를 완성하여 자신의 삶을 행복이라는 각도에서 영위하며 자유를 구가합니다. 타인과 교감할 수 있고 상상력도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서 싹을 틔웁니다. 질문의 꼬리를 연결하여 꿈을 꾸는 것이 상상하는 일이죠. 창의성도 질문에서 시작되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도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대답은 사람의 성숙 정도를 표현 못 하지만 질문은 사람의 성숙 정도와 수준을 표현합니다. ‘왜 상상력이 부족한가?’라는 질문에 가장 원초적인 답변은 아마 ‘질문을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 정도일 겁니다.


몸속에만 머물기 버거운 영혼이 밖으로 뛰쳐나온 것, 그것이 글이죠. 진실하게 텅 빈 마음으로 자기를 들어내야 할 때라야 제대로 된 글이 나오죠. 그래서 힘이 잔뜩 들어간 대낮에는 글이 잘 되지 않아요. 술이나 생활에 지칠 정도로 부대끼고 나서, 육신에 힘이 빠지고 온갖 것이 다 포기된 다음에라야 글이 잘 써지죠.

글을 읽으면서 독자는 글을 쓴 그 사람을 만납니다. 글 쓴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을 썼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문체의 차이는 바로 인격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글쓰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훌륭한 장치 하나를 버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을 만나고 싶으면 글을 써 보세요. 아직 스스로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면 최소한 다른 사람의 글이라도 베끼는 연습을 하세요. 꿈을 이루고 싶으면 자신과 약속을 해야 하는데 생각으로만 하는 약속보다 글로 쓴 자신과의 약속이 더 선명해집니다. 인간은 글을 쓸 때 자기를 만납니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와 대면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훈고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서늘한 기운을 진 채 새벽 손님처럼 다가오는 “문제”를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를 손님처럼 대접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상상하는 일이고, 그 문제를 붙잡고 나누었던 상상을 구체적으로 시도하는 것이 우리는 창의성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이죠.


자기를 대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장치는 바로 운동입니다. 등산하면 수많은 깔딱 고개를 만납니다. 숨이 끊길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오지만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깔딱 고개 위에서 자기를 만납니다. 머리를 굴리고 혀를 놀려 뱉은 말들로는 근육에 맺히는 땀으로 배운 것을 절대로 당해 낼 수 없어요. 책 속에는 길이 없어요.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에 속지 마세요. 책 속에는 책을 쓴 그 사람의 길이 있을 뿐이지 나의 길이 아닙니다. 다만 앞선 이들이 고뇌한 흔적을 엿보고 힌트를 얻으면 족할 뿐, 책 속에서 여러분 자신의 진리를 구하지 마세요. 다른 이의 이야기를 내 것인 양 받아들이지 마세요. 몸을 움직여 한계를 경험할 때라야, 극한의 경계선에 설 때라야 자기 자신이 성큼 드러납니다. 이 경험이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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