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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2)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2) (진중권著, 창비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디지털의 인간학: 호모 루덴스의 귀환

흔히 인간을 가리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하지요. 물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피엔스형 인간들은 앞으로도 계속 필요할 것이며, 어느 시대든 기술자는 존재했고 미래에는 더 많은 기술자들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이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술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미 있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을 떠올릴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위징아(J. Huizinga)가 말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가 복귀하는 겁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호모 루덴스에 가까웠죠. 17세기 이후 이성주의가 대두하면서 과거의 호모 루덴스가 호모 사피엔스로 바뀌어 갔을 겁니다.

매직 써클(magic circl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마술사가 마술을 부릴 때 마술의 힘이 미치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일상의 물리적 공간과 구별되는 공간으로 그 개념은 놀이에도 적용됩니다. 오징어 놀이는 깨금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공간이 바로 매직 써클이고 그 공간 밖에서 깨금발을 하고 다니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위징아에 따르면 인간의 문화는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전개된다고 하지요. 실제로 과거에는 전쟁, 정치, 노동, 사법, 철학, 예술 등이 모두 놀이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현실 위에 매직 써클이 중첩되어 있다가 놀이가 진지한 활동으로 되어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놀이는 아이들의 영역으로 주변화 합니다. 조상들의 모내기는 춤과 노래가 동반되어 노동과 놀이가 공존했습니다. 요즘 공장노동자들을 보면 공장에서의모든 동작은 생산에 최적화 됩니다. 극단적 형태의 테일러시스템인데 여기에 포드의 분업시스템이 가미됩니다. 노동자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 무엇의 일부분인지도 모르면서 일을 합니다. 과거의 대장장이는 전체과정을 자신이 관할했기에 자기 일에서 재미를 느꼈지만 현대 노동자들은 모던타임즈의 찰리채플린처럼 기계적인 동작만 반복하며 거기에는 유희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결국 문명화, 이성화, 산업화의 과정에서 과거의 유희인이 축적욕이라는 욕망의 엔진에 의해 움직이는 이해타산적인 차가운 인간, 이른바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전락한 겁니다. 그 결과 우리는 놀 줄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린 겁니다. 합리화 관점에서 놀이는 시간과 비용만 잡아먹는 활동이니까요.


한국의 예를 들어봅시다. 학창시절 우리는 거의 전적으로 국, 영, 수에만 매달려 이성 계발에 집중합니다. 공부시간에 논다는 것은 죄악으로 여겼죠. 지금도 마찬가지로 컴퓨터게임을 마약과 같은 중독물질로 묶어 규제하려 합니다. 그러다 졸업하면 가정생활을 포기한 ‘회사인’이 될 것을 강요받는데 그 이상이 이른바 ‘삼성맨’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거죠? 오로지 재산축적에 진정한 희열을 느끼는 ‘경제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위아징아는 놀이의 측면이 사라진 현대문명을 한탄하며 호모 루덴스가 복귀하기를 희망했으나 디지털시대에 유희형인간이 복귀하리라고는 예상 못했습니다. 디지털 기술과 더불어 자본주의 성격자체가 변함에 따라 호모 루덴스가 복귀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현실에 매직 써클을 중첩시키는 것이 오늘날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중요과제라 할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잘 놀 줄 아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생산 자본주의’가 50년대 이후 급속히 ‘소비 자본주의’로 모습이 바뀝니다. 과거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마트에서 카트를 끄는 소비자 대중이 된 겁니다. 사회주의는 80년대에 몰락하지만 사회주의 이념의 퇴조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거죠 자본주의성격이 바뀌는 것이죠. 이 소비자본주의가 디지털기술을 만나 ‘기호자본주의’, ‘미적자본주의’, ‘유희자본주의’ 의 형태로 전개됩니다. 이들 자본주의 유형은 모두 물리적인 대상으로서의 상품 위에 매직써클을 중첩시킨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써클은 ‘기호’의 층위일수도 있고, ‘놀이’의 측면일수도 있고, ‘미적 가치’와 같은 속성일수도 있습니다.


‘기호자본주의’의 예는 전통경제학에서 상품가격은 수요공급에 따라 값이 쌀수록 많이 팔리고 비싸면 덜 팔려야 합니다. 그런데 강남에서는 5백만 원짜리 가방을 2천만 원에 내놓으면 잘 팔립니다. 5백만 원 정도는 카드할부로 살 수 있으나 2천만 원은 강남부자 아니면 못사는 금액이거든요. 신분을 과시하는 기호로 소비하는 겁니다. 기호자본주의는 미적자본주의로 이어집니다. 기호의 기능을 하는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제품의 디자인이거든요. 사실 한국과 중국의 기술격차는 몇 개월입니다만 그보다 큰 것은 디자인입니다. 90년대 초 대우의 ‘탱크주의’를 지금 보면 황당합니다. 요즘 휴대전화 광고에서 2026년까지 사용할 만큼 튼튼하다면 사겠습니까? 이십년 사이에 소비의 양상이 바뀐 겁니다. LG전자의 광고 ‘우리는 제품이 아니라 작품을 만듭니다.’ 이것이 ‘미적 자본주의’입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미학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사용자 체험(user experience)라는 표현으로 사용자가 제품을 통해 어떤 체험을 하느냐가 중요해졌습니다. 존 듀이(John Deway)가 예술의 본질은 ‘경험’을 매개로 하는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체험을 전달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예술가들이 담당해온 과제였습니다. 그 체험은 시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우디에는 냄새디자이너가 운전석에 들어가는 소재를 가열해 거기서 나는 냄새를 맡아봅니다. 후각디자인을 하는 거죠. 착석감, 핸들의 그립감, 엔진 음향..., 이 모든 것이 디자인에 포함되는 ‘오감디자인’입니다. 예전 철학자들은 예술을 ‘상상력의 유희’라 불렀습니다. 미학적 자본주의에서 요구되는 인간상은 오감디자인을 할 줄 아는 예술가형 인간형, 한마디로 호모 루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이와 예술의 밀접한 관계가 암시하듯 미적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유희자본주의로 진화합니다. 그 경향을 반영하듯 사용자 체험(user experience)은 유희자 체험(player experience)라는 말로 바뀌고 있습니다.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란 말을 들어봤을 텐데 최근 기업의 경영이나 제품생산에 ‘게임화’가 도입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과자를 사서 듣더니 그 안에 있는 딱지만 챙기고 과자를 버리더라고요 고객에게 포인트를 주고 등급을 승급시키는 것도 게이미피케이션입니다. 에이즈 바이러스인 HIV단백질 구조를 푸는데 국가별, 개인별 경쟁을 시켰더니 십여 년 동안 풀지 못하던 것을 단 3주 만에 풀었습니다. 게이미피케이션이 일어나면 어디까지가 쓸모없는 놀이이고, 어디까지가 진지한 노동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노동과 여가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중은 컴퓨터로 일하고 컴퓨터로 놉니다.


다시,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디지털 시대에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무엇을 공부할지는 각자 대답해야 하므로 보편적 답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호모 루덴스’의 개념을 도입하여 디지털의 인간학을 전개했고 ‘노동이 유희가 되는 사회’라는 관점에서 디지털 기술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가 새로운 형태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드렸습니다.

다들 학문의 융합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같이 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과학 쪽에서도 소수에 불과하고 인문학 쪽에서도 소수 일겁니다. 요즘에는 하도 답답해 인문학을 하는 학생에게 과학을 가르치느니 과학 하는 학생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빠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으로는 형식의 고민, 즉 인문학의 새로운 플랫폼에서 텍스트와 사운드,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는 텍스트로 작성한 콘텐츠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시각적, 청각적으로 프레젠테이션하는 방식에 관한 고민에 그치지 않습니다. 동시에 글쓰기의 혁명, 즉 글쓰기 자체의 급진적 변화에 대한 내재적인 고민이기도 하죠. 그리고 내용에 대한 고민이겠지요. 디지털시대의 존재론, 인간학, 사회학의 구축을 위해서는 뇌과학, 인공지능, 진화생물학등 다양한 과학의 분과와 인문학 사이에 접점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주 많은 연구자가 필요한데 관심 있는 사람이 없어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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